2011-07-04
황학동 시장, 벼룩시장, 도깨비시장, 개미시장, 고물시장, 마지막 시장 등 숱한 이름으로 불리는 곳. 무언가 쓸쓸한 느낌이 드는 이 곳. 낡고 수명이 다한 것들이 모여드는 이 시장은 꽤나 전통이 깊은 곳이었다. 청계천에 위치한 황학동은 왕십리와 가까워 조선 초부터 사대문 안 사람들의 일상에 필요한 물건들과 먹거리가 모이고 매매되는 장소였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이후부터는 먹고 살기 어려워진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자연히 못 쓰게 된 고물들이 거래되기 시작했다.
글 | 전누리 d-페다고지 기획 & 리포터
에디터 | 최유진(yjchoi@jungle.co.kr)
1960년대 경제개발 계획이 실시되고 물건의 생산이 늘어나면서 벼룩시장에는 고물보다는 보존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민속골동품점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골동품상들과 수집가들이 모여들었고, 70년대에는 한국의 최대 골동품 시장으로 유명세를 탔다. 정부는 이렇게 형성된 황학동의 골동품점들을 86년 서울 아시안 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 게임을 위해 장안평으로 이전시켰고, 그 결과 황학동에는 십 여 개의 골동품점만 남고 나머지는 중고물건을 파는 가게들로 대체되어 본격적으로 중고품시장이 형성되었다.
이후 1990년대에는 기존의 중고품점들이 밀려나고 전기전자 중고품점들이 크게 득세하기 시작하며 시장의 분위기를 바꿔갔다. 이렇게 역사가 오래된 황학동 시장은 점포와 노점이 혼합되어 시장을 이루었고 서울의 근대화 과정에 따라 자연스레 거래물품을 변화시켜가며 지속적인 변화와 발전을 거듭했다. (진양교, 『서울생활의 발견』, 현실문화연구, 2003)
무엇이든 낡은 것들이 모여드는 서울 최고의 중고 시장으로 다시 자리를 잡으면서 황학동에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을 구하러, 혹은 지나간 추억과, 짙은 사람 냄새를 맡으러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들었다.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물건들, 가격을 흥정하는 소리, 그 어수선함 속에서 배어나오는, 무어라 딱! 표현할 수 없는 오래된 것들만의 내음과 형상, 그것과 뒤범벅된 사람들의 모습이 또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변화와 발전을 거듭했던 황학동은 2000년대 들어 다시 한 번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 청계천 복원 공사가 시작되면서 정부는 또 다시 ‘황학동 벼룩시장’과 주변 노점 상가 정리를 선언했고, 상인들은 서울시에서 마련한 동대문 운동장에 새로운 자리를 마련했다. 하지만 동대문운동장이 디자인 파크로 조성 되면서 또 다시 벼룩처럼 흩어져야 했다. 그러다가 2008년 4월 서울시는 청계천과 인접한 신설동 숭인여중 부지에 30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5,056㎡ 크기, 노점 894개의 서울풍물시장(Seoul Folk Flea Market)을 개장하였다. 관광산업과 연계한 세계적인 풍물시장 시대의 개막이었다.
뒤엉켜 있음에서 정연하게 정돈됨으로 : 풍물시장으로의 변신
프랑스 사회학자 르페브르는 삶의 공간을 세 가지 개념으로 분류했다. ‘공간적 실천(Spacial practice)', '공간의 재현(Representation of space)', '재현의 공간(Space of representation)’ 이라는 그의 개념은 황학동 시장의 변천사가 지닌 공간의 특성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앙리 르페브르, 『공간의 생산』,에코리브르, 2011) ‘공간적 실천’은 우리의 습관적인 활동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인지되는 지각공간을 의미하며‘공간의 재현’이란 도시계획가, 기술관료 등의 전문가에 의해 추상적 개념이 물질적인 형식으로 현실에 실현된 것을 말한다.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인지되는 공간과 계획되어 정체성이 부여되는 지배적 공간을 인식하는 태도로‘재현의 공간’을 들었다.
여기서‘공간적 실천’은 우리가 산책이나 일을 위해 이동하는 등 일상의 활동을 통해 사회적 삶을 구조화하는 공간개념으로 공간이 구성되고 인지되는데 기본이 되는 개념이다. 황학동 시장도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 무의식적으로 인지되던 공간이었다. 우리가 어떤 장소를 기억하거나 회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어떤 것들. 그것은 그곳에서 우리가 했던 행동, 말들, 혹은 같이 있었던 사람들의 표정이나 그 어떤 사건들을 기억하기 때문에 그곳에서 무형이든 유형이든 공간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간적 실천은
우리의 공간에서의 일상성을 형성하는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시는 현대적 건물을 새롭게 지어 기존 시장을 건물 안으로 이동시켰고, 점포를 일정한 분류 아래 나누어 배치시킴으로서 둘러보기 깔끔하게 정돈했다. 무의식적으로 생겨났기에, 무질서하고 어수선한 분위기로 인해 사람들을 끌어당기던 공간은 계획된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 매력을 일시에 잃어버린 것 같았다. 풍물시장은 자발적인 공간, 자생적으로 생겨난 ‘공간적 실천’에서 정부에 의해 ‘공간의 재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러면서 정돈되고 균일화 되었지만 우리 삶의 얼룩처럼 스며들어 있던 오래된 것들의 특성인 불 균질성, 엉켜 있음, 번져나감 등의 특성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닐까.
만국기 - 때 지난 축제의 상징
계획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서울풍물시장은 가는 길부터 찾기 쉽게 정리되었다. 1, 2호선 신설동역 9, 10번 출구에서부터 눈에 잘 띄는 노란색, 녹색, 파란색 등의 원색으로 만든 안내문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만국기는 그 끝에 시장이 있음을 알려준다. 색색의 안내판과 만국기는 시장의 풍경을 미리 짐작케 하며 시선을 끌어 들였다.
만국기는 여러 나라의 국기를 줄에 매달아 장식하는 데 쓰이는 기장식의 일종이다. 만국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51년 제1회 런던 만국박람회(지금의 엑스포)였고, 이후 1889년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에펠탑에 전등과 국기를 걸어놓고 불을 밝히면서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으며 '축제의 기표'로 자리 잡았다(네이버 위키백과). 이처럼 세계 곳곳의 첨단 물건들이 모인 곳이라는 의미에서 각국의 국기를 내걸어 박람회의 분위기를 돋우는데 사용된 만국기는 운동회뿐만 아니라 대학의 축제, 새로 개업한 상점의 입구에 걸려 풍선과 더불어 과거에서부터 오늘날 까지 축제와 놀이를 의미하는 가장 강력한 시각적 기호가 되었다.
풍물시장에 걸린 만국기를 따라 걸으며 축제가 열리는 특별한 공간에 들어선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이 만국기는 ‘역시 황학동답다’ 라는 느낌을 강하게 해 줄 뿐, 무언가 도시적인 축제의 세련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값싼 종이 재질에 2-3가지 정도의 희미한 색깔로 만들어진 만국기는 오히려 시장을 퇴락의 상징물처럼 보이게 했다. 지난 60년간 강한 시각의 유혹을 받아와 단련된 사람들에게 만국기는 단지 초라한 풍물시장의 모습을 더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듯 했다.
인위적으로 계획된 공간의 특성은 풍물시장 내부의 색깔별로 구획된 공간과 안내 표지판에서도 드러난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무지개 색으로 품목별 공간을 분리하여 누구나 한 눈에 어떠한 물건을 팔고 있고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러한 분류는 방문객의 동선을 최소화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역할을 한다. 2층으로 가는 길에는 탈곡기, 키, 지게, 펌프, 죽부인 등 전통생활용품과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전화기, 오르간, 간판 등을 전시하고 있어 근대의 민속박물관 기능도 일부 겸하고 있는 듯했다. 각기 다른 역사 속의 물건들이 아무런 연속성 없이 뒤엉켜 있는 모습을 보자니 맹렬한 속도로 달려온 우리네 역사가 그 속도로 인해 미처 챙기지 못해 깨져 나간 것들이 전시 된 듯한 환영까지 불러온다.
외관 _ ‘공간의 재현’의 현실화
풍물시장 건물
황학동 벼룩시장이 청계천변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건물의 형태를 통해 알려주려는 듯, 풍물시장 건물은 양 쪽 언덕 사이로 물이 흐르고 있는 모양을 본뜬 한자 내 천(川)자의 형태로 지어졌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하얀색 천막의 내 천(川)을 알 수 있지만 우리의 시야에는 높은 건물로 둘러싸여 있어 직접 확인할 수 없고 조감도에서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을 연상시키도록 설계한 건물의 형태는 후손으로 하여금 시장의 역사를 기억하고 유지하도록 이끌어 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디자인에 이런 이름 혹은 명분을 끌어들이는 것이 과연 성공적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형상성 자체만의 즐거움이나 충격을 꾀하는 것은 모던 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린 것일까?
건물과 캐릭터
건물에는 탈춤, 장승, 저고리, 고무신, 장구 등이 그려진 띠 장식이 쳐져 있다. ‘전통’이라는 특징을 표현하기 위한 기호로 사용된 것이라 짐작된다. 하지만 이 디자인이 과연 풍물시장의 특징을 담아내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풍물시장에서 거래되는 물건은 이 같은 물건이 아닌 1960년 이후 근대화와 산업화 시대를 달려온 거칠고 힘든 시기의 물건들이었다. 풍물이라는 시장이름에 맞추고 관광객을 겨냥한 우리만의 특성을 강조하다 보니 실제 그곳을 채우고 있는 물건과는 상관없는 생경한 것들이 외양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리라.
풍물시장을 대표하는 장돌뱅이 캐릭터도 선뜻 다가오지 않는다. 봇짐장수인 장돌뱅이는 자기 점포가 없어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팔아야 하는 설움이 있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풍물시장의 캐릭터에서 이러한 장돌뱅이의 애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큰 눈과 웃는 표정을 하고 있는 친근한 이미지만이 형상화되어 있어, 캐릭터 본래의 속성이나 특질은 연구하지 않은 채 단지 모자, 봇짐, 한복 등의 역사적 시각 기호만 늘어놓은 듯 한 인상을 준다. 고유의 이름과 캐릭터의 연관성이라는 면에서 볼 때는 수긍이 가지만 그것의 형상화에는 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웃는 큰 눈과 입만이 우리에게 친근한 인상을 주는 것은 아니다. 유아적 특성 친근함 보다는 무언가 장돌뱅이의 특성, 여러 곳을 떠돌면서 모든 것을 다 보고, 느끼고, 감춘 캐릭터로서의 장돌뱅이 캐릭터의 형상화를 기대하는 것은 디자인에 거는 기대가 너무 큰 것일까?
풍물시장의 외관들인 표면장식, 건축물, 캐릭터 등은 내용과 상징을 긴밀하게 반영하지 못한 채, 이름에 집착하여 공간을 장식하거나 ‘전통’ 시장이라는 이미지를 위해 사용한 것이 전체적인 특성이다. 이러한 특성은 혹시나 우리 고유의 것인 무엇인가를 만들 때 ‘한국성’을 보여주고 특성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디자이너들에게 압박감으로 자리하고 있어, 그것이 그들의 창의성을 가로막아 내용과 형태의 일치라는 디자인의 본질을 깊이 있게 고민하지 않은 태도에서 오는 결과인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르페브르가 말한 ‘공간의 재현’을 한국의 어느 한 모퉁이에서 그대로 실현시킨 듯 한 인상을 준다.
중고 물건들 _ 기억의 거래, 추억팔기
“삶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지, 북적거리고 어떤 물건이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물건이 많았고 다양한 사람들도 많이 왔었어, 나도 컴퓨터 부품을 사러 갔었는데 일반 매장에서 팔지 않았던 물건이라 혹시 있을 까 하고 찾아갔다가 운 좋게 살 수 있어 기억을 하고 있어. 구경거리가 많아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구경했고 지루하지 않았던 거 같아. 내 느낌에 그 곳은 흔히 어른들이 말하는 ‘ 귀신(도깨비)나올 거 같으니까 청소 좀 해라’ 라고 했던 것처럼 어수선한 분위기였지. 그래도 그 어수선하고 복잡함속에서 신기함과 정이 느껴졌었어.“
- 58세, 남성, 풍물시장 방문객-
황학동 시장은 낡은 물건들을 풀어 놓으면서 생겨난 곳이었다. 물건을 담은 보따리는 펼쳐 놓으면 가게가 되었고 장터를 이루었다. 이 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다고 하여 잘만 맞추면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많은 것들이 모여 들었다.
하지만 진정 이곳에서 거래되는 것은 지나가 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며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그 시간 그 장소들에 대한 추체험의 증거물들이다. 이즈음에서 소설을 통해 우리가 과거를 다시 돌아보는 것은 그 삶을 다시 한 번 살아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한 중국 소설가 위화의 말이 떠오른다. 이야기를 할 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이야기를 꾸미면서 다시 한 번 그 시대를 살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는 가장 접하기 쉬운 물건을 통해 돌아오는 기억을 붙잡는 것이 아닐까. 대충 보아도 족히 수 십 년은 되어 보이는 각종 골동품, 쉽게 보기 힘든 외국의 장식품, 지금은 최신식으로 바뀌어 사용 하지 않는 물건인 필름 카메라, 축음기, 레코드판, 라디오, 40년 전 학교 배정추첨 기계, 교과서, 옛날 교복 등등 60~70년대 우리의 생활사와 관련된 물건들이 마치 아주 오랜 시절의 이야기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다.
우리의 60-70년대는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빈곤을 떨쳐 버리고, 불과 30여 년 만에 1인당 국민 소득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린 토대가 만들어진 시기였다. 이 당시의 삶은 텔레비전, 전화기 등의 물건을 소유했다는 것만으로도 부자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물건이 사회적인 삶의 기준으로 자리했다. 국가대표 스포츠 경기가 있는 날은 텔레비전이 있는 집, 다방, 공공기관 등으로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리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고, 떨어져 있는 부모님이나 자녀들과 통화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전화가 있는 곳까지 몇 십 km를 걸어서라도 갔으며, 하나밖에 없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드라마를 들으며 옹기종기 모여 앉은 온 가족이 함께 웃고 눈물 흘리기도 했다. 이 시대의 풍경, 그리고 이러한 기억과 사람들과의 관계는 80년대 후반기 이후 누구나 물건들을 쉽게 소유하게 되면서 우리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갔다.
“난 이 물건들을 보면서 어머니가 생각나. 그래서 쉽게 못 팔겠어. 내가 그때 왜 이렇게 고집이 셌는지 남들이 가지는 것들은 꼭 가져야 했어. 학교 안 간다고 나 몰라라 고집피우고 집안 사정은 생각지도 않았어. 그 당시 그렇게 얻어냈던 자전거는 지금 사용도 못하는데 말이야. 그 당시 물건들을 보면 그 기억이 떠올라 혼자 웃어. 지금은 어디 그런 사람들이 있겠어? 쉽게 물건들을 사고 버리고. 그 당시 물건들은 지금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졌었는데. 그래서 나도 이 장사를 하고 있는 거 같아. 나처럼 이 물건들 추억이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겠어? ”
- 60세 남성, 풍물시장 상인 -
“내가 사용하지 않았지만 아주 어릴 때 할머니, 엄마가 사용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정감가는 물건들이 많네요. 할머니가 쓰시던 재봉틀을 엄마가 저에게 주셨는데 2~3년 전에 집에 도둑이 들어 훔쳐가버렸어요. 나한테는 없어진 재봉틀을 보니 할머니 생각도 나고 내가 하찮게 생각했던 물건이 판매되고 있으니까 더 귀하게 느껴지고 아쉬움이 남네요. 물건들이 뒤죽박죽 섞여있어 어수선한 느낌도 있지만 저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인 것 같아요.”
- 30대 여성, 풍뭉시장 방문객-
황학동 시장은 이러한 기억들이 되돌아오는 곳이었다. 오래된 물건들은 그 시대의 기억을 되살려주며 향수를 불러일으켜 주었다. 노스탤지어, 향수(nostalgia)라는 말의 의미는 귀향을 뜻하는 ‘notos'와 고통스러운 상태를 의미하는 ‘algia’를 합친 말로 (마정미, 『광고로 읽는 한국사회문화사』, 개마고원, 2004), 고통스러울 만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이 너무 심하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과거가 비록 암울했을지라도 아름답고 따스한 기억으로 간직하며, 과거를 회상하며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불안한 현재보다 이미 경험했기에 안전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건은 추억의 중간지점에서 과거와 나를 이어준다. 낯익은 그리고 시간의 때가 묻은 오래된 물건은 사람들로 하여금 추억의 세계로 초대하며 자신의 과거를 확인하게 하고 현재의 모습과 연결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이 반짝반짝 해지고 평평해지는 우리네 도시의 삶에서 여기 풍물시장은 무언가 사람들을 내치지 않고 흡수하는 듯 한 느낌을 주는 우묵한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나 너무 빨리 모든 것이 변하는 서울에서 그 변화의 주역이었던 50대, 60대 연령의 사람들에게 이곳은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공간으로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풍물시장 _ ‘재현의 공간’으로서의 가능성
황학동 시장은 사람과 물건, 사람과 사람들이 부대끼고 오가면서 형성한 보이지 않는 질서가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건물로 들어가면서 옛 황학동 시장 특유의 시끌벅적함과 에너지는 잃었지만, 기억을 팔고 사는 물건은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인간은 동물과 구별되는 새로운 속성을 지니고 출현하였으며, 분리된 실재로서 그 자신을 인식하는 것, 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예지하고 대상과 행위를 여러 가지 표상으로 나타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말했다.(오창섭, 『디자인과 키치』, 시지락, 2002) 그의 말처럼 인간은 여타의 동물들과는 달리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생각하는 존재이며, 인간에게 기억은 자기 삶의 흔적이고 내가 걸어온 길을 확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풍물시장에서 판매되는 물건들은 대부분 우리 근대의 물건들이며. 근 과거이기에 그 시기를 거쳐 온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사람들은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에 덧붙여진 기억과 관계를 사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시장은 친근함으로, 젊은 세대들에게는 신기함과 부모세대의 기억으로 여겨지면서 개개인들의 이야기와 물건들이 우리 모두의 공동의 기억과 물증으로 치환된다.
결국 풍물시장은 전통적인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내 천자 모양의 건축물, 전통 장식, 장돌뱅이 캐릭터 등으로 이름에만 천착된 형상화가 이루어진 공간의 재현으로 되었지만, 시장안의 물건들은 사람들의 기억을 상기시키며 훨씬 살아 있는 존재로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그렇기에 무의식적이고 자생적인 공간이었던 실천적 공간이 공간의 재현으로 변모한 현재에도 황학동은 여전히 일상의 힘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황학동이 갖고 있는 진정한 매력이다. 낡고, 지저분하고, 무언가 어설프게 표상과 내용이 어긋나 있지만 살아 움직이는 기억과 공유의 힘이 있기에 이 공간은 르페브르가 제시한 일상의 실천과 추상적 계획이 동시에 진행되는 재현의 공간으로서 가능성을 지닌, 실시간 변모하는 꿈틀거리는 역동적인 공간으로 서울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