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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카페] 판타지 문학과 상상력-우리에겐 아직 낯선 판타지

2007-01-24

한국 아동문학계에 일었던 판타지 붐은 아마도 90년대 후반 몰아닥친 해리 포터 열풍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리얼리즘 동화가 강세였고, 상상의 세계라고는 의인화나 꿈 혹은 도깨비 외에 별다른 장치가 없던 동화계에 해리 포터는 새로운 지경이 아닐 수 없었다. 몽상, 공상, 현실 도피로 백안시되던 판타지, 아니, 그런 장르가 있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무심했던 판타지가 느닷없이 각광을 받았고, 수많은 동화작가들이 자신도 근사한 판타지 동화를 써보겠노라는 작심을 토로하곤 했다. 판타지를 공부하겠노라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경우들도 많았다. 사실, ‘일개 동화’가 온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그 작가에게 일시에 엄청난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는 현장을 동시대에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동화작가들은 흥분하고 고무될 만했다.

하지만 2000년 초반 몇 년 동안 쏟아져 나온 수많은 판타지 중 문학적 인정을 받으면서 대중적으로도 성공을 거둔 작품은 거의 없었고, 그리하여 그 열화 같던 판타지 붐이 이제는 한풀 꺾인 양상을 보인다. 판타지라는 것이 일순간의 결심이나 몇 달 간의 공부로 제작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작가들은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독자들도 아직은 판타지보다는 리얼리즘 이야기를 더 편안해 하고 미더워 한다. 만화, 애니메이션, 컴퓨터 게임 같은 여타 매체를 휘어잡은 판타지가 왜 책에서만은 이렇게 힘을 쓰지 못할까. 다른 매체의 상상적 서사에 원천 역할을 해야 할 문학계가 가뭄에 시달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매체상의 특성으로 보자면 아마도 그 이유는, 만화나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비율이 높은 데 비해 책은 어른들이 골라주는 경우가 더 많은 데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정직한 즐거움을 위해 다운받고, 빌리고, 복사하고, 용돈을 털면서 상상의 세계로 기꺼이 뛰어 들어간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른들은 순전한 즐거움보다는 계몽적이고 효용적인 가치를 위해 아이들에게 읽힐 책을 고른다. 판타지가 담고 있는 여러 가지 비현실적 장치 뒤에는 응축되고 변형된 날카로운 현실이 숨어 있으며, 그 현실을 뛰어넘어 이상을 아름답고 장엄하게 완성시키려는 가열한 노력 같은 것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판타지는 아무 쓸모없는 이야기로 보이기 십상이다. 해리 포터 열풍을 우려의 눈으로 보던 어른들의 생각이 아마 거기 근거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른이란,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놀라운 능력을 어린 시절을 지나며 반납해버린 사람들 아닌가. 그러니 어른들은 공허하고 애매해 보이는 판타지 대신 주제와 소재가 확실히 분류되는 사실적 이야기를 집어 들게 된다. 그렇다고 클릭 몇 번이면 휘황하고 신나는 가상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아이들이 굳이 험한 길 돌아 책 속의 상상 세계를 찾아가려 들겠는가.

국내 창작 판타지의 내용으로 보자면, 아무래도 우리에게 판타지는 아직 낯선 장르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판타지는 단순히 한 개인의 자유로운 상상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민족적 신화, 국가적 가치관, 종교적 세계관과 인간관, 그 공동체의 원형적 꿈, 과거의 기억, 미래의 희망 등이 깊고 넓은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 판타지이다. 영국의『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나라 시리즈, 미국의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독일의『끝없는 이야기』, 스웨덴의 『닐스의 모험』같은 작품들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전통적인 정신을 담고 있는 판타지의 기법은, 그런데 대단히 혁신적, 혁명적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의 주어진 세계를 거부하고 다른 세계를 찾아가겠다는 태도. 세상에 없는 것을 내가 만들어내겠다는 자세, 그런 것들이 들어 있는 상상력과 환상 없이는 나오지 않는 것이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통과 혁명의 공존이 이루어지는 곳이 판타지이다. 상명하복의 수직적 이데올로기인 유교적 사회 질서 아래에서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대립 체계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우리에게는 이런 양가성의 혼합이 낯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짚어놓고 보니 지금 우리 문화계, 특히 아이들과 관련된 문화 속 판타지 현상의 불균형이 안타깝다.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이, 시키는 대로 군소리 없이 따르는 학생을 지향하는 교육 풍토 속에서 아이들의 창의력은 싹이 날 틈도 없이 짓밟힌다. 세계화라는 수상쩍은 바람 속에서 아이들은 뿌리 없이 휩쓸리며 자극적인 영상 매체에 쇄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상상력으로 알고 자란다. 진짜 상상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진짜 판타지들을 보려면 우리는 기존 질서에 대한 혁신적인 도전을 흔쾌히 받아들여주는 풍토가 만들어질 때까지 좀 더 기다려야 할 듯하다.

김서정 : 동화작가, 평론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평론집 『동화가 재미있는 이유』, 동화집 『두 발 고양이』 『용감한 꼬마 생쥐』 번역서 『공룡이 없다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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