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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행복한 만화, 행복한 눈물 리히텐 슈타인

2011-09-07


리히텐 슈타인, 그의 이름은 차라리 행복한 눈물의 작가라고 하면 훨씬 더 다가온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말이다. 맨해튼의 중산층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맨해튼의 소년들을 위한 프랭클린 학교에 등록, 중등교육을 받았다. 미술이 학교의 커리큘럼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리히텐슈타인은 처음에 취미로 미술과 디자인에 흥미를 보였다.

글 | 미술평론가 김종근


그는 뉴욕의 Art Students League의 써머 스쿨에서 지도를 받고 뉴욕을 떠나 작업이 가능한 순수미술의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 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1년 리히텐슈타인은 뉴욕 Carlebach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지만, 그는 유리 세공사로써 일과 그리기를 병행하였다. 이 시기에 그의 그림은 입체파와 표현주의를 넘나들었고 1957년 뉴욕으로 돌아와서는 추상표현주의 스타일을 받아 들였다.

1960년 그는 알랭 카프로우에게 큰 영향을 받았는데 이러한 환경은 초기 팝 이미지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재점화 시키는 아주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다.


1961경부터는 만화에 관심을 돌려 그만의 독자적 스타일의 만화를 확대 시킨 작품들을 제작 하였다. 그의 이런 스타일은 일상용품과 만화, 광고 등 기성 이미지를 제재로 하는 점에서 반 예술 계열로 보이지만 그의 작업은 테마나 기법에서 회화형식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팝아트의 진보된 형태로 평가되었다.

대표적인 이미지들이 1961년부터 뽀빠이나 도널드 덕 미키마우스와 같은 이미지를 활용하면서 그는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리히텐슈타인이 처음으로 현대 대중문화를 소스로 사용하여 그린 그림은 만화가 아니라 그가 아이들에게 얻은 풍선껌 포장지였다.

1961년 후반 리히텐슈타인은 작품에 이야기형식의 말풍선 그림을 끌어들였다.1964년에는 그림에 전념을 위해 교수직을 그만 두었고 1961년에서 1965년 사이 그는 만화책을 인용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그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 시기에 제작한 'Hopeless'(1963), 'Vicky'(1964), 'We Rose Up Slowly'(1964)는 말풍선과 망점 등에서 한 눈에 만화책의 한 장면임을 알 수 있는 작품들이다. 만화는 그에게 뚜렷한 검정색 테두리와 좁은 범위의 색상 선택 등의 특징을 남겨두었다. 만화는 이미지 저장창고의 기능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테크닉의 소스가 되었다.

195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작가들이 대중 매체의 메시지와 상품에 관심을 가졌는데 앤디워홀과 리히텐슈타인이 만화를 사용한 첫 팝아티스트가 되었다. 이후 풍경, 추상표현주의에서 아르데코의 의장 등으로 주제를 넓혀 자신의 스타일 가능성을 추구하기도 했다. 1970~1972년에는 자신의 조형언어만으로 성립된 추상적 『거울』 연작을 제작하였다. 그 후에는 미래파, 표현주의 등 20세기의 아방가르드(전위미술)의 작품들을 폭넓게 주제로 삼았다.

그의 잘 알려진 작품에 유채와 마그나 페인트를 사용하였고 그는 또한 두꺼운 테두리와 과감한 색깔 그리고 벤다이 점들로 더욱 유명 해졌다. 그는 “나는 내 작품이 만화책장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변형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것이 미술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그의 작품이 처음 나왔을 때 많은 비평가들은 그의 고유성에 대해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어떠한 시도도 없었다. 이런 비난에 대해서 인터뷰에서 때때로 비난 받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내비쳤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어떤 의구심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의심하게 만드는 비평에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1970-80년대 그의 스타일은 좀 더 느슨해지고 그가 해왔던 것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전 작품들의 요소를 보여주는“Artists Studios" 시리즈를 만들었는데 그 예로 'Look Micky'(1973)은 그의 예전의 5작품을 합친 것이다. 1970년대 후반에 스타일은 'Pow Wow'(1979)와 같이 좀 더 초현실적인 작품으로 대체 되었다.

회화 이외에도 그는 금속과 플라스틱으로 조각 작품을 하였고, 거기에는 'Lamp in St. Mary's'와 같은 주목할 만한 공공조각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리히텐슈타인은 그의 이미지들이 가능한 한 기계들이 만든 것처럼 보이기를 원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여전히 화가로 남길 바랬다.

앤디 워홀과 다르게 그는 작품의 기본으로 사진을 선택하거나 활용하지 않았다.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의 핵심은 대상을 단순화 시켜 현대 추상 미술의 시각적인 충격을 구현한다는 것이다.


언어와 시각적 이미지의 담화가 결합된 만화와 마티스의 명화 등의 텍스트 사용은 예술에 있어서 순수한 매체 사용이라는 압력에 저항할 뿐만 아니라 회화에 있어서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사이의 긴장감도 불러일으켰다. 리히텐슈타인은 주제별로 그룹을 나누어 작업을 하는 경향이 있었고 비평가들은 주로 그의 작품을 주제에 따라 분류했다.

어쨌든 리히텐슈타인의 작업은 현재까지 가장 뉴욕적이며 뉴욕을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질 만큼 뛰어난 아이디어와 색감의 구성 등으로 세계적인 아트 메카의 중심지 뉴욕을 문화에 대한 비쥬얼적인 임팩트를 자유롭게 표현해냈다. 그는 1997년에 뉴욕 대학 메디컬 센터에서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앤디워홀 이후 당대를 풍미했던 팝 아티스트 큰 별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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