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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정선기념관에서 디자인을 찾다

2011-03-30


기념관이나 박물관, 그 곳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지금이 아닌 과거의 어떤 때와 만나길 원한다. 여기와 다른 어떤 곳에서 인간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손길과 호흡을 남긴 사람들에게서 감동받기 원하고, 배우기 원하고, 느끼기 원한다. 그리하여 입구를 지나 조용히 숨 쉬는 하나의 물건이나 사건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시간 감각은 확장되고, 공간의 지경은 아득히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물관이나 기념관은 동시대에 존재하되, 그 시대를 뛰어넘어 다른 시공간으로 넘나드는 역공간(Liminal Place)이며, 대대로 유전되는 ‘기억의 용기’(容器)(『거꾸로 읽는 도시, 뒤집어 보는 건축』, 양상현)로 과거가 머무는 안식처이자 우리를 속하지 않는 어떤 세계로 이끄는 곳이다.

글, 사진 | 김명희 d_페다고지 기획 & 리포터
에디터 | 최유진(yjchoi@jungle.co.kr)

기념관은 박물관에 속한다. 14세기 후반 이탈리아 르네상스시 성경의 필사본, 인쇄본, 조각품, 무덤이나 기념비의 비문들의 수집 행위들이 박물관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09년 11월 왕궁에서 일반인에게 공개한 제실박물관이 근대적 박물관의 시초라고 할 수 있으며, 2000년대 접어들면서는 유무형의 다양한 주제를 전시하는 전문박물관이 전국에 급속도로 건립되었다. 기념관은 박물관에 속한다고 해도 단지 물건이나 유적이 아닌 사건이나 인물을 기리는 공간이며, 그러므로 기념 대상들만이 지닌 아우라를 요구할 당연한 권리가 있다.

겸재정선기념관

겸재를 찾아갔다. 한국화 중에서 단원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유난히 사랑받는 고고한 문인화가 겸재의 기념관은 강서구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공장 터로 변해 버린 그곳에 그의 어떤 점이 기념관까지 설립하게 만든 것일까?


겸재는 사변적이고 관념적이었던 주자성리학에서 벗어나 조선성리학이라는 실증적 이념을 바탕으로 조선의 고유한 문화를 추구한 ‘진경문화’를 주도해 간 장본인이다. 그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는 ‘진眞짜 있는 경치景致를 사생해낸 그림’ 또는 ‘실제 있는 경치를 그 정신까지 묘사해내는 사진기법 즉, 초상기법으로 사생[寫眞景致]해낸 그림’이다. 이러한 진경산수화에서 겸재는 중국 회화사에서 아직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던 북방화법의 특징인 선묘와 남방화법의 특징인 묵법을 이상적으로 조화 시킨 새로운 기법을 선보였는데, 이것은 성리학의 기본 경전인『주역』의 음양조화원리를 과감히 도입해 물질의 세계에서 주역의 실증철학을 ‘물화’시켰음을 보여주는 기법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렇듯 한국회화사의 흐름 속에서 변혁을 만들어 낸 그의 실험정신이 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이어오게 했으며 문화의 시대를 맞아 기념관 설립이 이루어진 것이다.
기념관은 2009년 4월 개관됐으며, 지하 1층/지상 3층, 총 4층으로 구성된 건물로 겸재의 생애와 주요작품 설명이 되어있는 겸재기념실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겸재의 <귀거래도> , <청하성읍도> 등 11점의 겸재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이곳에 겸재 정선기념관이 들어선 이유는 그와 강서구의 인연에서 출발한다. 겸재의 제자였던 영조는 65세의 그를 이곳의 현령으로 발령했다. 풍광명미(風光明媚)한 풍류고을이라 풍류를 아는 문사라면 꼭 한번 군태수를 지내고 싶어 하는 곳이었다던 양천에서 최대한 기량을 발휘하기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는 여기서 <경교명승첩> 과 <우화등선> , <웅연계람> 등과 같은 많은 명화를 남겼는데 많은 미술학자들은 이때를 그의 진경산수화의 폭이 원숙한 경지로 접어든 때로 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겸재정선기념관 측에서는 그의 화혼이 깃든 궁산 기슭에 그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외관_수직공간과 겸재의 부감법


건축물을 마주할 때 우리의 지각은 일차적으로 그 표면적 질감과 상호 교감한다. 겸재정선기념관 건물을 마주하면 다른 무엇보다도 수직선이 강조된 표면이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울의 곳곳에 산재한 유리와 차가운 모조 대리석의 건물과 다를 바 하나 없는 건물, 아니 오히려 70년대 모더니즘의 산물의 극화 같은 건물에서 사실 겸재가 살던 시대나 그의 족적의 아우라를 발견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낮은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강조되어있는 균등하게 배열된 수직선으로 마감된 그 건물 앞에 서면 마치 겸재의 ‘부감법俯瞰法’을 마주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부감법이란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듯이 그리는 화법으로, 새가 높이 날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다하여 ‘조감법’이라고도 한다. 또한 그의 ‘금강전도’, ‘박연폭포’를 통해 보여 지는 거침없이 힘차게 내리 그은 ‘수직준법垂直皴法’은 한국 산새의 뾰족한 암봉을 정확히 묘사하기 위해 고안된 화법이다. 이는 그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내는 기법으로 부감법을 기초로 한 수직준법으로 인해 수직 구도가 더욱 강조되어 그의 그림에서 산천의 웅장한 효과가 부각되는 것이다.
겸재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수직의 선들과 그 효과는 건물 내부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이층에 올라가 무심히 내려다보면 외벽에 둘러진 수직기둥과 내부의 수직기둥들 사이의 햇살로 이 그림자들이 무한히 길어지면서 또 한 번 부감법을 체험하는 듯 한 느낌을 준다.

내부공간_다양한 미디어로 보여지는 원본들


겸재 기념실 입구에 들어서면 대형 스크린을 통해 음악이 흐르며 계절이 바뀌고 새가 날아다니는 ‘금강내산도’의 영상이 켜진다. 최근 박물관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미디어 아트이다. 기념관 안에 구성된 전시들은 정보를 담고 있는 패널과 터치스크린, 영상 시설들이 주를 이룬다. 그를 통해 겸재의 실제 작품과 현재의 공간을 비교해 볼 수도 있고 한강의 전경 앞에서 그 풍광의 시점도 확인할 수도 있다. 특히 진경체험실은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탁본뜨기와 같은 몇 개의 직접적인 체험시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이러한 미디어를 통한 체험시설이다.


이런 모습들은 겸재정선기념관 뿐만 아니라 최근 설립되고 있는 여타의 기념관들에서 거의 획일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터치스크린과 키오스크는 물론이고 여러 개의LCD패널을 이용한 영상시설, E-Book, 3D홀로그램 영상과 4D체험관과 같은 다양한 미디어 시설들은 한 가지 주제나 그림, 혹은 실물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즐길 수 있게 한다. 기술이 실제 내용을 압도하고, 주제나 정신의 깊이보다는 기법과 새로움에 탐닉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 보면 테크놀로지 시대에 당연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들은 실물, 모형, 말소리로 감각에 직접 호소하며 아득한 옛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던 곳이었던 박물관이나 기념관이 미디어 중심의 인지와 체험으로 인해 정보와 즐거움을 ‘소비하는 공간’(『박물관의 탄생』, 전징성)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실물만으로 우리를 역사적 상상 속으로 빠져들게 하던 그 힘은 상실되고, 시각적 이미지만으로 과거의 것을 즐기게 하는 현대판, 이미지와 망막중심의 기념관인 셈이다. 이러다 보니 겸재의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그만의 아우라는 스펙터클한 재현물들에 의해 뒷전이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체험공간_겸재만나기

국민대의 김개천 교수는 정부나 지방자치제에서 역사와 관계되는 건물을 지을 때는 일반 건축물보다도 더 세심하게 공모전이며 작가 선정에 주의해야 한다고 한다. 겸재 정선 기념관은 강서구에서 공모를 통해 사업소를 선정하였으나. 언제 어떤 경로로 어떤 사업소가 선정되어 건축이며 실내 전시 공간 설계를 담당하였는지는 정보를 구할 길이 없었다. 다만 우리의 접근을 거부하는 듯한 유리와 모조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수직의 반복으로 필자가 부감법을 생각게 만든 점, 선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은 당대 최고의 인기 있는 방법을 이용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든 건물이었다.


이층 전시 동선의 끝에 좀 아니다 싶게 만들어진 겸재의 좌상 옆에 몇 분간 나란히 않아 있노라니, 꽃을 완상하는 겸재의 정신과 품격을 느끼고 체험하기 보다는 시각적 유희와 전시 기법의 독특함에 즐거워하는 현대인의 문화 즐기기를 그가 웃으며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밖에 나와서 낮게 둘러쳐진 담장, 궁산으로 가는 길목의 담장, 커다랗게 만들어진 붓의 모형 등이 오히려 조선의 정신과 예술세계의 상징성을 직접적으로 담아 놓은 듯해 정겨운 기분이 들었다.


부감법이라는 독특한 기법으로 한 시대를 열고, 진경산수의 화풍을 펼친 그의 창조적 역량을 기념하기 위해 후손들은 우리 시대 최고 기술들의 집약을 그에게 헌정했다. 이것으로 이 기념관이 기억의 용기로서 우리 선조의 해타를 기릴만한 제구실을 하는지는 겸재를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이 이 기념관에 와서 직접체험하고, 느끼고, 판단할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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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진 에디터
감성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디자인, 마음을 움직이는 포근한 디자인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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