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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평범한 사물의 비범한 이야기

반이정 | 2014-01-06


평범한 사물에도 역사가 있다. 사람에게도 각각 다른 개인의 역사가 있듯이 사물도 마찬가지다. -역사라는 말이 거창해 보인다면, 사연이라 할 수도 있겠다- 여기 평범한 사물 100개의 비범한 사연 100가지가 있다.

어느 겨울, 노변에 버려진 코끼리 인형을 보면서 유기동물의 애처로움을 느끼게 된 미술평론가는 사물과의 교감에서 얻는 첫인상으로 정리되듯 불특정 사물에 관해 압축된 인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글쓰기의 대상은 각별하거나 희소한 것이 아닌 주변에 있는 사물과 현상들이었다. 평범한 사물을 예술품과 대등하게 바라보면서 쓴 글들과 추가 몇 개의 사물을 더해 총 100개의 사물에 대한 이야기를 한 권으로 엮은 『사물 판독기』를 만나보자.

글│구선아 객원기자( dewriting@naver.com))
자료제공│세미콜론


『사물 판독기』는 500~600자 정도의 짧은 호흡으로 예술 작품 또는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가 함께 구성된 책이다. SNS가 의사소통의 플랫폼으로 자리 잡은 요즘, 이 책은 사진과 짧은 텍스틀 구성해 그리 무겁지 않고 유쾌하게 저자의 생각을 만나게 해준다. 사실 짧은 글쓰기가 긴 글쓰기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다. 꼭 필요한 단어만으로 메시지를 압축해 간결하지만, 맥락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500~600자면 원고지 2.5~3매 정도인데 이런 단문의 비평글을 쓰는 일은 흔치 않다. 이 책은 기존 출판물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든 시각 에세이물이다. 또한 일반적인 미술 칼럼집이나 삽화나 사진을 곁들인 에세이와도 변별력을 갖는다. 저자의 단상이나 일기 형식이 아닌 글쓰기 주제가 명확하고, 그에 대한 해석도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을 구상한 원점은 오만 사물에 대한 진중한 명상과 순발력 있는 농담의 중간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해석의 심오함에 빠지진 않되, 상식적 해석보단 한 발짝 앞지르자는 심정이랄까요.”
- 서문 중에서


표지는 작가 윤정미의 ‘핑크 프로젝트-서우와 서우의 핑크색 물건들(2005)’과 ‘블루 프로젝트-승혁과 승혁의 파란색 물건들(2007)’이 나란히 앞, 뒤를 장식하고 있다. 여자아이의 핑크색 소지품과 남자아이의 파란색 소지품을 한데 모은 이 작품은 평범한 사물과 색채의 분류를 통해 어떻게 사회화가 일어나는지 또는 어떤 관습이 형성되는지 혹은 누가 진짜 색채의 선택 주체자인지를 자명하게 드러낸다. 방 안 가득히 정렬해 놓은 여자아이, 남자아이 사물은 100개의 사물에 대한 이야기 중 색깔론에 삽입된 글이기도 하거니와 저자의 촌평을 환기하는 시각적 출입구이기도 하다.

이처럼 저자는 글쓰기 주제와 함께 실을 이미지를 평범한 사물의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생각보다 평범한 사물을 주제로 설치와 회화작품이 많다는 것을 알고 같은 주제의 현대미술 작품을 함께 실었다. 미술 비평서는 아니지만 이 작품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어떤 것은 실제 사물을 찍은 사진인지, 작품인지 헷갈리는 것도 있다. 사실 이게 현대미술의 포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삶이 미술로 들어오고 미술이 삶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을 보면서, ‘과연 삶에서 독립된 미적 정서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사물 판독기』는 미술 비평서나 현대미술에 대해 어려워하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현대미술을 한층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소통의 방식을 바꾸기만 해도 대상이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책이다.

100개의 사물은 각각 ‘미물 예찬’, ‘키치’, ‘공간 읽기’, ‘섹스 섹스 섹스’, ‘색깔론’, ‘미신들’ 등 6개의 카테고리로 나뉘어 자신의 사연을 나누고 총평격인 댓글로 마무리된다. 라면, 검정 비닐봉지, 우산처럼 흔한 사물부터 주차장, 도서관, 헌책방, 횡단보도와 같이 공공공간과 여고생 교복, 콘돔, 모텔 내부, 핀업걸과 같이 섹시한 우리의 성문화의 일면까지 다양하다. 저자는 우리 주변에는 널려있지만 그 사물의 ‘용도’ 외에는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일상 사물들을 글쓰기 대상으로 한다. 그 사물들이 가진 나름대로의 사연을 들어보려 한 것이다.

그중 ‘삼선 슬리퍼’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직장에서, 기숙사에서 어디에서건 우리는 일명 삼디다스 슬리퍼를 만난다. 독특한 디자인의 제품이 나와도 결국 삼디다스 슬리퍼를 신는 사람들을 보면서 ‘좀 딴 거 없어?’라고 저자는 묻는다. ‘웃음’도 눈여겨 볼 소재다. 우리 사회는 웃음을 강조한다. 아니, 강요한다. 건강을 위해서 혹은 상대방을 위해서 해야만 한다고들 하지만 과연 감정노동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억지웃음이 얼마만큼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을 표현한다. 그리고 ‘청테이프’와 ‘검은 비닐봉지’ 둥 너무 흔해 인식하지 못하는 사물들을 설치 미술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도 이야기해준다.

저자는 글을 쓸 때마다 소재로 정한 사물을 두고 약 1시간여 명상하면서 짧은 지면을 채우는 일을 반복했다고 한다. 평범한 사물 하나를 두고 1시간씩 그 사물만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비평이나 해석이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한 추억이나 기억이라도 좋다. 지금 한번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고 평범해서 소중히 다루지 않았던 사물들을 생각해보자. 그 사물도 나름대로의 사연은 물론이거니와 나와의 관계도 분명 맺고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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