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리트가 유클리드를 만났을 때 ● ‘만남’이란 단어가 주는 첫 느낌은 ‘설레임’이다. 만남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탐색, 나눔, 개입, 충돌, 화해, 절충, 발전 등의 과정을 통해 예측할 수 없었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생산해내며, 이로 인해 또 다른 역사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우리의 무의식을 계속 여행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 〈유클리드의 산책(where euclid walked)〉은 르네 마그리트의 1955년 작품 제목에서 인용한 타이틀로, 수학의 공리에 반대되는 패러독스를 시각화하여 인식의 전환을 모색했던 초현실주의 거장의 태도에 대한 경의에서 출발한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이며 기하학의 대성자인 유클리드는 평행하는 두 선을 아무리 연장해도 절대 만나지 않는다는 정의를 내렸다. 이에 대해 마그리트는 작품 속에서 원근법에 의해 결국 만나게 되는 길을 유클리드와 함께 걸으며, 당연시 받아들이던 고립된 상황의 논리를 예술가의 상상력으로 전복시키고 인식의 한계에 도전한다. 이러한 ‘마그리트와 유클리드의 만남’은 과거로의 시간 이동, 수학과 미술의 학제 간 교류, 사실(fact)과 허구(fiction) 사이의 경계 허물기 등 포스트모던 시대 혼성hybrid의 풍경을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전시는 마그리트가 유클리드에게 말을 걸 듯, ‘예술적 상상’이라는 아티스트의 특권에 의한 개입으로 20세기 후반부터 서로 다른 분야 또는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배경으로 한 상호교류, 협업, 연계를 통해 가치를 재발견하고 영역을 확장시켜 온 동시대 미술가들의 다양한 작업태도들을 조망해보고자 기획되었다. 또한 이동성(mobility)과 디지털 네트워크의 발달로 동시대 다문화가 충돌하고 연결되는 과정의 부산물로 생성되는 ‘혼성(hybridity)'을 배경으로, 주변과 도시공간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변화시켜온 예술가들의 역할에 주목한다. 이는 단순히 특정 장소에 대한 작가의 개입이나 정치적 변화를 위한 제스처가 아닌 일상적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형성되며 재발견되는 가치관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예술적 개입에 의해 서로 다른 가치들이 연결되거나 더해지는 것은 예측 가능한 수학적 고정값이 아닌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무한대의 결과물과 시너지를 창출한다. ● 이와 같이, 이번 전시 〈유클리드의 산책(where euclid walked)〉은 인간 상호관계와 인터렉션에 의해 사회적, 정치적 요소들을 재발견해 나가는 동시대 미술가들의 다양한 작업 태도를 통해 우리의 문화정체성을 확인하고, 그 고유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뜻 깊은 기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culture + culture : 이동하는 예술가 ● “경계란 어떤 것이 존재하기를 멈추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 인들이 지적했듯이 어떤 것이 존재하기를 시작하는 지점이다.” - 마틴 하이데거, 『집짓기, 살기, 생각하기』 호미 바바(homi k. bhabba)는 그의 저서 『문화의 위치』에서 창조적인 발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문화와 문화 사이의 틈새에서 나타나는 중재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고정된 지점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인 ‘접촉지대(contact-zone)'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공간으로, 이역과 이질문화가 시작되는 조건이 된다. 타향성의 삶을 추구하는 동시대 미술가들은 타 문화권으로의 이주, 여행 등을 통해 삶의 근거지를 옮겨가며 낯선 문화의 타자, 이방인으로서 다양한 커뮤니티와 교류하여 특수한 문화 정체성을 형성한다. 디지털 네트워크가 무한대로 확대되어 가고 있는 21세기 유비쿼터스 시대에 문화의 이동성(mobility)은 더욱 심화되어 지역, 인종, 이념, 심지어 종교의 영역이 혼합되며 물리적, 공간적 경계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한 접촉지대에서 작업하는 작가의 모습은 의외의 간섭자이자 다른 문명의 전달자로서 역할하며, 행위의 '과정(process)'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다자간 혼합은 예술가들 각자가 지닌 고유의 관점과 개인의 역사, 기억에 의해 혼성의 방향이 중재되며 특이성을 갖게 된다. 이 섹션에 선보이는 작가들은 동시대 다이아스포릭 삶의 형태, 그리고 최근 레지던스 프로그램 등을 통해 이동하며 글로벌리즘에 따른 문화적 역동성, 새로운 형태의 이동성, 다양한 영향들로부터 형성되는 새로운 지역성을 탐구한다. 2개 이상의 문화를 걸치며 이주하는 예술가들에 의한 작업은 기존의 가치에 개입하고 일시적이며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그들의 작업실은 전 세계인 것이다.
digital + analogue : 이데아를 향한 욕망 ● 이러한 글로벌리즘과 이동성(mobility)에 따른 영향은 항상 양가적이라 할 수 있다. 무한한 가능성으로 발현되는 크로스오버 형식의 예술형태와 시너지, 다문화의 혼합(mixture), 혼성으로 인한 새로운 가치의 발견 등 생산적 요소가 긍정적으로 드러남과 동시에, 특정 문화의 고유한 ‘진정성(authenticity)'이 평가절하 되거나 의식 속에서 사라지게 될 우려가 가시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관념에서 몸으로 돌아오려는 의지의 발현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즉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더욱 완전한 시뮬라크르의 세계에 도달하게 되었지만 그럴수록 인간은 몸의 체험에 의한 진정한 현실세계에 대한 갈망이 깊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상대적인 의미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양존해 있다. 디지털 네트워크로 대변되는 비선형구조는 개인의 선택에 의한 수많은 가능성을 바탕으로 변형과 생성, 반복, 순환, 발전을 거듭하며 ‘가상'이라는 차가운 망망대해를 지나왔다. 신체적 온기를 그리워하면서도 익명의 편리함에 물리적 접촉을 거부해온 현대인들에게 육체의 직접성과 자연의 생명력, 그 지속의 감정은 두려운 대상인 만큼, 기대와 욕망의 원천이다. 이번 섹션에서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만연한 노마드적 환경 속에서 동시대미술 흐름의 전환점을 모색할 수 있는 진정성의 가치를 제고하고, 전통적이거나 아날로그적인 복제와 재생산을 통해 시대성을 발현하며 동시에 독특성을 구현하고 있는 작업들을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