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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전시회>
는 겉으로 보기에 텅 빈 공간이지만, 관객의 탐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는 긍정의 공간이다. 예술가들은 일상생활의 소리, 미세한 물건, 빛과 그림자를 통해 생활 중에 경시된 존재를 제시한다.
-야창신문 편집장 페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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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전시회> 는 볼 수 있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볼 수 없던 것은 드러낸다. 이를테면, 그냥 보기에도 조그마한 점토 인형을 예기치 않는 장소에 숨겨 설치하는 함진이나 하얀 벽 한 켠에 무심한 듯 희미하게 그려진 장다리의 낙서화는 주의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구상화의 높은 인기에 밀려 중국에서 그 동안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던 사운드 아트과 같은 비주류 예술 영역은 당당히 그 존재감을 드러내나 역시 시각적인 것은 아니다. 보이지>
이러한 ‘보이지 않음’은 시각중심주의(Ocularcentrism)의 수사학-장관(spectacle), 기념비성(monumentality), 엿보기 욕망(voyeurism)-을 의문시하는 미적 다양성의 분출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전시장은 어떠한 장관이 연출되지 않은, 말 그대로 텅 빈 공간이다. 이러한 고즈넉함은 사회적 리얼리티나 예술가의 내적 심상을 시각적으로 암시한 수많은 은유(metaphor)들로 뒤덮여 있는 중국 현대 미술 공간의 풍경과는 자못 어울리지 않는다. 포스터는 붙여 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전시장의 모순적 상황은 마치 불의의 사고로 전시회가 취소된 인상을 주어 관람자가 당혹감과 실망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개중에는 굴하지 않고 적극적인 탐구를 지속하여 작품을 발견하는 순간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는 관람자도 있지 않을까.
<보이지 않는 전시회>
의 전시 공간은 시각중심적 사고에 의하면 스펙터클이 부재한 부정의 공간이지만, 그 반대 지점, 즉 시각적이더라도 드러내지 않는 방식이라든지 아예 전혀 다른 감각(촉각이나 청각)을 통해서 관객의 탐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는 긍정의 공간이다. 어떠한 강조점이나 기복이 없이 균일함을 갖춘 전시장은 더 이상 기념비적 스케일과 영웅적 수사학으로 무장된 화이트 큐브(white cube)가 그런 것처럼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 그저 자유롭게 시선이 가는 대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친밀한 공간이다.
관람객의 자유 의지와 그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탐구하는 이번 전시회의 작가들은 그만큼 다양한 미학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하찮은 일상에 대한 관심을 유머 있게 환기시키는 중국 최초의 낙서화가 장다리와 함진, 인터렉티브 미디어(Interactive media)라는 기술의 도움을 통해 역설적으로 관객과의 감성 교류를 증대시키는 고창선과 김동호, 장소특정적 예술(specific art) 정신에 따라 일상 공간을 재조명하는 오순미, 음향이나 음성을 통해 인간 감성의 깊이를 탐구하는 류한길, 앤준 츄윈이 바로 그들이다.
이 밖에도 전시의 독특성은 또 있다. 작품을 발견하는 관람 재미를 보물찾기의 체험으로 치환시키는 픽토그램(pictogram) 책자가 준비되어 있으며, 개막식 날에는 사운드 예술가들의 공연이 부대행사로 준비되어 있다. 보는 것이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이 아니라, 믿는 만큼 보고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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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가현(전시기획자, 현대미술사 전공)
참여작가: 고창선, 김동호, 류한길, 오순미, 함진(KOREA)
Chu Yun , Zhang Da L(大力), Yan Jun -CHINA
오프닝 부대행사: 류한길& Yan Jun 사운드 아트 퍼포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