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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식 전 - “금기(禁忌)산업”]
미술

무료

마감

2011-08-05 ~ 2011-08-10


전시행사 홈페이지
www.kepco.co.kr/gallery


신진식은 대형 캔버스(181.8×454.6cm)를 두 개의 색 면으로 구분했다. 단호하게 붉은 색과 녹색으로 칠해진 색 면 추상이다. 우선적으로 시선에 잡히는 것은 펼쳐진 색채공간이다. 색채 자체가 풍기는 상징성이 그 뒤를 잇는다. 색채로 물든 납작하고 평평한 화면에는 디지털 에스키스가 은닉되어 있다. 그 이미지는 드러남과 동시에 색채 속에 파묻혀 있다. 좀 더 주의 깊게, 근접해서 보아야 보다 확연해지는 이미지다. 마치 누드가 색채 속에서 떠오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포르노이미지에서 따온 이 여자누드는 영상이나 사진이미지를 차용해 이를 캔버스화면 안으로 호출해 낸 것이다. 마치 고야의 그림 ' 마야부인' 을 연상시키는, 서양미술사에서 흔하게 접하는 누드의 전형적인 포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이 벌거벗은 여자의 시선은 관자의 시선에 꽂혀있다. 이 수동성은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에게 마냥 허용되어 있다. 그것은 남성의 시선일 것이다. 이 누드는 눈빛과 음부만을 전면적으로 드러낸 채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다. 유혹과 일탈을 권유 하는, 숨기기 어려운 욕망을 흡입해 내는 그런 눈과 몸이다. 눈과 음부는 텅 빈 구멍이다. 관음증적으로 바라보는 이의 시선은 그 구멍에 무한정 빠진다. 이 무방비의 몸은 일상에서 흔하게 접하는 포르노이미지의 전형이기도 하다. 이런 이미지는 삶의 도처에 산개하고 횡행한다. 우리는 이런 도색적 이미지에 포위되어 있다. 그것은 노골적으로 더러는 은밀하게 소비하는 성적 이미지다. 

  다분히 비도덕적이고 통속적으로 그린 이 소녀누드는 거대한 크기로 다가와 보는 이에게 압도감을 준다. 마치 톰 웨슬만의 거대한 누드를 연상시킨다. 그 크기는 우리 욕망의 비등점이기도 하고 욕망의 대상에 속수무책인 무기력과 자괴감의 넓이이자 그 같은 포르노 산업의 거대한 규모를 상정한다. 동시에 그것을 규제하고 금기시하는 권력의 무게를 부피화 한다.

작가는 말하기를 이 작품은 9명의 소녀누드가 벌이는 침묵의 시위라고 한다. 그는 불법적인 성의 과도한 규제는 역설적으로 창의적인(?) 성 산업의 개발과 함께 새로운 수요를 개척하는 상황의 아이러니를 말한다. 그것을 작가는 이른바 ' 금기산업' (Taboo Industry)이라고 칭하고 있다. "금기는 황금을 낳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금기와 욕망의 기묘한 관계 그리고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든 것의 자본화, 상품화전략을 보게 된다. 한 사회가 구성원들에게 강제하는 금기의 대상은 바로 죽음과 성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죽음과 성을 관리 받는다. 국가와 사회, 가정에서 그 훈육과 금기는 이루어진다. 사회의 일탈에 대한 금기로 가장 먼저 의식화되는 것은 죽음이다. 따라서 일상은 결국 죽음을 극복하고 밀어내는 다양한 행위의 연출로 채워진다. 나아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의식을 통해 일상으로 전환하면 그것이 종교가 된다. 죽음은 결코 경험될 수 없기에 오직 의식으로서만 접근될 수 있는 무엇이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금기의 위반은 최대의 사회적 일탈이 된다. 자살이야말로 자신의 몸에 강제되는 권력과 금기를 일거에 지워버리는 일이다. 성 또한 죽음과 함께 금기의 대상이 된다. 한 사회에서 행하는 금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단연 성이다. 성이란 은밀한 인격적 관계로 에워싸여 있다는 점에서 너무나 사적이지만 동시에 욕망과 쾌락이 달라붙어 있다는 점에서 미적이며 또한 정치의 영역에 속하고 있다. 오랫동안 죽음과 성은 한 사회를 유지하거나 관리하는데 있어 반드시 관리되어야 하는 금기의 대상이 되어 왔다. 어쩌면 문화란 이 두 개의 금기대상을 관리해 온 궤적일 것이다. 

  죽음과 섹스에 대한 금기가 일상 속으로 기어들어올 때는 반드시 사회적, 도덕적, 문화적 규범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그 금기에 대한 교육을 도덕이라고 하며 금기의 위반을 제재하는 것이 법이다. 그 금기의 의식이 또한 제도이다. 그것이 금기가 되는 것은 일상에서의 통제 불가능한 일탈이 타자에게 주는 공포심 때문이다. 섹스에 대한 통제 역시 통제 불가능한 인간의 일탈행위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그 공포가 제도화되는 것이 권력이다. 타자에 개입할 수 있는 최대한의 권력을 사회화했을 때 거기에는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성에 대한 무수한 금기가 발생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일상의 안정을 꿈꾸는 사회 권력이 더 강고한 도덕과 더 많은 사소한 제도를 양산할 때 일상에서의 일탈은 더욱 폭력적이며 전면적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금기는 위반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위반할 필요가 없는 금기는 더 이상 금기가 아니다. 따라서 금기는 항상 위반이라는 ' 사건' 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 사건은 자본, 산업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역설적으로 금기가 강화될수록 그것을 위반하는 무수한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이것이 새로운 산업으로 진전된다. 신진식은 이를 ' 금기산업' 이라고 부른다.

신진식은 그 부분에 비판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그는 작업을 통해 우리사회의 금기와 그것이 낳은 또 다른 모순을 매우 함축적이면서도 간결하게 드러낸다. 이 그림은 아이러니한 금기산업의 의미, 규모, 정체를 사진이미지와 드로잉, 색채추상, 그리고 숭고함을 자아내는 거대한 화면(순수미술)이란 틀 안으로 수렴해서 충돌시킨다. 생각해보면 현대미술은 일상의 일탈을 문화라는 제도 안으로 순화해서 길들임으로써 금기로 규정한 것을 세련되게 막는 문화적 행위 자체일 텐데, 또한 그것이 다름 아닌 근대를 추동시킨 계몽 프로젝트일 텐데 그래서 외설을 예술로 승화하고 이미지와 정신의 이분법적 구도를 위태롭게 지탱하고자 해왔다. 그러나 과연 그것은 성공했는가? 

  한 사회는 권력을 내세우고 도덕과 문화라는 이름으로 금기를 관리한다. 이 권력이라는 폭력은 항상 자신들에게는 문제가 없지만 ' 타자' 의 손에 쥐어지게 될 경우에는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 죽음' 과 ' 성' 을 통제하려 한다. 그러나 강고한 억압과 제도의 지탱이 일탈의 허술한 사회적 구조를 만들어낸다. 섹스에 대한 금기의 위반으로서의 강간 혹은 포르노가 보편화되는 것이 그것이다. 동시에 금기산업이 기승을 부린다. 이 시점에서 한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금기와 위반, 성과 죽음에 대한 규제와 일탈, 그리고 이에 기생하는 자본의 착취와 산업을 바라보는 새로운 사유가 요구되는 것이다. 신진식의 이 명료한 이미지는 그런 사유의 촉발을 거대하고 단호하고 도발적인 그림 안에서 발화한다.

신진식의 그림엔 아름다움이 있다. 이 아름다움은 두 가지로 나눠 말할 수 있겠다. 하나는 그림 자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름다움이란 주제를 직접 제시하고 작업한 것이다. 
  첫 번째 경우를 보자. 1985년 누드 디지털 프린트, 1993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다음해 선보인 종이상자 유화, 1996년 디지털 프린트 "나는 안다. 내가 누군지", 1999년 뉴욕 개인전에서 보여준 "사후연구" 유화, 그리고 2007년 이후의 "이웃시리즈"에서 볼 수 있듯이, 주제가 무엇이건, 표현이 거칠건 정화되었건, 결국 어떤 아름다움으로의 종결을 추구한다. 회화라는 평면적 세계에 접근하는 그의 기본적 태도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면에서 신진식은 고전주의자다.
  두 번째의 대표적인 예는 여자의 육체다. 신진식은 여자의 육체를 어떤 눈으로 보고 느끼는가 하는 화두를 끌어안고 꾸준히 질문을 던져왔고, 이번 전시 "남용되는 금기산업"은 이 아름다움의 문제성을 사회적 관점에서 보려는 그의 최근 작업의 일환이다. 

  벗은 여자의 육체는 아름답다. 벗은 것 그 자체를 누가 나쁘다 하는가? (우린 더 이상 유교사회가 아니다). 그 여자 본연의 모습이기에. 문제는 누굴 위해 벗었는가? 에 있다. 신진식의 9점 "누드"는 과연 누굴 응시하고 있는가? 이들은 아티스트 신진식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여자들도 아니고,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같이 아티스트가 이상화한 여자도 아니다. 그저 길거리를 걷다 부딪칠 수 있는 이름 모를 남정네를 겨냥한 고객유치 홍보물일 뿐이지. 매혹적인 이 여자들의 눈빛은 어떤 한 남자를 향하여 자기 스스로가 느끼고 있는 고유한 감정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니다.세상의 모든 남자들이여, 난 그대가 누군지 몰라도 사랑할 수 있네!란 Universal Love다.
  이렇게 형식화된 이미지를 두고 "포르노"라고 한다면 ("누드"와 대조시켜), 신진식은 이 장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예술적으로 미화시킨다. 그린과 레드로 캔버스 백그라운드를 칠하고 앤디 워홀을 연상케 하여 지금 우리가 친숙해하는 팝아트의 아우라를 빌려 정당화시킨다. 우린 거부반응을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이 그림을 보는 우리를 공범으로 만든다. 

  사실 워홀이 처음 캠벨 수프 캔을 작품화했을 당시의 반응은 그가 상업소비문화에 승복했다는 격렬한 비판이 다수였다. 워홀은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걸 그렸을 뿐이라며 작품의 의미를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아티스트 신진식은 모럴리스트인가? 그의 작품을 단지 금기산업을 겨냥한 사회비판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잃는 게 많을 것이다. 그가 올해 초에 보여준 디지털 프린트 작품 "소녀시대"도 좋은 예다. 아티스트의 사회비판적인 의도에도 불구하고, 작품으로서의 탁월한 착상이 번득인다. 워홀이 자기시대를 풍미한 마릴린 먼로를 대상으로 삼았으면, 왜 나는 우리시대를 풍미하는 소녀시대를 대상으로 삼지 못하랴. 아니, 당연히 삼아야한다. 오렌지색 백그라운드에 서있는 유나를 보고 50년 후의 관람자가 느낄 감동을 지금 우리가 결정지어줄 수 없듯이 그 아름다움의 가치는 그 자체로써 충분하다. 무엇이 신진식을 움직이건, 우리에겐 그가 그걸 통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아티스트가 하는 말은 절대 믿지 말라, 그의 아트만을 믿어라"하며 역설한 소설가 D.H. 로렌스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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