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내면의 규칙
사각사각사각사각…
두껍게 배접된 한지 위에 희미한 선을 따라 사각거리는 연필의 움직임은 표면의 모든 흔적을 꺼멓게 메워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지나온 자리의 흔적을 남기면서 공간을 메워나간다. 1미터 넘는 화면에 좁디좁은 보폭으로 메워지는 단순한 필선의 무한반복이 만들어내는 육각평면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어느새 입방체로 탈바꿈한다. 무른듯하면서 견고한, 외부의 물리적 자극에 의해 쉽게 지워지거나 번지지만 재료 스스로의 변용은 없는 연필이라는 재료의 속성은 그 손쉬운 사용 덕분에 자유분방한 손놀림이 허용되지만, 연필을 쥔 작가의 손가락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한지 위에 미리 잡아놓은 제도선의 흔적을 따라 한치의 오차 없이 매끈하게 칠하려는 작가의 바램과 달리, 미세한 손떨림이나 표면과의 마찰로 구불거리는 선의 흔적과 음영의 교차가 서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면 자로 잰듯한 하드에지(Hard Edge) 페인팅의 정교하고 기계적인 추상형식을 떠올리는 이 육각의 도형들은 저 마다의 소실점을 향해 평면에서 입체로의 착시를 유도하고 있다. 작가는 지나간 모더니즘시대 회화의 길을 되찾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미 휩쓸고 지난 모노크롬 회화의 정교한 붓질이나 추상표현주의의 강한 액션이 아닌, 완벽한 선을 모방하려는 이 한 땀, 한 땀의 연필채색은 무슨 의미란 말인가.
모더니즘 회화에 대한 미니멀리즘의 비판논쟁은 회화에 대한 인식의 확장을 가져왔다. 유럽회화전통에서 이어져 온 일루전을 제거하고 형태를 연상케하는 한 점의 붓터치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식 모더니즘 회화의 극단적 지점에서 남은 것은 주지하다시피 텅 빈 캔버스이다. 물자체(物自體), 그 어떤 상황도 개입하지 않는 회화의 순수매체로서의 존재는 평면 캔버스에서 더 이상 벗어날 수 없지만, 결국 그것 또한 두께를 지닌, 공간 속에 존재하는 사물이었던 것이다. 모더니즘 회화에 대한 미니멀리즘의 공격적 논의에서 이끌어낸 중요한 지점은, 순수한 시각중심에서 벗어나 작품이 점유하는 특정한 공간을 공유하는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개념과 작품생산의 과정 또한 작품의 인식을 위한 중요한 요소라는 점이다. 이것은 작가라는 주체의 회복을 예고했으며 순수시각을 열망했던 칸트적 사고방식의 종료를 뜻하는 것이다.
“보는 것이 보는 것이다(What you see is what you see)”라는 모더니즘 시대의 동어반복적 명제는 이후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라는 사고로 대체되면서 이미지는 사람의 인식작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인간에 의한 지각행위가 그 자체 순수한 지각작용이 아닌 정신에 의한 관찰이며 정신의 지배를 받아 이루어지는 인식행위라는 데카르트적 주체적 사고방식은 편대식 회화를 이해하는 가장 기초적인 개념이 된다. 수학적으로 계산된 수치에 의해 자로 그어 반듯한 육각의 도형은 15합 이상 배접된 두꺼운 한지의 매끄럽지 못한 결을 따라 움직이는 연필의 수공작업에 의해 완성되는 과정에서 무한반복의 손놀림을 초월한 인식의 작용이 깊게 관여한다. 그것은 자로 잰 완벽한 선들로 이루어진 작가 내면의 규칙과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 그러나 다시 규칙을 벗어나려는 끝없는 의지의 무한반복이다. 필선간의 희끗희끗한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어쩌면 편집증적 강박으로 비치는 이러한 태도는, 완전한 질서를 갈망하지만 결국 실존하는 주체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근본적 존재인식, 존재의 본질 등 내면의 물음, 철학적 사고에 대한 사투이다. 그 결과물은 단지 작업주체의 인식에서 벗어나 의도하지 않았던 형태의 연상작용과, 선들의 유기적 반응에 의해 일어나는 착시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일루전 공간, 그것은 그의 회화가 단지 시각적 유희나 매체의 차원에 대한 물음이 아닌 인식의 통로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결과일 것이다.
연필선 안에 수많은 색이 숨어있듯이, 올곧은 선을 따라가고자 하는 무수한 선 들 속에는 매번 새로운 규칙들이 새겨진다. 완전함을 지향하지만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인간내면의 규칙들, 그것은 착시에 의해 때로는 한치의 오차없는 형태로 인식되거나 불규칙적인 행위의 흔적사이를 오가면서 완벽한 이상과 현존하는 자아간의 불완전한 관계를 인식케 한다. 연필선을 지우지 않고 그 위에 새로이 올곧은 선이 나올 떄 까지 무한히 쌓아 올려나가는 편대식의 작업은 수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완벽해지려는 인간 의지의 표현이다. 그의 작품을 관조하는 시선은 거리에 따라 작품과의 관계성이 더욱 밀접해진다. 구상성을 제거한 화면 속에서 일어나는 관람자의 환영체험은 본질에 대한 인식을 우회하지 않고 곧장 걸어가는 길이다.
(재)한원미술관은 그동안 한국미술문화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고자 신진작가들의 발굴과 후원에 적극적인 지원의 장을 마련해오고 있다. 이번 초대되는 신직작가 편대식의 개인전은 자극적인 컬러와 범람하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유행의 물결에 편승하지 않고 한지와 연필이라는 기본적인 도구로 회화라는 매체에 대한 의문과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작업의 과정에서 발견하는 내면적 성찰, 철학적 인식을 향한 진지한 태도로 첫발을 내딛는 중요한 자리가 된다. (재)한원미술관은 이러한 신진작가들의 예술의지를 높게 사고 앞으로도 꾸준히 지원하는 차원에서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다. 이 전시를 통해 미술계라는 드넒은 공간 속에서 작가의 세계가 더욱 두터워지기를 희망한다.
(재)한원미술관
■ 편대식
2009 고려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전시 | 2008 LITTLE WORKS with BIG IDEAS 6, 라이시움 | 2009 우수졸업작품전, 동덕아트갤러리 | 2009 소수정예주의, 갤러리영 | 2009 CUBE 100, 갤러리빔 | 2009 3인 3색, 지구촌갤러리 | 2009 SILKY ROAD , 라이시움 | 2010 동방의요괴들 - 하이서울아트페어 | 2010 SENSORLIUM , 라이시움
현재 | 강원도 내설악 백공미술관 레지던시 입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