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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서다
미술

무료

마감

2011-07-11 ~ 2011-08-17


전시행사 홈페이지
www.bnviitgallery.com

경계에 서다



화가 박종필은 2006년 즈음부터 실재와 가상 사이의 경계에 놓인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다.
실재와 가상, 두 영역의 공존이란 애매한 상태에 관심을 둔 그의 작품들은 대체로 캔버스 위에 유화로 그려지지만, 간혹 오브제 제작과 설치도 이루어진다.
2000년대 신진작가들의 네오팝 경향과 맞물린 작업 성향과 탁월한 사실주의 능력 때문에, 하이퍼리얼리즘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작가 자신은 이 분류를 정중히 사양한다.
기계에 의존한 기능적 회화인 하이퍼리얼리즘에서 발견된 차가운 비인간적 성질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박종필은 오히려 구상회화의 구성적 복잡성과 심리적 의미 부여를 선호한다. 이를 위해 오브제 제작과 설치를 시도하고, 그 파생 효과를 회화에 취합하기도 한다.
실재와 가상은 본질적으로 상반된 개념어로서 상호 모순된 가치를 나타낸다.
하지만 이 둘은 작가의 작품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양면적 특성으로 공존하고 있다.
대립된 두 요소가 이루는 부조화의 상황이 곧 아이러니이다.
작가는 후기산업사회 현실이 지극히 모순된다는 점을 가리키기 위해, 이 아이러니를 작품의 중요한 지표로 선택한다.

문학에서 아이러니가 종종 진리를 강조하는 비유나 풍자의 한 형태로 사용되듯이, 작가는 이를 자연인인 인간의 본성과 과학기술의 인공적 상황이 충돌하는 현실을 은유하기 위해 사용한다.
현대 매스미디어 사회에는 실재와 가상이 뒤섞인 기묘한 환경이 형성되어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광고계에서는 가상세계가 오히려 현존하는 실재계를 구축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작가가 선택해 온 소재들도 다름 아니라 이 같은 후기현대사회의 기묘한 상황을 반영한 이미지들이다.
이를테면 매스미디어가 유통시킨 쾌락적 소비대상의 이미지들로, 상품화된 케익과 인위적으로 장식된 사탕 그리고 온갖 꽃들의 이미지가 실재와 가상의 경계에서 거의 강박적으로 화면 위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박종필의 "꽃" 연작 (「Between the fresh」 연작, 2008~2010)에는 생화와 조화가 뒤섞여 있다.
하지만 두 요소들의 시각적 구분은 쉽지 않다. 대단히 명확한 사실적 구상임에도 이 초록의 향연장 안에 식별이 어려운 조화가 섞여있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불현듯 가식의 스크린 앞에 선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잠시 숙고해보면, 참과 거짓이 혼합된 이 같은 상황은 실상 이중적 양면성을 내포한 현대사회의 상황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참과 거짓, 실재와 가상을 구분하고 분리하려는 태도가 더 모순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복제와 가상이 만연된 오늘의 사회에서 실재와 환영, 참과 거짓은 동시에 병존하는 필연의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실재만이 유일한 가치이고 가상과 대립한 지배적 우월 요소란 주장은 더 이상 현실성이 없다.
마찬가지로 실재를 가리는 가상도 그 위장과 은폐를 통해 실재를 몰아내기보다 실재를 가리면서 동시에 은연 중 가리키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실재에 대해 가상은 마스크라드 masquerade(가리기)의 역할을 수행하며, 현실에 대한 이미지 역시 그러한 마스크라드의 기능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거짓-모상이 참-원상을 완전히 가려서 은폐하지 않음은 일종의 풍자이고, 높은 단계의 정신적, 심리적 역설의 플레이 즉 마스크라드이다.
이 같은 마스크라드에 의해, 작가는 회화적 환영(=가면)에 틈새를 만들고 이를 통해 자기반영을 한다.
작가가 사진을 사용하지 않고 유화와 붓을 계속 고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계적 복제가 아닌 심리적 무게가 실린 손작업으로 마스크라드의 효율을 높이려는 까닭이다.
아닌게 아니라 스치고 지나간 붓질 자국들이 여기저기 눈에 띠는 순간, 환영의 완벽한 가면놀이는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자기반영의 마스크라드에 의해. 가상의 본래 위상이 여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의 미술은 대부분 실제와 가상 사이의 마스크라드 작용을 적절히 응용하고 있으며, 생화와 조화의 혼합인 "꽃" 연작은 실제와 가상을 혼합한 포스트모던의 절충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은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전통적 관례대로라면 정물화가로 불릴 수 있다.
17세기 서양미술사에서 죽은 자연(nature morte), 정지된 삶(still life)을 의미하며 등장했던 정물은 본래 삶과 죽음, 활기와 정지, 환영과 자기반영, 실재와 가상의 이율배반적 요소가 함께 어른거리는 장르였다.
그런 역설적 사색의 분야인 정물을 선택함으로서, 작가는 삶과 실재 옆에 죽음과 가상이 깃들어 있다는 아이러니의 메시지를 효과 있게 전달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근대 화가들이 풍요의 정물을 그리면서도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기)의 알레고리를 즐겨 암시했던 것처럼 말이다.
다만 새삼 초점을 맞추어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 정지된 자연 이미지 안에 현대사회의 과도한 인위성이 공존함으로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본질적 문제를 적나라하게 은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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