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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열정노동의 시대, 그리고 이상한 제작

2011-05-09


김대중 정부가 문화산업과 IT라는 최첨단 산업을 육성하기로 마음을 먹은 이후, 청년들에게는 새롭고도 찬란한 길이 열리는 듯했다. 수많은 이들이 에반게리온이나 지브리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에 감화되어 문화산업을 지망하기 시작했고, 용산에는 독학으로 코딩이나 컴퓨터 조립을 배운 10대에서 20대 초반의 사장님들이 속속들이 등장했다. 영화계는 1000만 관객에 고무되어 짐을 싸들고 나타난 지망자들의 긴 행렬이 있었고, 리니지의 대박신화와 프로게이머의 등장은 세상에서 쓸데없기로는 1등 취급을 받던 게임을 일약 전도유망한 신흥산업으로 바꿔놓았다.

글│최태섭 칼럼니스트( curse13@nate.com)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이외에도 경제위기덕택에 불어 닥친 새 시대의 광풍에 맞춰 닻을 올린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배들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배들은 이 바람이 데려다 놓은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 좌초에 좌초를 거듭했다. 선장들은 배를 잃었고, 선원들은 넋을 잃었다. 그러나 정부와 대학에서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배를 띄우라고 권했다. 그 결과 우리들의 시대는 수많은 갈 곳 잃은 영혼들을 양산하게 되었다. ‘한 우물만 파라’는 말을 듣고 열심히 땅을 파 내려간 결과 물 대신에 암반층을 만나게 된 사람들은, 몇몇 특출 난 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온 썰렁한 지상에는 성의 없는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젊으니까 어떻게든 될 거야...^^’

오늘도 우리 주변(정확하게 말하면 나와 당신!)에는 ‘배워먹은 도둑질’이라는 천형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업계’의 주변을 배회하는 수많은 영혼들이 존재한다. 디자인 업계에 종사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깨달은 것은, 거기에 그 어떤 점도 으레 알려진 것처럼 화려하지도, 쉬크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갑느님’ 의 횡포, 박봉, 끝없는 야근, 그럼에도 넘쳐나는 취업희망자와 불안정한 고용.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만약 그것이 디자인업계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일찍부터 철이 들어서 공무원을 향한 길로 발을 돌린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우리들은 ‘하고 싶은 일’ 을 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살아왔다. 고등학교와 입시학원은 그런 우리에게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얘기했고, 그렇게 해서 들어간 대학은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해주겠노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우리가 과제와 이런저런 것들에 시달리며 전문화되어 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동안, 업계는 그것을 두 가지 의미로 쓸모 없는 것(하나는 이미 낡은 것이라서, 다른 하나는 그 정도의 지식도 필요 없을 만큼 단순한 작업만 필요해서)으로 폐기하면서 졸업생들을 좌절감에 빠트린다.

그래도 어떻게든 운이 좋게 제한된 형태의 기회(주로 비정규직, 단기계약직, 알바, 심지어는 인턴 같은)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발을 들인 업계에서 우리는 일종의 ‘선문답’을 경험하곤 한다. ‘제가 컨펌을 받지 못하고, 퇴근도 못하고, 임금도 받지 못하면서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네가 충분히 열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니라. 나 때는 말이다...’ 그 이후로 한참을 이어지는 옛날 얘기가 끝나고 ‘열심히 해.’ 라는 말을 남기며 사라지는 선배, 사장, 혹은 갑느님 같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문장이 아련하게 남고는 한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열정노동’ 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열정노동은 외환위기가 한국사회를 뒤엎어놓은 90년대 말의 암울한 분위기로부터 시작한다. 정부가 경제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문화산업과 벤처를 지목하면서, 이전에는 취미의 형태로만 존재하던 다양한 문화산업과 IT계열의 과업들이 직업으로 변한다. 일과 취미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아이들은 ‘ 하나만 잘해도 대학 간다’ 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힘썼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노동전선에 뛰어들게 되었을 때 이러한 노력은 ‘너는 하고 싶은 일을 하니 이 정도는 감수하라.’ 는 괴상한 족쇄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사회가 점점 먹고 살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하는 팍팍한 상황으로 몰려가면서 이 족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발에 등장했다. 오늘날 면접관과 인사담당자, 상사와 갑느님 들은 우리의 ‘열정’을 평가한다. 대체 어떻게? ‘얼마나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는가.’로 그 덕에 우리들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나’ 라는 이상한 자아가 창궐하고, 더 이상 나와 나를 바라보는 무언가가 구분되지 않을 때, 우리는 한국의 자본주의(가)를 먹여 살릴 완벽한 피착취자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은 내가 쓰는 것과 나의 상황이 구분되지 않는 모순 속에서 써 내려간 이야기들이다(그러니까 말하자면, 책이 나왔다는 얘기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어떤 대안이나 결론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아주 당연하게도 그것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오늘은 이와 관련해서 하나의 흥미로운 시도를 소개해보려 한다. 이름 하여 ‘사회적 제작’ 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이름을 달고 진행되고 있는 영화 한 편에 대해서다.

‘뉴타운컬쳐파티’는 음악에 대한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음악들이 울려 퍼지는 장소가 음악만큼이나 중요하다. ‘두리반’ 은 칼국수와 보쌈 같은 것을 팔던 홍대 앞의 평범한 밥집이었다. 그러나 한국사회를 뒤덮고 있는 재개발 공사장은 이 밥집에도 마수를 뻗친다. 두리반의 사장부부는 ‘투쟁’을 선언한다. 그리고 이들을 돕기 위해서 홍대에서 노래를 하는 인디(그러니까 집도 절도 없다는 의미에서의 인디)밴드들이 두리반에 합류한다. 그러나 두리반을 ‘돕기’ 위해 왔던 이들은, 얼마 안 가 자신들이 곧 두리반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마이너가 아니라 한국문화의 최전선을 달리고 있는 홍대에서, 그것 때문에 쫓겨나고 있는 철거민 같은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두리반을 돕기 위해 벌어진 ‘뉴타운컬쳐파티’라는 공연 이후, 이 인디들은 ‘자립음악생산자조합’이라는 괴뢰조직을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두리반과 자신들을 위한 싸움을 시작한다.

이 눈물겨운 분투기는 ‘사회적 제작’ 이라는 실험적인 제작방식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사회적 제작은 가령 이런 것이다. 당신이 ‘뉴타운컬쳐파티’라는 영화에 관심이 가고 이 영화를 보고 싶다면, 당장 ‘입금’을 하면 된다. 그 입금에는 옵션이 있다. 1번은 그 돈이 이 영화에 출연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곳에 쓰일 수 있도록 기부하는 것, 2번은 영화가 제작된 이후 수익이 난다면 100% 환급을 받는 것, 3번은 그 수익이 또 다른 ‘뉴타운컬쳐파티’를 만드는데 쓰일 수 있는 기금으로 조성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에서 나는 수익은 독립영화 제작 지원금으로 일부 출연되고, 철거민과 인권운동, 인디신을 위한 공공기부, 제작 스태프와 업체, 음악 저작권 등의 러닝 개런티에 사용된다. 그리고 이렇게 1년간 수익사업을 하고 나면 영화는 ‘공개라이선스’ 상태가 되어 누구나 볼 수 있는 영화가 된다.

‘결국 영화를 만들기 어려우니 돈을 내라는 이야기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 말이 맞다. 상업영화도 만들다 말고 엎어지는 것만 일 년에 수십 편인데, 독립영화는 오죽 하겠는가. 장비도 빌려야 하고, 비디오테이프도 사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적 제작은 나는 돈을 내고, 너는 영화를 만들고, 그걸 팔아서 부자가 되자는 얘기가 아니다. 이것은 영화라는 하나의 문화적 산물이 제작되는 전 과정을 ‘사회적’으로 진행하고, 그 과정에서 일을 한 사람들이 먹어야 할 정당한 밥을 먹여주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를 다시 사회로 돌려주자는 얘기다. 대박 아니면 쪽박이라는 문화산업의 강박적인 논리를 벗어나서 만들어져야 할 것들이 마음 놓고 만들어질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보자는 실험인 것이다.

이 시도가 성공할지, 실패로 돌아갈지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결국 우리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어디서든, 뭐라도 하는 수밖에 없다’는 다소 진리에 가까운 명제를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이 사회적 제작이 성공할 수 있다면, 이와 유사한 종류의 상황들을 디자인에서도, 지식노동에서도, 음악에서도 만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립디자이너생산조합’이라거나, ‘프리랜서글쟁이노동조합’같은 괴뢰조직이 늘어난다면, 글쎄, 놀라지 마시라. 아마 당신과 나의 삶도 조금씩은 더 나아질 수 있을지 모른다.

뉴타운컬쳐파티 공식홈페이지

기사의 내용은 본 매거진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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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잡지디자이너 과심은 여러분야에 관심은 많으나 노력은 부족함 디자인계에 정보를 알고싶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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