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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으는 들꽃
미술

문의요망

마감

2009-11-04 ~ 2009-11-15


전시행사 홈페이지
insa.ssamziegil.com/exhibit/exhibit_view.asp?eid=100183&gallery=GD




■ 전시소개
갤러리 쌈지에서는 < 兒孩-날으는 들꽃> 연작 시리즈를 통해 급속한 자본화의 과정에서 황폐해져 가는 인간 자아의 상실에 대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작가 이상선의 개인전을 개최합니다. 1930년대 식민 지배 시대 시인 이상(李箱)이 시 오감도(烏瞰圖)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통렬히 비판했다면, 2000년대 작가 이상선은 이미지를 통해 자본의 억압과 욕망, 그리고 그것들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들의 현실을 다시 보게 합니다. 작가는 실제 일 년여 간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중국에 체류하면서 도시화, 자본화 되는 과정을 목격하고 과연 발전이라고 말하는 것이 진정 우리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고 있는지를 의심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많은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시장 지향과 그 영향력을 부인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것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작가 중의 한 명인 이상선의 이번 전시에 많은 관심을 부탁 드립니다.



■ 전시서문


슬프도록 아름다운 몰락 : 이상선의 날으는 들꽃


글/ 박준헌(미술이론, art management 대표)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러케뿐이모혔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 무서운 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 무서운 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 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 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길은뚤닌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 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이상(李箱, 1910~1937), 「오감도 시 제1호(烏瞰圖 詩 第1號)」 전문



예술가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시작한 이후 인간에 대한 탐구는 어떤 숙명과도 같은 것이 되었다. 인간을 주어로 설정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술어도 용인할 수 없듯이 예술가에게 인간이란 예술의 시발이자 종착이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모호한 주어는 현실을 견인하지도 구원할 수도 없는 추상성 때문에 늘 미완성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끊임없이 부서지고 흩어져서 다시금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인간의 본질을, 그 표면 너머의 어떤 것을 포착하기 위해 무수한 결행을 감행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예술의 역사다.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역사 말이다.


인간을 대상화하고 그 개별성을 존중하기 위해 작가의 눈은 표면의 형태를 옮기는 시선에서 그 이면을 꿰뚫어보는 직관으로 이동하였고, 그것은 윤곽을 그리는 것에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방식으로 진화하였다. 이러한 시도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정의할 수 없는 대상을 감싸고 있는 억압들을 하나씩 확인할 수 있었고, 객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예술의 당위와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었다. 이것 역시 예술의 역사다.
예술이 당면한 문제는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눈, 사고하는 눈에 있다. 선명한 묘사가 아닌 헐거운 개별성의 파편을 진정으로 대면하는 것이고, 눈앞에 펼쳐져 있는 화면에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투명한 세계를 갈망하는 것이고, 그것의 내면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인간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마루야마 겐지)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이것이 기성의 시각에 침전되지 않는 길이고, 새로움을 견인하는 작가의 자세다. 자신을 거역함으로써 타인의 생을 살기보다는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 나를 부정하는 것.
그래서 작가는 찬란한 절벽에 서 있는 자다. 한 걸음 이후를 기약할 수 없는 자다. 그 끝이 어딘지를 모를 곳으로 자기를 떠미는 자다. 그것이 바로 작가의 아름다운 몰락이고 숙명이다. 프로이트가 말했던 죽음충동. 그 충동, 그 불완전함이 시를 발화시키고 그림을 그리게 하는 힘이다. 소설가들이 법과 금기의 틀을 위협하는 선택과 결단의 순간을 창조하고 그 순간이 요구하는 진실을 오래 되새기게 한다면(신형철), 화가는 이미지를 통해 가공과 장식 없이도 진실에 다가가고, 본질을 꿰뚫는다. 이것을 현상학에 비춰 사물(이미지)의 확실성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러한 작품은 과장되지도 스스로의 치장 없이도 빛을 발한다. 즉 작품은 삶의 장식이나 부수적 요소가 아니라 진실을 드러내는 수단이며, 따라서 진실의 일부(김훈)인 것이다. 이미지의 세계에서 살 수밖에 없는 화가들에게 아름다운 승리란 바로 그곳에서의 실패를 스스로 증명하는 길밖에 없다.



문학은 무용(無用)하기 때문에 가치 있고,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고 했다.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자유(김현), 바로 이 지점, 억압된 것들을 증거하는 그곳에 이상선의 사람(아이들)이 위치한다. 그의 화면에서 주 대상으로 삼는 아이들은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천진난만한 존재들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의식 안에서의 자유를 가질 뿐, 작가의 의식 안에서는 지독한 내홍을 앓고 있는 그 ‘무엇’이다. 그 아이들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어떤 특정 나이나 층위의 인간이기보다는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성장이 정지된 인간이기도 하다. 아이일 수도, 아니면 우리들일 수도 있는 그 ‘인간’들은 가장 우선적인 먹고 사는 일, 노동에 대해 초연한 현실에서 유리된 인간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 혹은 부정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그의 일관된 작품 제목 「兒孩―날으는 들꽃」에서 아해(兒孩)는 악명 높은 이상(李箱, 1910~1937)의 시, 「오감도 시 제1호(烏瞰圖 詩 第1號)」에 대한 오마주(hommage)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식민지 근대화의 지식인이었던 이상은 당시의 조선인을 주체적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에 빗대어 표현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조선인은 주체가 아니며 객체이며 오직 짜인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어린아이(‘아해’) 같은 존재들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이상의 눈에 조선인들은 식민지 근대의 도시 경성이라는 매트릭스(matrix)에서, 편재하는 ‘공포’에 휘둘리면서 ‘막다른 골목’을 향해 편집증적인 ‘질주’를 ‘반복’하는 불길한 타자들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이 식민지 거리의 공포라는 테마가 그에 걸맞은 ‘반복 강박’적 형식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 「烏瞰圖 詩 第1號」다”라고 그 시의 형식과 의미를 강단 있게 밝힌 바 있다.


식민지 근대를 압축적으로 극복하고 한강의 기적을 넘어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한 이 시대에 한 화가가 무덤 속에서 불러낸 이상이라는 시인의 시는 사실 특별하지도 혁신적이지도 않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시가 가지는 의미가 모두 희석됐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돌이켜보면 식민 지배 속에서나 자본에 의해 조정 되어지는 지금이나 우리들의 삶은 다를 것이 없다. 작품을 통해 이상선이 근본적으로 고민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으로 급속한 자본화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그 이면의 억압 그리고 욕망들이 여전히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외침 말이다. 1930년대의 경성과 2000년대의 서울이 유행과 표면이 바뀌고 지배의 성향이 훨씬 정교해지고 세련되어졌지만 그 본질은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처럼 여전히 우리는 자본 앞에서 객체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상이 폐병에서 오는 절망을 이기기 위해 시를 쓴 것처럼 이상선 또한 현실의 절망을 이기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의 작품은 하루하루 죽어가지만 그럼에도 일어나는, 세상의 삶과 작가 개인의 삶의 괴리에서 오는 사유들을 주 테마로 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결국엔 이 거대한 세상에 길들여지기 마련인 인간의 숙명적인 나약함과 소멸이 예정되어 있지만 삶을 버리지 못한, 삶을 버릴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자화상의 대변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어린아이 작업들은 언뜻 보기에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표정이 과감하게 포착되어 있는 것 같지만 오랜 기간 자세히 관찰하다 보면 현대인이 느끼는 고독, 상실, 소외, 공허가 느껴진다. 온갖 미묘한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그의 인물들은 아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현실에 고통 받고 상처받은 바로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이것은 절대 친숙함이 아니다. 농부가 땅을 친숙함으로 대해서는 절대 농부가 될 수 없듯이 작가 또한 대상을 친숙함으로 화면을 흥미로 다루지 않는다. 그 안에서 생활하며 고통 받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스미게 되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상선의 작품은 그렇게 그의 아이들(현실)에 스민, 자기 안에서 무섭도록 소용돌이치는 어떤 절망이다. 자신의 절망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는 용기를 얻게 하는 것. 다시 작가의 숙명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래서 작가는 고독한 자이고 가장 위태로운 입장에 놓인 자일 게다. 그의 화면은 꽃과 아이라는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두 가지 실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데, 아이의 얼굴을 배경으로 흩뿌려진 그 꽃들은 마치 자라서 세상이라는 격전장에 내던져질 인간의 나약한 삶에 바치는 헌화가(獻花歌)처럼 쓸쓸하고, 시간이 지나면 흩날려 소멸될 수밖에 없는 이름 없는 들꽃처럼 희망 없는 삶의 고통을 담담하게 끌어안는다.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희망을 말할 수밖에 없는 화가의 숙명을 감내하고 있는 그의 화면은 세상을 개조할 수는 없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일상을 아이들의 시선을 통해 포착해내고 있으며, 그 시선은 삶을 경건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어느 소설가가 그랬다. “흉터는 그 사람이 살면서 겪어온 시간의 흔적”이라고. 그러면서 “스쳐갔던 상처들이 몸에 새겨져서 그 때의 아픔과 시간을 기억하게 만든다”고. 이상선의 작품은 그렇게 그가 겪어온 흔적으로서의 흉터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아픔의 시간을 기억하게 하고 삶을 다시 보게 한다. 흉터를 통해 시간을 기억하듯 그는 작품을 통해 삶을 기억한다. 현실에서 도피한 허구가 아닌 그 싸움에서 당당하게 맞서고 있는 우리들 자신을.
몸으로 체득된 사실은 쉽게 잊히지 않는 것처럼 그의 화면에는 고통스러운 생을 감내하면서 확인된 그리움들이 오롯하게 자리를 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힘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미덕이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화면은 아이와 들꽃이라는 매우 단순해 보이는 구성에도 불구하고 한 번 작품을 본 사람들은 오래도록 그 기억을 간직할 수 있고, 작가가 가지고 있는 삶의 흉터를 공유할 수 있다. 우리는 세계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필연적으로 개별의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세계 속에서 사회 속에서 하나의 부속으로의 삶과 개별의 삶 사이에는 참혹한 결핍들이 자리한다. 그것이 우리의 생이고 삶인 것이다. 작가 이상선은 바로 이러한 세상에 대해 우리의 개별적인 삶이 운명처럼 감내해야 할 경건한 오늘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세상에 발언할 수 있는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상선은 꿈꾸는 화가다. 실현될 수 없는 꿈을, 이룰 수 없는 것을 꿈꾸는 화가다. 좋은 의미에서 이것은 작가가 현실을 넘어서는 이상적 삶에 대한 염원을 발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다른 측면으로는 예술을 방패 삼아 현실을 회피하는 이상주의자로 읽힐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작가의 딜레마다. 하지만 그는 이조차도 태연하게 수긍한다. 흡사 모든 사람들이 삶을 고통스럽다고 이야기 할 때 그는 고통의 극점은, 그 지독한 아픔은 신음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며 마냥 담담하게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 담담함이 슬픈 들꽃이 되어 화면에 흩날리며 세상을 부유한다. 그의 화면은 투명한 세계가 아니다. 작품에 흩날리는 들꽃은 격렬하지도 그렇다고 일정하지도 않은 채 스스로 부딪치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 일으키기도 하면서 시선을 자극한다. 해맑은 아이의 얼굴 위에, 쇠락한 도시의 뒷골목에 내리는 들꽃은 짤막하게 한 장면이 되어 가슴에 새겨진다.


예술의 깊이를 논하는 것이 촌스럽듯이 진지하게 삶을 설파하는 것 또한 우매한 광대놀음이 되어버렸다. 그냥 가볍게 관조하듯 그렇게 이 시간이 흘러가게 일상이 현실이 되게 놔두면 되는 것이다. 현실보다 더한 신파가 없듯 현실보다 더한 예술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술에서 현실을 넘어서는 무엇을 찾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다른 장르는 접어두더라도 적어도 현대미술은 바로 이 기반에서 존재한다. 때문에 동시대의 많은 작가들에게 현실은 한 발짝 비켜가야 하는 검문소가 되어버렸다. 더 이상 현실의 문제를 화면에 반영하지도, 그것의 부당함을 설파하지도 않는다. 영화가 구현하지 못하는 시각적 효과와 화면에서 뗄 수 없는 자극적 현란함의 구사가 그들이 당대의 예술에 보내는 초유의 관심사다. 그것은 이미지가 현실의 진정을 실어 나르지 못하는 숙명과 비교할 때 불가피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상선은 대상이 없는 단지 독백으로 그칠지언정 그것과 진정으로 대면하는 일을, 그 고통스러운 일을 우직하게 감행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꿈꾸는 화가이다. 현실의 무게와 그 꿈의 크기는 비례할 것이다. 현실의 무게를 외면할수록 그 꿈은 흐릿해질 것이고, 현실을 적극적으로 응시할수록 그 꿈은 명확해질 것이며, 투명해질 것이다. 실재의 세계를 질주하는 아이의 몸짓과 표정은 사상과 철학을 뛰어넘고, 폐쇄적인 예술을 무색하게 할 것이다.
절망을 확인함으로써 그 너머에 있는 것을 포착할 수 있고 정말 할 수 있기에 아름답다. 이 문장은 “현실을 확인함으로써 그 너머에 있는 것을 포착할 수 있고, 현실과의 싸움에서 도피하지 않기에 허구를 경계할 수 있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기에 아름답다”로 치환된다. 우리는 싸구려 감동을 위해 이미지의 성을 쌓아 두고, 그 세계를 조정하고 통치하는 작가보다는 자신의 온몸으로 현실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그것을 직시하는 작가를 신뢰한다. 그리는 혹은 그려지는 대상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그 지독한 외로움을 견디면서 세상과 정면대결 할 수 있는 체질을 갖췄는지가 관건이다. 철학은 이 다음이고 작품의 해석은 그 한참 뒤 어디쯤이다. 이런 기반을 가지고 있는 작가의 작품에 해석을 가하고 그 철학적 배경에 대해 논하는 것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언어 이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상선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단숨에 자신의 몸을 화면에 날린 후 온몸으로 몸부림치는 그 작가에게 현실을 관통하기 이전에 토해낸 언어, 철학, 지식, 예술은 각자의 상황을 대변하고 핑계하는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선의 화면을 관통하고 있는 시선을 살펴보면 현실의 밀착을 지나 그것과 융화된 시선이고 나아가 일치된 몸짓이다. 대상으로 삼고, 고정시키고 있는 아이들은 자본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주체에 대한 망각이며, 개별성의 상실이다. 도시화의 이면에 드리워진 그늘이며, 치밀한 권력 망에 의해 조정되어지는 시스템을 거부하는 인간들(兒孩)이다. 이 부분에서 다시 식민지 구조를 투시하고 해체한 시인 이상을 환기할 수 있으며,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널리 투사되고 상찬되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이상선의 작품은 바로 이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의 소산이며, 잡혀지지 않고 다가설 수 없는 것들이며,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의 끊임없는 탈주의 감행에서 얻어진 결과들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작가가 있다. 인정할 수 없는 것들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작가, 인정해야 할 것을 부정하는 작가. 어떤 작가가 우위에 있는가, 이 문제는 중요치 않을 것 같다. 다만 이 두 유형의 작가 모두 어떠한 경우에도 관념과 삶은 분리될 수 없으며, 아슬아슬한 선상에서 몸으로 부딪치는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철저한 실패를 경험하고 이를 통해 자각케 하는 것. 그런 측면에서 이 두 종류의 작가는 한 몸이다. 어떤 더듬이, 어떤 기관으로 현실을 감각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오직 그 작가의 흔적으로의 현실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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