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기: 감각의 분할
국립현대미술관은 “본성적으로 논리적이고 지성적인 미술이론가로서 대전(大戰) 후 구미 미술의 동향 정보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현대적인 조형의식과 논리를 가다듬어 한국현대미술 형성 초기에 추상미학을 적극 주창”(이구열, 1990)했던 작가 김병기(1916-)의 지난 60여년 간의 역작들을 선보인다. 평양출신의 김병기는 일찍부터 근대적인 삶을 내면화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추상과 초현실주의와 같은 신흥미술을 접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월남한 그는 화가, 비평가, 교육가, 행정가로서 한국현대미술의 토대를 정립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추상의 의미와 가치가 한국미술이 직면한 사회․ 문화적인 특수한 문맥과 서구미술의 수용이라는 특수성과 보편성의 관점에서 논의된 추상미술형성 초기부터 서구미술의 역사적 전개에 대해 면밀하게 고찰했던 김병기는 현대적 조형언어로서 추상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했다. 그는 1965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커미셔너로 참석한 후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정착하여 화가로서의 길에 매진하였다. 서양문명의 최전방이자 아시아 문명과 만나는 LA에서 그가 보내온 작품들은 추상과 구상, 동양과 서양, 자연과 문명, 정신과 물질, 전통과 현재 등 관습적인 이분(二分)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상반된 힘들을 조화롭지 못하고 평온하지 않은 긴장 속에 묶어 두고 있다. 10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를 비워가며 예술과 인생에 대한 인문적 통찰을 멈추지 그의 작품에서 관람객은 성숙한 주체성과 신중한 확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추상의 실험: 1950년대 중반~1970년대 초
현전하는 작품이 제작된 시기(1950년대 중반)부터 도미(1965년) 후 1970년대 초까지의 작업의 특징은 그가 일본유학시기부터 매료되었던 추상에 대한 적극적인 실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50년대 중반 이후 앵포르멜이 한국화단을 휩쓸기 시작할 무렵 국내 다른 누구보다 해외 미술계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김병기는 프랑스의 앵포르멜 이론과 실천을 연구하고 이를 자신의 작품에 선택적으로 수용한다. 그가 주목했던 것은 전후 인간실존의 표현이라는 앵포르멜의 내용과 물질성보다는, 형식에서 발견되는 서예적 조형미와 초현실주의적인 이중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서사성이었다. 뉴욕주(사라토가)에 정착하면서 작가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추상표현주의로까지 확장되었다. 그에게 있어 추상은 문학성 또는 리얼리즘의 대립항이 아니라 이를 포함하고 동시에 넘어서는 것이었다.
형상과 비형상의 공존: 1970년대 초~1980년대 말
1970년대 초부터 형상이 강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그가 평생을 걸쳐 천착하게 되는 소재인 정물과 풍경이 캔버스에 뿌리를 내린다. 작가의 시선이 생활 주변에 머물면서 작업실 내의 미술도구, 도자기, 길가에서 꺾어온 들풀, 사라토가 집 주위의 소소한 풍경 등이 화면을 가득 채우게 된다. 구체적인 형상의 등장은 그가 이전부터 추구했던 추상에 대한 정면 대결 혹은 작가로서의 자기모순이 아니라, 추상의 막다른 길에 다다른 그가 더 깊이 발을 들여놓은 숙명의 길이었다. 사실 그의 추상회화는 삶에서 유리된 적 없었기에 형상의 등장이 갑작스러운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의 작품은 대상의 형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유와 감각 활동이 하나의 현실이 되는 이중적인 재현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추상표현주의 이후 미술계에 재등장한 다양한 이미지와 미술에 대한 새로운 개념 및 태도와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무엇보다 이지적이고 예민한, 드로잉과도 같은 선(線)의 표현과 공간에 대한 실험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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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분할: 1980년대 말 ~ 2000년대 초
1980년대 말 도미 후 처음으로 개인전을 치르기 위해 귀국한 이후 2000년 마지막 개인전까지 몇 차례 더 방문했던 이 시기에는 자연스럽게 모국의 풍경과 분단현실을 주제로 한 작품이 눈에 띄게 증가한다. 이 작품들이 정치적이라 할 수 있다면 단순히 한국의 풍경을 소재로 했기 때문이 아니라, 관습적인 감각의 분할 방식에 이질감을 불러일으키는 회화적인 언어로써 분단, 전통과 단절된 현대성 등 모순된 현실을 재현하면서 이중의 이질감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 시기 그의 회화는 공간과 시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표면과 깊이, 사유와 행동 등 이분법적인 구조를 무효화하면서 역사와 현실이 수수께끼처럼 화면 위에 스스로를 드러나게 한다. 형식상으로는 선이 더욱 대담하고 거칠어졌다. 농묵(濃墨)과 같은 검은 선이 화면을 박진감 있게 가로지르고, 이전 시기부터 보였던 긴 직선은 지나치게 분출된 작가의 감성을 절제하듯 또는 파편화된 현실의 부조리를 드러내듯 날카롭게 화면을 분할한다.
미완(未完)의 미학: 2000년대 초 ~ 현재
말년은 대개 순응의 시간이다. 지난 시간의 불협화음과 화해하고 얼마 남지 않는 시간과 타협하거나 삶의 관조를 통해 관용과 조화, 종합에 이를 때다. 그러나 한 세기를 살아낸 김병기는 여전히 타협과 절충을 경계하고 ‘간극’에서 새로운 창조를 시도한다. 2000년 중반 40여 년간의 미국 동부에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LA로 거처를 옮기면서 그의 작업은 다시 한 번 전환의 계기를 맞이한다. 캔버스에 캘리포니아의 풍광이 가득 담기면서 이전 시기의 강한 원색은 자취를 감추고 LA의 화창한 하늘과 누런 대지의 색이 주조를 이룬다. 더욱 노련해진 필력으로 화면을 장악하고 있는 선들은 작가의 스튜디오가 위치한 헐리웃 마운틴(Hollywood Mountain)의 풍광이자 조국의 산천, 모든 인간이 종국에는 귀의할 만물의 본체, 즉 무한히 변하지만 결국에는 하나인 자연을 표현한 것이다. 이 시기 그의 작업은 ‘논 피니토(non finito)’, 즉 ‘완성으로서의 미완’을 구현하고 있다. 화려한 채색과 수사는 최대한 줄고 안료의 층은 가능한 최소화되어 캔버스의 바탕과 작업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으며, 비어있는 공간은 그 자체로 충만하다. 이는 화면이 칠해지기 보다는 주로 선으로 그어졌기에, 즉 획(劃)으로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것이다. 작가는 그 어느 때보다 선을 주요 매개로 하여 세상을 인식하고, 개별적인 마음과 외부 대상을 연결한다. 백묘(白描)에 가까운 작품들은 관람자로 하여금 층위가 다른 세계로의 전이(轉移)를 반복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