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리얼리즘의 대표작가 황재형(1952-)의 개인전
가나아트는 민중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내면의 진정성을 사실적이고 깊이있는 화면으로 표현해 온 화가 황재형의 개인전을 연다. 황재형(1952-)은 1982년 중앙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리얼리즘의 심화라는 입장에서 민중미술 운동에 동참했던 미술단체 ' 임술년' 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중미술의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는 1983년 돌연 태백으로 내려간 이후 태백 탄광촌과 지역 사람들의 삶을 그림으로 담아내고 있으며, 기층민의 삶에 대한 연민, 소박하지만 치열한 생존의 현장을 냉철하게 직시하여 재현하는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전시는 지난 2007년 가나아트 개인전 이후 3년 만에 열리는 것이다. 91년을 마지막으로 16년 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던 작가는 지난 2007년 개인전을 통해 사람들에게 황재형이라는 이름을 다시 알렸다. 태백이라는 장소적 특수성과 황재형의 특별한 인생 이력에 치중하여 세인들은 그를 ' 광부 화가' , ' 탄광촌의 화가' 로 쉽게 인식하곤 하지만 그의 그림 속에는 대상을 조용히 관조하는 원숙한 시각, 존재의 리얼리티를 드러내기 위한 화가의 고민이 겹겹이 쌓여있다. 이번 전시는 다시금 ' 화가 황재형' 을 발견하는 전시로서, 태백 지역 산의 장엄한 경관과 어머니의 품같은 자연, 탄광촌 사람들의 삶을 그린 그림 60여점을 전시한다.
「쥘 흙과 뉠 땅」의 26년 여정- 현실 자체이자 현실개조의 희망이었던 그의 캔버스
황재형은 태백으로 이주한 이듬해인 1984년 서울의 작은 미술관에서 이라는 제목의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 당시의 작품들은 탄광촌 사람들의 일상을 사실주의적 화풍으로 그린 것으로 탄광촌이라는 새로운 소재를 예술적으로 미처 소화하지 못한, 그래서 조형적으로 거칠어 보이는 작품들이었다. "쥘 흙은 있어도 누울 땅은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암울한 현실이 복사된 듯 그림 속에 녹아들어 있었고 현실을 딛고 일어서 유토피아를 이루고자 하는 작가의 바램이 강력하게 투 영되어 있었다. 그보다 앞선 1980년 중앙미술대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했던 에서도 광부의 옷을 극사실기법으로 그려 당시 제도권이었던 추상미술에 대한 대항의 의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형식 이상의 탄광촌에 대한 내용의 리얼리티를 담아내고 있었다.
1980-90년대 황재형의 ' 쥘 흙과 뉠 땅' 은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저항의 몸짓이자, 자연으로 돌아가 인간 생명의 가치를 복원하기 위한 메타포로서 역할 하였다. 작품의 재료도 물감 외 흙과 석탄 등의 혼합재료를 사용하여 물리적 사실성에 다가가려는 리얼리즘적 자세를 보여주었으며, 그림 속 탄광촌의 모습은 잠자리가 편한 사람들에게는 각성을, 불편한 잠을 자는 사람들에게는 위안을 주고자 하는 작가의 뜻을 진하게 담고 있었다. 이렇게 황재형의 그림은 현실이 되고, 현실은 그림이 되었다.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흙과 대지'
- 대상을 관조하는 원숙한 시각이 담아내는 태백 풍경과 내면의 진정성
탄광촌의 거칠고 암울한 풍경 속에서 가난하지만 건강한 노동의 삶을 담았던 황재형의 그림은 2000년 이후의 근작들에서 광부나 탄광촌 인물들의 모습이 대부분 사라지고, 그들이 살고 있는 산촌 마을이나 태백의 골목들 사이의 풍경과 같은 정황들이 주로 등장하는 모종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탄광이 문을 닫고 카지노와 호텔들이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떠나고 마을의 모습이 변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정을 드러내는 추상적인 명사들이 작품의 제목으로 자주 등장하는가 하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본 강원도 산과 산골 마을의 풍광에는 대상을 바라보는 애정 어린 시선과 차분한 서정성 또한 담겨 있다. 이전의 작품들에서는 자신을 버리고 현실과 대결하면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면, 근작들에서는 그 치열함 대신에 사물을 조용히 관조하는 원숙한 시각이 자리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살고 있는 광부의 집이 바로 광부의 모습이고 표정이듯이 무심한 사물 하나하나의 존재감이 때론 상충하고 때론 흡수되면서 내게 다가온다...화면 앞에서 나는 마치 삶의 현장처럼 더욱 더, 일부러 구도부터 깨뜨려 어긋나게 하고, 색채도 터치도 반발시켜 끝내는 그것들이 부스러지고 깨지면서 생성된 내재된 힘으로 생명력을 발산 시킨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이제 작가는 심적 안식을 얻은 관조자의 자세로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태백을 다시 바라보고, 그' 흙과 대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힘과 생명력, 내면의 진정성을 담고 있다.
생명의 존엄성과 시대정신을 말하고 우리에게 각성과 위안을 전하는 전시
황재형의 그림은 밑그림이 대단히 사실적이다. 훌륭한 데생력과 묘사력을 바탕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덧칠을 가하면서 형상을 지워나간다. 형태를 다듬어 완성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놓은 형상을 부셔버리면서 화면에 강조와 변형을 가하기 때문에 작품이 언제 완성될지 작가도 모른다. 그의 그림의 제작 연도가 수년에 걸쳐져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붓을 쓰지 않고 나이프로 강한 터치를 가하면서 외형적 사실성을 내면의 진정성으로 이끌어 간다. 일부러 대상을 변형시키면서 하나의 사물에 담은 복합적 의미를 놓치지 않고 담아내려고 하는 그의 그림은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단순히 묘사된 풍경 이상의 깊은 사색을 느끼게 한다.
군부 통치와 정치적인 억압에 대항하고 짓밟힌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를 되찾기 위한 범시대적 화두를 온몸으로 실천하던 때, 황재형은 탄광촌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스스로 광부가 되어 막장의 삶을 살아보기도 하고, 탄광지대 어린이와 미술교사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세상 속 미술과 미술가의 역할을 고민해왔다. 그러나 그의 다양한 활동들은 노동운동가나 사회운동가로서가 아닌 화가로서의 꿈을 이루기 위한 행로였다. 오랜 시간 매만진 높은 밀도의 형상들, 물감의 물질감을 돋우어 생생함을 더해가면서 그는 모든 존재의 존엄성과 본질적 면모, 살아있는 것 모든 것이 아름다움이며 희망이라는 믿음을 그림으로 내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