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원은 자신의 그림들에 대해서 ‘가학적’이라거나 ‘병적’이라는 일탈(逸脫)적인 평가를 가장 많이 들어 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그림에는 ‘남자가 없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곧 남자가 보이지 않는 그녀의 ‘일탈적인’ 그림들을 지켜보다가 조금씩 안타까워져 갔다.
내가 소년이었을 때, 그림 속의 소녀들처럼 잘려지고 뒤틀려진 불구이거나(거의 모든 소녀들), 목마를 타는 대신 척추에 봉이 꽂혀져 목마처럼 돌아가고 있거나(목마소녀), 항문에 바퀴가 움푹 꽂혀 있는데 양 다리를 양 손으로 붙잡아 태연히 올리고 있거나(자전거 소녀), 다리가 셋인 기형이거나(수상한 다리들), 땅따먹기를 하는데 공기돌 대신 노란 알약들을 한 움큼 움켜쥐고 있는(땅따먹기) 소녀들을 못 만난 것이 진정 후회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모든 소년들은 그렇게 결여와 뒤틀림으로 인한 불구이거나 자연스런 성적 욕망으로 사회적으로 불온해진, 혹은 동시적으로 그녀들의 웃음과 무중력 상태로 뭇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소녀들을 못 만나고 만다.
눈을 감고 ‘소녀’라는 단어를 발음해보라. 그 발음에서 번져 오르는 ‘소녀’의 하얗고 순결한 시니피에는 봉에 꽂혀있거나 다리가 셋인 그런 다정의 화냥 같은 소녀들의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소녀들의 한가운데에서는 백설 공주를 꿈꾸는 소년도, 남자도 모두 쫓겨나 있다.
‘남자가 쫓겨난’ 그림 속의 소녀들은 인간 존재에 대한 안이한 선입견을 그 근저에서부터 뒤흔들어주며 대개는, 사물들과 교접하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러한 교접이 내뿜고 있는 전복적인 상상력 속에서 ‘가학적’인 그리고 ‘병적’인 것의 절정들을 본 것 같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가학적이거나 병적인 것이 양식화 되어있는 것처럼 재미없는 것은 없다.
아방가르드에서 추구되었던 형식의 파괴나 실험도 양식화 되면서 고답적인 역사가 된 것이다.
박정원의 그림들은 그런 점에서 아직 양식화 되어 있지 않은 생의 한가운데에 있고, 부정한 것들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긍정의 차원으로 지양시키는 일반적 길항의 과정을 전혀 수행하고 있지 않아서 더욱 재미있다.
(만화 같지 않은 작품을 보고 재미있다는 표현을 하면 실례인가?) 그 재미란 가학적인 것과 편안함, 병적인 것과 관능 사이의 경계에서 형성되는 긴장감의 지속적인 미해결에서 발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