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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나는 한 마리 개미

주잉춘 그림 | 저우쭝웨이 글 | 2011-08-26



최근 중국사회에 ‘개미족’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로 치면 ‘88만원 세대’와 의미가 상통하는 말로 고학력임에도 일자리를 얻지 못하거나 비정규직으로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지칭한다. 이 개미족이란 말의 시초가 된 책이 있다. 세계적인 아티스트 주잉춘이 디자인하고 난징 사범대 교수, 저우쭝웨이가 글을 쓴 ‘나는 한 마리 개미’. 작고 힘없는 한 마리의 개미가 세상에 나와 벌이는 좌충우돌 고군분투를 담은 한편의 우화인 이 책은 험난한 세상에 힘없이 놓여진 작금의 젊은이들의 슬픈 자화상이자 작은 희망을 이야기한다.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자료제공 | 도서출판 펜타그램

개미로 투영되는 나약한 인간의 삶
최근 신문의 경제란을 보면 일반투자자를 가리켜 ‘개미’라고 표현하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전체가 모이면 무시 못할 힘이지만 개개인으로는 한없이 약자라는 의미다. 이처럼 ‘개미’는 약자들의 무리를 지칭할 때 자주 인용되는 곤충이다. 실제의 개미가 그렇듯 말이다. 이 책의 주인공 역시 힘없는 한 마리의 개미다. 다른 개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안전한 무리에서 벗어나 홀로 세상 밖으로 나가는 모험을 감행한다는 점이다. 정오의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는 세상이지만 홀로 나온 개미에게 그곳은 외롭고 두려운 곳일 뿐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책의 내용은 흡사 준비도 없이 사회에 덩그러니 던져지게 되는 현 중국의 청년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고도성장을 달리며 세계의 패권을 노리고 있는 중국사회이지만, 그 빛의 이면에는 ‘개미족’이라는 우울한 삶의 초상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세계대국 중국의 사회는 주인공 개미가 느낀 것처럼 오히려 두려움 그 자체로 다가온다.

책의 이야기는 주인공 개미의 독백형식으로 이어진다. 약자를 보호해주지 않는 세상 속에서 펼쳐지는 개미의 파란만장한 모험, 그리고 도달하는 깨달음의 이야기는 바로 ‘개미족’ 뿐만 아닌 모든 인간들의 삶이다. 세상에 비해 보잘 것 없이 작은 한 인간이 살아가는 인생도 개미 못지않게 치열하고, 파란만장할 테니까 말이다. 개미의 독백에 조금만 귀를 기울여 보면, 똑같은 생명체로서 그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겨울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면서 점점 더 많은 생명이 스러져 갔다. 한때 힘을 뽐내던 덩치들도, 가녀리고 힘 못 쓰던 이들도, 지금 이 시간만큼은 모두 똑같이 평등하고 똑같이 조용하다.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죽음 앞에서 자연은 가장 공평하며, 그런 만큼 생명을 거둬 가는 자연의 힘에는 감히 맞설 수 없다는 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가면 안 된다고 붙들 게 아니라, 아직 숨어 붙어 있는 동안을 소중히 여겨야지……." (본문 98쪽)

비움의 철학, 명상의 여백
사실 책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이건 뭐지?’ 이다. 띠지가 없었다면 제목조차 알 수 없었을 표지에는 글씨 한자 없이 검은 점 다섯 개만 놓여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점들이 바로 개미다. 책의 가장 중요한 표지에 덩그러니 개미 다섯 마리만 올려 놓았다니, 그 파격성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 띠지 조차 표지에는 꼭 글자가 있어야 한다는 중국 ‘신문출판국’의 경고 때문이었다니 과연 팔려고 내놓은 책인지 조차 의심스럽기까지 한다. 내지로 들어가면 더욱 의아스럽다. 본문의 글은 모두 왼쪽 페이지 아래 아주 작은 크기로 몇 줄 누워있고, 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개미는 숨바꼭질 하듯 잘 보이지 않는다. 거의 모든 페이지의 대부분은 여백으로 안배되어 있어, 비싼 값을 주고 책을 구매한 입장에서 보면 불만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책을 찬찬히 넘기다 보면 어느 새 불만은 사라지고, 여백의 의미에 대해 곱씹게 된다. 사실 여백, 즉 비움은 동양사상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철학이 아닌가. 이 책도 마찬가지로 여백은 그냥 비어있는 것이 아닌 독자들의 생각을 담는 철학적 그릇인 셈이다. 힘없는 개미의 여행을 좇아 다니다 보면 현실의 우리 자신과 개미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을 깨닫게 됨과 동시에 여백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다 주는 매개체가 된다. 한 페이지를 넘기는데 있어, 개미를 따라가며 단 몇 줄의 이야기를 읽는 찰나의 시간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빈 공간을 보며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지은이는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을 페이지 여백에 글로 끄적거리거나 그림으로 표현해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여백에 덧붙여진 또 하나의 의미는 바로 우리네 세상 그 자체라는 것이다. 여백 공간에 현실의 풍경을 그려 넣는다고 생각해보면, 페이지의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개미에게 그것은 인간이 지배하는 진짜 세상의 모습으로 비춰질 것이다. 돌려 말하면, 세속적인 세상이 표백되어지는 명상적 의미를 여백으로 표현한 것으로, 책 속의 개미가 그쪽 세상의 힘없는 자아라면, 진짜 세상의 개미는 바로 우리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중국 출판물의 오해를 뒤집다
중국의 문화예술은 불과 10여 년 전만해도 세련되지 못하고, 질이 낮다는 인식으로 다가왔었다. 그러나 고도의 경제적, 사회적 성장과 함께 현재의 중국 문화예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빠르게 성숙되고 있다. ‘나는 한 마리 개미’는 그 중에서도 중국 북디자인이 이미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해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미 2007년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2008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수상으로 그 말이 결코 허세가 아님을 증명하기도 했다. 심플하면서 우아한 이미지와 파격적인 구성, 그리고 함축적인 글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책의 디자인은 아직도 중국 출판물이 조악하거나 베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오해를 명쾌하게 뒤집으며, 현재 중국 북디자인의 경쟁력 있는 현주소를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가 되고 있다.

‘나는 한 마리 개미’는 중국 출판 당시 찬란한 성장 속 버려진 젊은 세대의 그늘이라는 사회적 이슈와 맞물려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의 개미족처럼 ‘88만원 세대’라는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국내 독자들에게 이 책은 과연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될까. 아마도 보는 이들마다 서로 다른 다양한 해석과 철학이 쏟아져 나오게 되진 않을까. 책의 광활한 여백을 채우는 것은 바로 독자 스스로의 몫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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