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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吉祥) 우리 채색화 걸작전(2부)
기타

무료

마감

2013-07-18 ~ 2013-08-20


전시행사 홈페이지
www.ganaart.com
吉祥 Happiness
우리 채색화 걸작전

2013. 6. 20– 7. 14 (Ⅰ)
2013. 7. 18– 8. 20 (Ⅱ)
가나아트센터


전시 개요

전   시   명 吉祥 우리 채색화 걸작전 
장       소 가나아트센터 1, 2, 3 전시장
일       시 2013. 6. 20 (목) – 7. 14 (일) (1부)
2013. 7. 18 (목) – 8. 20 (화) (2부)
오   프   닝 2013. 6. 20 (목) 5시 가나아트센터
출품   작품 조선시대 채색화 및 자수 작품 100여 점
담       당 김나정│t. 02.720.1020

전시 내용 
한국 회화의 역사에서 채색화는 그 동안 수묵화에 비해 관심을 적게 받아 왔다. 가나아트는 < 吉祥 우리 채색화 걸작전> 을 통해 이제까지 그 가치를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던 조선시대 채색화의 멋과 아름다움을 전하고자 한다. 전시는 1부와 2부로 나뉘어 책거리, 인물도, 장생도, 화조도, 서수도, 용호도, 문자도 등 다양한 주제로 그려진 채색화와 자수 작품 100여 점을 선보인다. 특히,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이제까지 민화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작품들을 채색화의 범주로 재조명하고자 한다. 집안의 여러 곳을 장식하거나 각종 행사 용도로 그려진 채색화는 화려하면서도 세련미 넘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동시에 소박하면서도 해학적이며, 때로는 화가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넘치는 채색화에는 소망과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어 보는 이에게 따뜻한 감성을 일으킨다. 
본 전시와 함께 발간되는 도록은 윤범모 가천대학교 미술대 교수, 윤열수 가회민화박물관 관장, 이원복 경기도박물관 관장, 정병모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 등 이 분야 최고 전문가들의 작품 해설과 논문이 실려 있어 조선시대 채색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3. 전시 초점

● 궁중장식화의 본격적 공개 – 이원복
조선 후기 채색화의 최고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은, 일찍이 유래가 없던 전시 – 윤범모 
< 吉祥 우리 채색화 걸작전> 은 1983년 호암미술관 < 민화걸작전> 이후 최대 규모의 조선시대 채색화 전시이다. 더구나 박물관 컬렉션이 아니라 개인 컬렉션으로 지금까지 거의 공개되지 않은 작품들이 전시된다는 점에 더욱 의의가 있다. 우리 채색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자리가 될 것이다. 

● 고유한 전통문화가 만들어낸 색채 언어의 마술사, 우리 채색화 걸작전 – 윤열수
이번 전시에는 책거리, 인물도, 장생도, 서수도, 화조도, 용호도, 문자도의 일곱 가지 주제로 100여 점의 작품이 출품된다. 저마다 특유의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는 이 작품들은 조선시대 선조들의 삶과 꿈을 투영하는 매개체로서, 관람객들에게 우리의 전통미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공감과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 

● 새롭게 떠오르는 우리 채색화 열풍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전시 – 정병모
최근 민화, 궁중회화 등 채색화의 열풍이 일고 있다. 특히 민화는 현대인의 취미생활로 자리 잡으면서 많은 작가를 배출하고 전시회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종전에는 조선시대 문인화의 전통 속에서 수묵화가 인기를 끌었다면, 지금은 색채가 풍부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특색이 뚜렷한 채색화가 현대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가장 오래되고 웅장한 위용의 요지연도(서왕모의 잔치를 그린 그림)를 비롯하여 책거리의 명수 이형록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궁중 책거리와 민화 책거리, 구한말 풍속화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평안감사행렬도, 이른 시기의 십장생도, 다양한 화풍의 까치호랑이, 궁중 화조도와 서수도, 백수백복도를 비롯한 다양한 궁중 자수, 민화 문자도 등이 있어, 수준 높은 궁중회화와 민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전시 도록글에서 요약• 발췌

우리 옛 채색화의 참모습[眞相] 
이원복 | 경기도박물관 관장

우리 옛 그림에 있어 그 주류를 수묵담채로 보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이는 옛 그림 전체가 아닌 단지 조선시대 일반 감상화라는 제한된 범주에서 통용될 사실이다. 4세기에서 7세기 초에 걸쳐 아시아를 대변하는 활달한 필치에 현란하고 다채로운 색채가 돋보이는 고구려의 고분벽화부터 시작해 화려하고 섬세한 고려불화와 이 전통을 이은 조선불화, 임금의 초상인 어진을 비롯한 공신도상과 사대부와 스님의 초상, 각종 궁중장식화와 의궤도, 서민의 꿈과 소망 그리고 사랑이 깃든 민화에 이르기까지 광물질 안료인 석채를 사용한 화려한 진채의 채색화가 1700년 이상 이어왔다. 

채색화가 크게 발전한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단청이 끊어졌으나 유일하게 우리나라는 단청이 남아 전한다. 조형미술 전반에 있어 바탕을 이루는 미의식이 검박(儉朴) 일변도인 조선왕조에 있어서도 일반가옥 아닌 왕궁과 사찰엔 단청이 베풀어졌다. 동아시아 삼국 모두 음양오행설에서 비롯한 오방색의 존재는 공존한다. 그러나 이들 또한 나라 별로 차이를 보인다. 

감상화에서도 짙은 채색을 사용한 분야가 엄존한다. 조선 전기 종신출신(宗親出身) 화가로 개와 매 그림으로 잘 알려진 이암(李巖,1507-1566)의 < 어미 개와 강아지> 는 동화적 분위기의 모성애가 짙게 풍기는 그림이다. 강아지 목의 붉은 목걸이와 금색 방울을 제외하면 수묵뿐이다. 그러나 같은 화가가 그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 花鳥狗子> 나 일련의 매 그림엔 진채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의 화성(畵聖)’으로 불리는 정선(鄭敾,1676-1759)의 < 인왕제색(仁王霽色)> 과 ‘조선의 화선(畫 仙)’으로 지칭되는 김홍도(金弘道,1745-1806경)의 < 행려풍속도(行旅風俗圖)> 8폭 병풍 같은 수묵이나 수묵담채로 그린 명품이 전한다. 그러나 자화상적인 성격이 짙은 정선의 < 독서여가(讀書餘暇)> 나 고사인물화 및 초충도 계열에서 김홍도도 초상화를 비롯해 도석인물(道釋人物)이나 화조화를 짙은 채색으로 그렸다. 

국토분단 이후 남녘에선 채색화를 왜색(倭色) 내지 일제잔재로 간주해 이들을 극복과 타파의 대상인 양 부정적인 시각이 보다 강했다. 반면에 북한에선 상당기간에 걸쳐 섬세한 필치의 사실적인 채색화만을 조선화(朝鮮畫 )로 간주했고 이에 대해 수묵담채로 그려진 문인화에 대해선 부정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북한이나 중국도 문인화에 대한 부정적인 오해와 오류에서 벗어나기에 이르렀다. 



채색화의 복권과 회화사 연구의 반성
윤범모 | 가천대학교 미술대 교수

그림을 채색화와 수묵화로 양분한다면, 한국회화의 역사에서 어느 부분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할까. 대답은 단순하다. 채색화! 그것도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분야가 채색화이다. 하지만 한국회화사 관련 연구서를 보면 이 같은 상식이 제대로 통용되지 않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 그림의 역사로 보나, 현재 남아 있는 작품 숫자와 규모로 보나, 특히 그림을 사용한 수요자의 숫자로 보나, 수묵화보다 채색화 분야가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음은 재언을 필요치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회화사 책에 채색보다 수묵의 비중이 크게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본고는 수묵 문인화 위주의 회화사 연구에 문제제기하면서 채색화의 복권을 강조하기 위해 다소 ‘위험부담’을 안고 기초하고자 한다. 

한국회화사의 주류는 채색화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양적/질적 수준이 세계적임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고구려 벽화는 우리 민족 회화사의 화려한 보고(寶庫)이면서 채색화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미의식은 화려한 채색에서 토대를 이루었음을 증명하는 물증이기도 하다. 이 같은 채색의 전통은 고려시대에도 승계되어 오늘날 고려 불화에서 확인하게 한다. 현재 확인된 고려불화 160여 점은 고려 회화의 본령이 채색이었음을 말해준다. 고려불화의 섬려하면서도 격조 높은 색채의식은 감탄사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바, 이는 오늘날의 국제무대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조선왕조이다. 유교 지배 이데올로기는 예술 천시사상을 유포시키면서 채색의 전통을 약화시켰다. 문인화의 시대는 채색 대신에 수묵 위주의 지배문화로 변화시켰다. 하지만 수묵 문인화는 양반계층 스스로 실토했듯 하나의 여기(餘技)였지 직업적 예술활동과 거리가 멀었다. 하여 채색화는 불화와 민화로 승계되면서 피지배 계층의 조형언어로 사회적 위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는 고구려, 신라, 고려 2천년의 역사와 비교할 때, 4분의 1의 수준이다. 어떻게 4분의 1의 역사가 나머지 4분의 3의 역사를 뒤엎고 대표성을 독차지할 수 있을까. 이런 의미에서 조선왕조 및 수묵 문인화 중심의 회화사 연구 개설서는 미완성 혹은 불구 상태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감성적인 접근보다 과학적이고 사회적 관점에서 우리의 채색화 특히 민화의 성격과 범주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의 출발은 물론 채색화에 대한 재인식이다. 이 부분의 해결점은 바로 다음과 같은 시각에서 공감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다. 한국회화사의 주류는 채색화이다. 이 같은 주장에 동의한다면, 자연스럽게 민화 분야를 회화사의 주요 위치로 격상시켜 우리 회화사를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벽화, 불화, 궁화, 민화 그리고 초상화, 기록화로 이어지는 한국 채색화의 역사와 전통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화려하게 승계되고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을 헤아리게 하는 민화 인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소비 없는 생산은 의미가 절감된다. 민화의 소비는 그만큼 민화의 생산을 불러온다. 채색 민화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는 작금의 시각문화 현실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의 민화
윤열수 | 가회민화박물관장

민화란 글자 그대로 백성의 그림, 서민의 그림이다. 비전문 화가는 물론 때로는 전문 화가까지도 정형화된 화법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민화’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이다. 그는 1929년 민속적 회화라는 의미로 민화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야나기 이후 아무도 민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 조자용(趙子庸:1926~2000)은 한국의 민화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민화 수집에 생애를 건 사람처럼, 모든 열정을 민화에 바친 사람처럼, 때로는 투사처럼 가정이나 사업보다 민화를 더 사랑했고 광기 어린 개척 정신으로 한국 민화의 초석과 기반을 만들어 낸 개창자 역할을 하였다. 조자용을 기점으로 비로소 한국인에 의한, 한국 민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었고, 연구와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최근에 들어서는 미술사학자들까지도 민화의 의미와 명칭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조자용은 민화를 서민, 평민, 상민, 민중 등 사회계층이나 신분의 구별 없이 도화서 화원은 물론 모든 한국 민족들이 그린 그림이라고 해석하였으며, 한국의 모든 회화를 한화(韓畵)라 하고 이를 순수회화와 실용회화로 분류하면서 “민화란 넓게 보면 한화를 일컫고 좁게 보면 실용회화를 일컫는다”라고 하였다. 
김호연(金鎬然)은 겨레그림이라 부르며 “형식을 의식하지 않고 미의식과 정감을 솔직히 표현하여 하나의 아름다움을 창출해내는 특징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우환(李禹煥)은 “평민, 서민의 습관화된 대중적인 그림”으로 정의하였고, 김철순(金哲淳)은 “비전문적 장인(匠)들이 그림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그린 그림, 모든 한국인이 사랑했던 그림”이라고 정의하였다. 광의의 민화는 소박하고 진솔한 그림이며, 도화서 화풍의 생활화, 무명작가들의 실용화를 모두 가리키며, 민중들이 오랜 세월 복 받고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는 구복신앙과 염원, 다산, 생활을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마음을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나타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민화의 특성은 예술성, 실용성, 상징성을 꼽을 수 있다. 순수미술과 달리 민화에서는 예술성보다는 실용성이 강조되는데 집안을 아름답게 꾸미려는 의도에서 그려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용적 용도를 뛰어 넘어 그 자체가 충분히 화려한 회화적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더불어 민화에서는 상징성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각 시대마다 그려진 그림에는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상징성이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상징성은 그 시대의 문화적 특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의 민화도 예외가 아니어서 당시의 시대상을 읽어내는데 중요한 척도가 된다. 민화의 상징적 표현은 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사소통이 바탕이 되는 공통의 세계관을 매개해 주는 역할도 한다. 가령 부귀다남(富貴多男)• 부귀공명(富貴功名)• 무병장수(無病長壽) 등 인간으로서의 소박한 바람이 민화에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민화가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착과 동경의 대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민화에 표현된 상징성들은 사회 전체에 의해 공유되기도 하였지만 특수한 사회부류에서만 통용되는 것이기도 하고 개인적인 감수성에 의해 그 상징이 변질되기도 하였다. 또한 일상생활이나 행사 때 치장용으로 사용하던 풍습이 생활양식의 급격한 변화와 함께 사라지면서 자연히 민화를 그리는 화공의 맥도 끊어지게 되어 점차 퇴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민중들의 삶 속에서 우러나온 감정으로부터 형성된 것이 바로 우리 민화이고, 꿈과 신화, 종교, 정신이 모두 깃들어 있는 귀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라는 것이다. 또한 순수한 감상적 목적보다 장식되는 장소나 쓰임새가 확실할 정도로 실용성을 구비한 회화였기 때문에 소위 감상만을 평가의 대상으로 삼아온 순수미술과는 달리 민화에 대한 연구와 이해 그리고 그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최근 민화열풍이 뜨겁게 불고 있으며 오늘날 민화에 대한 인식과 시각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에, 소중한 문화유산이 세월에 빛이 바래져가는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으로도 민화를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연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민화의 가치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역사의 산물을 넘어 현대회화 발전에 무한한 예술적 영감이 되는 원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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