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여름 비가 내리는 등산로' 먼 옛날 농촌 마을에는 여름 비가 내리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차라리 이때 늘어지게 자는 게 낫다고 붙인 순우리말이 '잠비'이다. 엎어진 김에 쉬어가자는 조상님의 지혜인가 보다.
한 시간째 째려봤다. 아무렇게나 뻗어있는 것 같아 보여도 분명히 규칙이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매끈한 표면에 갑자기 구멍을 뚫고 새 가지가 난다. 이걸 옹이라고 하나? 꼭 그렇게 가지 중간에 터진 자국이 있고, 그 안에 누가 새 걸 꼽은 것처럼 자란다. 어떤 건 가지로 쭉쭉 뻗어나가지만 어떤 건 뭉툭하게 마침표를 맺으며 갈림길을 만든다. 이 많은 옹이들 중에 더 이상 가지가 뻗지 않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무슨 차이인지, 옹이가 가지를 따라 나선형으로 돌아 나는 건지, 옹이의 간격은 누가 정하는 건지. 답해주지 않는다. 직접 알아내야 한다. 나무의 갈퀴손에 빗긴 구름이 수없이 흘러갔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 분명히 답은 어딘가에 있을 텐데. 똑같이 막막한 상황이어도 애매한 확신이 남아있을 때 더 안달 나는 것 같다. 잔가지들의 섬세한 원근감이 몹시 탐난다. 태초의 지구에서 풀이 수천 년을 버텨 나무가 됐다던데. 외떡잎. 쌍떡잎. 뭐, 잎의 성장 방향이 돌아서 나냐 아니냐 뭐 그런 거랑 비슷한 원리일까? 초등학교 과학시간에 조금 더 집중할걸. 구시렁대며 누워있던 등산로 벤치에서 일어나자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 안으로 바람이 한껏 일었다. 그 덕에 감지 않은 머리 냄새가 훅 끼쳤다.
퇴사한 후 병원에서 번아웃 진단을 받았다. 20대 끝자락에 여름비가 죽죽 내려댔다.
'why so serious BLACK?' 뒤늦게 재봤다. 내 한 뼘은 16cm이다. 차곡차곡 눌러 쓴 필기처럼 살고픈 마음과 다르게 그간 빠르고 정신없기만 했던 것 같다. 번(Burn) 아웃이라니. 스스로를 무엇에 불태운 걸까. 뭐라도 주워 담지 않으면 모든 게 그냥 지나칠 것 같았다. 그래서 무작정 그렸다. 언제 어디서든 구하기 쉬운 재료로. 전시작이 모두 16cm인 건 아니지만. 당시 주어진 환경에서 부릴 수 있는 욕심이 딱 그 정도였던 것 같다. 궁금한 걸 알기 위해 채집한 나뭇가지와 뿌리째 뽑은 명아주, 자연 배경사진을 콜라주 해서 그리는 게 전부였는데 시간이 지나 점점 살이 붙었다.
왜 하필 소묘냐는 질문을 많이 듣는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러하듯 좋아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집에서 키우는 동물보단 야생의 식물을 선호한다. 생각이나 상황이 정리되지 않았는데 말 걸지 않아서 좋다. 빽빽하게 심어진 나무 아래를 지나갈 때. 어둠이 싸늘하게 밀착하면서 빛에 지친 안구를 뻐근하게 누르는 감각이 좋다. 산이 좋다.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우직하게 기다려주는 뿌리와 숲을 존경한다. 그래서 조용한 것을 동경한다. 단정한 흑백사진, 백색소음, 침묵마저 편한 사이, 기승전결이 평평한 슬로 무비, 시야가 지평선까지 내달리는 허허벌판, 지는 해의 임종을 지키며 반짝이는 잎사귀처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정적을 동경한다. 보통 사람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걸 동경한다. 그래서 소묘를 그렸다.
번아웃 발병률은 보통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가장 높다. 의사선생님께 처방받은 것은 약간의 약과 햇빛을 보며 산책하기, 30분 내외의 운동, 제때 밥 먹기, 수면시간 충분히 지키기였다. 듣다 보니 서글퍼졌다. '정신질환은 삶에서 기본적으로 누려야 하는 것을 지킬 수 없을 때 생기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01 : 뼘 소묘전'을 통해 어디서든 1인분 이상의 마음고생을하는 모두를 위로하고 싶다. 이 전시의 홍보영상 시리즈는 흑백 슬로 무비이다. 색이 빈자리를 소리로 채우기 위해, ASMR 마이크를 사용하여 샤프 소리를 생생하게 담았다. 또 쿠키영상을 통해 각각 인스타 핫플레이스 탐방, 인형 만들기, 디퓨져 만들 기 등, 일상에 치이면서 '언젠간 해야지'하고 미뤄왔던 것과 숙면, 기상, 햇빛 보기와 같이 건강한 일상으로 채웠다. 이렇듯 '01 : 뼘 소묘전'은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는 형형색색의 세상에서 제한된 자유를 선사한다.
'한 뼘짜리 자신감, 무엇으로부터' 노력만큼 결과가 꼭 돌아오지도, 계획만큼 생각대로 착착 흘러가지도 않는다. 그래서 도박이 아닌 삶, 임기응변이 아닌 삶은 없다. 이 우거진 터널 끝 어딘가에 내 고향이 있으리라. 애매한 확신을 손에 쥐고서 어제 걷던 길을 오늘도 내일도 걷는다. 타향살이 월세 비용은 나와 상관없다는 듯 쳐졌던 몸도, 필요했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등져야 했던 나날들도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앞으로 떳떳하게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그래서 딱 할 수 있는 만큼 꾸준할 뿐이다. 습도에 맞춰 바랜 종이와 명도만 남은 세상에서 잊고 있던 가치를 되새긴다. 여기서 당신의 한 뼘도 찾아가길 바라며. 잠비로부터.
01 : 뼘 소묘전
박잠비
일러스트
한뼘짜리 낙서
2022.05.12(목) ~ 2022.05.14(토)
12:00~19:00
무료관람
연령제한없음
어반플루토 갤러리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로 22나길 3-2 2층(양평동5가)
9호선 선유도역 2번 출구에서 1~2분 거리
본 건물에는 주차공간이 없습니다.
인근 유료 주차장을 이용해 주세요.
- 코오롱디지털타워(30분 1,500원/도보 5분 거리/8~22시 운영)
- IS비즈타워(10분 500원/도보 7분 거리/24시간 운영)
해당 주차장들의 운영방침은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 사전에 확인 후 이용해주세요.
9호선 선유도역 2번출구
일반 열차를 이용, 급행은 정차하지 않아요.
선유도공원, 여의도공원, 여의도샛강생태공원, 밤섬 생태경관 보전지역, 한강시민공원 여의도지구(여의도한강공원), 한강시민공원 양화지구(양화한강공원), 서울색공원, 한강유람선, 63스퀘어, 63씨월드, 양화교 인공폭포, 자매공원(앙카라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