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슬리 드 차베즈 개인전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은 필리핀의 젊은 작가 레슬리 드 차베즈의 개인전 ‘God Is Busy’ 를 11월 15일부터 2012년 1월 15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2007년의 ‘Red-eyed Brother’ 이후 한국에서 4년 만에 선보이는 아홉 번째 개인전으로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설치, 드로잉 등의 다양한 장르를 취한 20여 점의 작품들을 대규모로 선보인다.
필리핀 마닐라 태생의 레슬리 드 차베즈 (Leslie de Chavez, b. 1978)는 자국이 겪어왔던 식민주의의 역사와 종교, 제국주의 등의 민감한 소재를 다루며 예술이 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역할과 기능, 반향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젊은 작가다. 빼어난 회화적 기량과 감각을 바탕으로 주목을 받아온 작가는 지난 몇 해 동안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유, 즉 현실에 대한 대응을 시대적 아이콘이나 심볼을 재구성하여 제시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마스코트라고 할 수 있는 맥도날드의 광대 캐릭터 로날드를 차용해 상업화에서 이루어지는 몰개성과 부정부패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나 필리핀의 대표적인 산물인 바나나를 작업소재에 빈번하게 등장시키는 것, 영혼을 잃은 듯 검게 패인 눈동자를 가진 자국인들에 대한 염세적 묘사는 이 모든 것을 상징하는 도상으로 읽혀진다. 또한 작가가 과거에 제시했던 전시 타이틀-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타 강국에 원조를 받고 있는 불안정한 공화국이라는 의미의 ‘바나나 리퍼블릭 (Banana Republic)’과 필리핀인들이 권력 투쟁의 피해자가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깊은 한숨 (Buntong Hininga)’ 또한 그간의 분투를 증명하는 이력이다.
이번 개인전의 전시 타이틀 ‘신은 바쁘다 (God Is Busy)’의 명명 배경은 필리핀 인구의 90% 이상이 가톨릭을 종교로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국가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 작가는 일상 속의 독재 개념을 탐구하며 이를 전능한 존재에 대한 집착과 병치시킨다. 현실을 직시하여 스스로 행동하지는 않으면서 창조주에게 묻고 그를 갈구하며 기도로서 해결을 바라는 다수의 안일한 태도에 ‘신은 바쁘다’는 냉소적이면서도 선언적인 한마디를 던지는 것이다. 변화는 용기에서 비롯되고 행동하지 않으면 찾아오지 않는다는 진리에 대한 함축이기도 하다. 종교를 비롯한 사회의 체제나 관습, 혹은 더 강력한 자의 권력에 기대는 수동성이 현실에 대한 개혁의지로 전환되기를 염원하는 작가의 바램이 전시의 메시지로 귀결되는 셈이다.
레슬리 드 차베즈가 믿고 있는 사회와 예술에 대한 가치관은 확고하고 분명하다. 그것은 노력과 열정을 반영한 작품으로 현실에 대한 성찰을 유도한다. 개념이나 주제의식 없이 시각적인 공격으로 어필하는 작품들이 범람하는 동시대 미술계에서 그의 예술이 구별되는 이유다. 이번 전시를 통하여 더욱 단단하게 정련된 그의 작품세계와 가능성을 관객과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레슬리 드 차베즈는 1999년에 University of the Philippines College of Fine Arts 를 최우수학생으로 졸업하고 2002년부터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2003년 필리핀의 Kulay Diwa Galleries 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으며 국내에는 2005년 고양 스튜디오 레지던시 해외 입주작가로 선정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7년 아라리오 갤러리와 전속계약을 맺으며, ‘Red-eyed Brother’ 전시로 주목을 받았고 이후 스위스의 Avanthay Contemporary 와 필리핀의 Silverens Gallery에서 전시했다. 대안공간 루프, 난징 트리엔날레, 독일 Leipzig 국제 예술 프로그램, 대만 국립현대 미술관에서 기획한 아시아 아트 비엔날레에 참여했다. 다수의 수상과 레지던시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동남아시아 현대미술에 주력한 전시에 공동 기획자로 활동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