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한 정체성
결혼을 하면서 웨딩 촬영이라는 것을 해보았다. 얼굴이 작아져 보인다는 입체화장을 하고, 가짜 머리를 붙여 풍성하게 만든 머리 모양을 한 후,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촬영했다. 전문가의 손을 빌어 살짝 ‘터칭’된 사진은 실제의 모습과 ‘살짝’ 다르다. 피부는 밝고 깨끗하게, 몸매는 날씬하게.
비단 웨딩 사진뿐 아니라 싸이월드나 블로그에 게재된 사진 중 상당수는 실제(眞)의 모습을 닮도록(寫) 한다기보다는 더 행복하고, 더 멋진 내 모습을 제시해 준다. 그 어떤 매체보다 실제와 닮게 제시해주는 기능을 가진 미디어인 사진이 오늘날에는 실제와 다른 나의 모습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순간을 기록/기억하기 위해서 사용되던 사진은 이제 보여주고 싶은 모습, 기억하고 싶은 모습을 창조해준 역할로 그 기능을 변화시킨 것이다. 바꿔 말하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일은 어렵지만, 변화된 것처럼 잠시 착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은 쉬워졌다. 몇몇 스튜디오에서는 다양한 컨셉의 의상을 갖춰놓고, 이용자들이 그 옷들을 바꿔 입으면서 평소의 자신과 다른 다양한 인물이 되어보고, 사진으로 기록하며 놀 수도 있다고 한다.
끊임없이 자아를 쇄신하라고 요구하는 사회에서, 우리도 스스로를 시험하고 싶을 때가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바꾸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필요하다면 성격도, 취향도, 심지어 신체적인 조건까지도 바꾸어가는 사회에 살고 있다. 10kg 감량, 성형수술 등이 더 이상 이슈가 되지 못하다. 내가 만약 역사 속의 무사가 되어본다면, 내가 이국의 소녀가 되어본다면? 사진은, 이렇게 또 다른 나를 시뮬레이션해볼 수 있는 매체로 사용될 수 있으며, 첸 칭야오와 변진수의 작품들은 이러한 사진의 새로운 기능을 십분 활용한 작품들이다.
먼저 첸 칭야오의 작품은 일본의 에도 시대의 판화인 우끼오에(浮世畵)의 이미지를 활용한 것으로, 우키오에의 대가로 꼽히는 도슈샤이 샤라쿠와 우타마로의 작품 속 인물들처럼 포즈를 취한 인물들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우키요에 특유의 표정, 즉 가늘게 찢어진 눈과 일본식 머리 모양을 표현하기 위해서 얼굴에다가 다양한 색상의 여성용 스타킹을 덮어쓰고 촬영했다는 점이다. 작가의 여자친구가 신년 파티를 하면서 장난스럽게 착용한 여성용 스타킹 사진에서 착상을 얻어, 인물들을 순식간에 우스꽝스럽게 변화시켰다. 에도 막부 말기의 무사 겸 사업가인 사카모토 료마의 근엄한 초상 사진을 패러디한 사진에서는 작가 자신이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어 오히려 희극성을 고조시킨다. 우키요에란 현대로 치면 ‘연예인 브로마이드’ 같은 기능을 한 셈이어서, 당시의 인기 있는 가부키 배우와 게이샤들을 모델로 한 경우가 많다. 첸 칭야오의 인물들도 우키오에 모델들의 에로틱한 포즈를 차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두드러진 것은 얼굴에 뒤집어쓴 스타킹으로 인한 희극성이다. 첸칭야오의 인물들은 분장한 파티의 즐거움을 한껏 즐기고 있는 셈이다. 완벽하게 일체화되지 않고 잠시 시간적, 공간적으로 먼 인물들을 흉내 내고 있기 때문에, 역사 속 인물들이 되어 보는 동시에 자신들의 현재의 정체성을 일견 보존하고 있다.
반면 변진수의 ‘소녀들’은 먼 이국의 소녀들의 모습에 깊이 녹아 들어 있다. 무표정하거나, 심지어 우울한 표정의 소녀들은 여기가 아닌 그 어느 땅에, 그 어느 시대엔가 속하는 듯하다. 안데스 산맥을 헤맬 것 같은 소녀도 있고, ‘늑대와 춤을’ 출 것 같은 인디언 소녀도 있다. 파란색이나 보라색을 띤 그녀들의 피부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진지한 표정들과 전형성을 갖춘 의상과 장식을 인해 ‘존재할 법한’ 개연성을 갖는다. 여기서 소녀들의 원래의 국적, 특성, 성격은 소실되었고, 새로운 가상의 정체성이 성공적으로 부여되었다. 먼 이국의 소녀가 된 것이, 모델들의 의지인지, 그녀들을 모델로 기용한 작가의 의지인지 알 수 없으나, 양측 모두에게서 지금 여기의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초월한 자유로움에의 욕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첸칭야오의 인물들이 스타킹을 벗으면서 한바탕 웃으면서 잠깐의 시간 여행을 즐긴 후 현실로 성공적으로 안착했을 듯한 반면, 변진수의 소녀들은 시간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어딘가에서 길을 잃었을 것만 같다. 반쯤은 자의로. 이제 사용한 지 넉 달이 채 안 된 아이폰 속에 천 장이 넘는 사진이 담겨 있다. 당신의 휴대폰 혹은 디지털 카메라 속 상황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수없이 찍어대는 사진 속의 우리는, 무사귀환과 행방불명 사이,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내가 아닌 내가 되는 마법을 우리는 얼마나 즐기고 있으며, 그 마법이 풀린 순간, 우리는 어디에 서 있을까.
-이수정 (오픈스페이스 배 객원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