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화의 방법과 근작의 세계
+ 기간 ; 2007.5.2 ~ 2007.5.20
+ 장소 ; 갤러리 현대
+ 문의 ; (02)734-6111~3
FAX 734-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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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의 구조와 깊이의 차원
모노크롬, 또는 단색파란 어떤 일정한 동일 색에 의해 뒤덮인 화면을 가리키는 것이자 그러한 경향의 집단을 지칭한 것이었다. 70 년대 후반부터 80 년대 초반에 걸친 시점에 우리 현대미술 속에 분포된 특징적인 현상으로서 모노크롬 또는 단색파란 말이 널리 유포되었다. 우리 자신보다 일본이라는 타자에 의해 진작된 느낌이 다분하다. 오늘날 영화, 대중음악 분야에서 한류란 바람이 거세게 일어난 것과는 비견되지 않지만 한국의 현대미술이 그때만큼 일본에 적극적으로 소개되고 관심의 초점이 된 적도 일찍이 없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역에서의 관심은 자신들 속에는 없는, 또는 국제 보편적인 미의식과도 연계되지 않는 독특함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단색은 굳이 어떤 하나의 색채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백색 톤의 단색이 가장 많은 분포를 차지했고 그래서 단색파라는 명칭 이외에도 백색파란 명칭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백색은 일본을 비롯하여 중국 등 동양 삼국 가운데 유독 한국인들에게 선호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한국인들과 백색의 관계는 특별한 것으로 인지되고 있는 터이다. 일본의 한 평론가는 백색을 색의 개념이 아닌 한국인만이 지니는 독특한 정서로 이해하려고 하였다.
정상화는 50 년대 후반부터 60 년대에 걸친 현대미술 운동의 중심에 있었으며 실험과 도전의 시기를 그의 동료들과 같이 보내었다. 이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그는 한동안 한국화단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일본과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자신의 작업에만 몰두하였다. 해외에서의 작업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자성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과 자신이 나가야할 길에 대해 깊은 숙고를 할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를 가졌던 셈이다.
그의 작업이 다시 한국에 선보이기 시작한 것은 80 년대에 들어오면서이다. 그의 작업은 그러나 기묘하게도 50, 60 년대를 통해 미술운동을 함께 한 그의 적지 않은 동료들의 작업과 이념적인 측면에서 닮은 점이 적지 않았다. 그 역시 단색의 작업을 추진해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화면은 어느 일정한 하나의 색채에 구애되지는 않았다. 흑과 백 그리고 청과 다크 브라운 등 비교적 제한된 색채이긴 하나 다른 작가들에 비해선 다양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일정한 색채에 구애되지 않다는 것은 모노톤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다른 작가들과는 그 유형을 달리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단색파니 백색파니 하는 일정한 패턴의 작업 형식과는 애초에 다른 방법의 전개임을 인지시키고 있다.
그의 화면은 결과적으로 동일한 색채에 뒤덮인 표면이긴 하나 그것이 덮여지기까지의 과정이 더욱 문제가 된다는 점이다. 화면은 동일한 색채의 표면으로 전면화 되지만 동시에 표면 자체가 무수한 작은 표면들의 결집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보다 복잡한 구조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바둑판과 같은 작은 그리드의 반복에 의해 전면화에로 확장되어가는 화면은 일종의 통일 속에서의 다양성을 함축하고 있는 인상이다.
화면에는 넓이와 깊이의 두 개의 차원이 만드는 직조의 내밀한 구성이 팽팽한 인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작은 면들은 일정한 색채의 덧칠에 의해 층을 만들고 그것은 전체적으로 화면의 텍스추어를 대신하면서 표면의 결을 확장시켜간다. 그의 작업은 단순히 걷어내고 다시 발라 올리는 무의미한 반복 작업이 아니라 직물을 짜나가듯 섬세한 호흡의 상호작용, 즉 행위와 물질의 만남의 상호작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언제나 진행 가운데 자립하고 완성 속에서 진행을 꿈꾸는 것이 된다. 그의 작업이 유형으로서의 단색과는 다른 것은 평면이면서 동시에 구조적 특징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최근작 가운데는 유독 청색의 모노톤이 많은 편이다. 물론 청색의 모노톤이 갑작스레 등장한 것은 아니다. 흑과 백, 그리고 브라운계통의 모노톤과 더불어 청색 역시 지속적으로 다루어진 것이다. 청은 전면화된 모노톤의 것이 있는가 하면 흰색에서 점차로 푸른색으로 진행되어가는 일종의 그라이데이션의 변화된 화면도 보이고 있다. 마치 새벽이 오듯이 어느 한 곳이 밝아오는 인상의 화면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청색은 자연과의 교감에서 오는 어떤 특별한 인상의 기록임이 분명하다. 그가 나고 자란 영덕과 마산 앞 바다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인가.
청색은 항상 깊이를 동반한다. 깊이의 차원을 이야기할 때 청색을 떠올리게 된다. 끝없는 창공의 깊이는 어슴푸레 하면서도 점점 깊어지는 청색으로 함몰된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대양의 짙은 청색은 경외감과 신비로움으로 우리를 설레게 한다. 그러기에 청색은 이 지상의 색이 아니다. 언제나 저쪽에 있는 색이며 항상 저쪽의 차원을 지닌다. 그가 보여주는 청색의 모노크롬도 알 수 없는 깊이의 심원으로 우리를 손짓한다.
오 광수 ( 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