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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어느 즐거운 날의 뒤안

2008-07-22


“이걸 왜 찍었어?”

김영민은 전시 도록 서문에서 “정주하의 사진을 접하는 수많은 관객들은 ‘이걸 왜 찍었어?’라며 그냥 스치듯이 지나가 버려야 하는데, 바로 그 같은 반응이야말로 (• • •) 일상의 변함없는 풍경이다”라고 하였다. 사실 아무런 사건도 극적 구성도 없고 별로 ‘그림이 될 만한’ 대상이 아닌 것을 그저 담담한 어조와 평범한 포치로 담아낸 대형 사진들은, 원경에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의 이미지를 알아보지 못한 관객을 의아하게 할지 모른다. 돔 형태의 상부를 가진 원자력 발전소의 이미지를 의식하는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이 잠재적 위험을 감춘 시설로 그 주변에 불안한 기운을 가득 퍼뜨리고 있다는 점을 설명 듣고 작가의 작의作意를 그저 머리로 이해해서는 뭔가 부족하다.


그보다는 아무런 사전 정보나 인식 없이 그의 사진을 대면하고 ‘이걸 도대체 왜 찍었고 왜 전시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은 이가, 핵 에너지의 생산과 소비 그리고 핵 폐기물의 처리에 관한 범상치 않은 문제와 그것이 대표하는 바 현대 사회의 구조적 위험의 진면목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다시 돌아가서, 나와 그들 안에 그러한 위험에 대한 무감각이 일상화되었다는 자각에 이를 수 있다면 그 전 과정이 ‘은폐된 불안, 대낮의 불안’ 연작을 매개로 작가와 소통하는 온전한 사이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안, 불火의 안內, 불(원자력)의 가장 안쪽에서 느끼거나 느끼지 못하는 불안, 그것을 담은 사진 속의 인물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관객들이 핵의 위험에 대하여 얼핏 들어 그저 머리로 알거나 위험 사회의 증후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지 못하여 자신의 작품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작가는 알고 있으며, 때로는 그러한 반응을 의도적으로 유발하여 엄존하지만 쉽게 의식되지 않는 위험, 실체적이지만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불안의 진면목을 드러내려 한 것 같다. 결국 ‘은폐된 불안, 대낮의 불안’ 연작은 관객이 그것을 매개로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과정을 통해 작가의 작의가 드러나게 되고 궁극적 소통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전시에 맞추어 발간된 도록에는 102점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고 그중 45점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모든 작품에서 우리들의 눈길을 빼앗는 것(또는 사진 자체에 드러나 있지는 않아도 전체 작품의 맥락을 알 경우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것), 그러니까 탈목점奪目点은 바로 국내 동서 해안 네 곳에 위치한 원자력 발전소의 이미지이다. 국내 원자력 발전소는 방대한 양의 냉각수 공급이 용이하도록 모두 바닷가에 건설되었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작가에게 바다는 시적 영감의 원천이었고 바다 작업을 위해 여행하다가 어느 날 마주친 원자력 발전소의 이미지는 그에게 있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로부터 5년간 그는 이 작업에 매달렸다.



비가시적, 비가역적 위험

핵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차원에서 약 반세기 전에 시작된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운영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고, 폭발적으로 증가한 전력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국내에서도 정책적으로 추진되어 핵 에너지의 의존도가 급증하였다. 원자력 발전은 경제적, 친환경적이라고 하지만 그 안전성이 문제가 된다. 홍성태가 『위험사회를 넘어서』에서 언급한 대로 전기 문명에 도취되고 화려한 소비문화에 빠져 드는 순간 이 같은 도취와 탐닉을 위해 자칫 인류를 멸종으로 몰아갈 수도 있는 핵 발전소들이 도처에 건설된 것이다.

1986년 구 소련의 체르노빌에서 원자로 노심용융에 의한 방사능 누출 사고가 발생했다. 누출 방사능의 규모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 경우의 400배에 달했고, 사고 후 6년간 노동자와 민간인 8천여 명이 사망하고 43만여 명이 암, 기형아 출산 등의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 대형 참화였다. 바로 그해,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충격을 목도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라는 저서를 출간한다. 현대 산업 사회는 위험이 전면화되고 정상적이게 된 사회라는 것이다. 울리히 벡이 말하는 바 현대 사회에서 구조적인 ‘위험’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비가시적, 비가역적이라는 점이다.

방사선은 인간의 평상적인 지각 능력을 완전히 벗어난다. 광우병 위험 인자나 유전자 변형 식품과 각종 화학적 합성물과 식품 첨가물들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의 위험을 제대로 드러내게 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인과 관계의 과학적 입증 역시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렇듯 현대 사회의 위험은 비가시적이다.


한편 현대의 위험은 더 이상 무릅쓸 수 있는 위험이 아니다. ‘무릅쓸 수 없는’ 위험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핵 사고이다. 이에 대하여 김진균과 홍성태는 공저 『군신과 현대 사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때 핵 폭탄과 핵 발전은 마치 악마와 천사처럼 대비되었다. 그러나 히로시마에 이어 체르노빌은 핵 폭탄과 핵 발전이 모두 악마의 영역에 속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 그것이 인류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생물에게 절멸의 위협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제 재앙은 그 자체가 곧 파멸을 의미한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최근 우리의 광우병 사태는 그 위험의 비가역성을 많은 이들이 일거에 예상하여 그 불안감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고 확산되면서 불완전하고 일시적이겠지만 그 위험이 가시권 안에 들어온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핵 발전으로 인한 오염에 관해서는 흔히 방사선 오염만 얘기되지만 실은 열 오염 문제도 있다. 영광 지역에서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1987년부터 어업 피해 보상 투쟁이 크게 일어났다. 정주하의 사진에서 일견 서정적으로 보이는 수면 위로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발전기의 엄청난 고열을 식히기 위한 냉각수가 더워진 채 바다로 방출되고 그 지역의 생태계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열 오염의 현장 모습이다.

오늘날 국제 유가의 상승이 가파르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에게 있어 핵 에너지 의존도는 더욱 높아지게 될 것이다. 부산, 울산, 경주 세 대도시 인근에 핵 발전소 8기가 가동되고 있고 이들 시설이 정주하의 사진 속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데, 거기에 더하여 인근 지역에 4기의 새로운 발전소와 핵 폐기장이 건설되고 있다. 그리고 경주 인근 월성에는 활성 단층이 다수 분포되어 있다. 중국의 지진과 같은 초대형 자연 재해의 가능성은 위협적이다. 핵 발전은 각별한 위험을 수반한다. 발전소의 수명이 다했을 때 그 자체가 거대한 핵 폐기물이 되어 시설 전체를 콘크리트 속에 봉인하여야 한다. 방사능의 반감기는 길게는 수만 년에 이르러 달리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그 위험은 문자 그대로 영원한 것이다. 핵 이용의 전제는 관련된 위험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통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위험의 완전하고 영원한 통제가 도대체 가능하겠는가?

비가시적 비가역적 위험은 도처에 널려 있다. 재앙은 현대 사회의 한 구조적 요소가 되었다. 위험은 세계화되고 탈 지역화되었다. 태안 기름 유출 사고의 경우처럼 정밀한 피해의 계산도 어렵고 책임 배상도 어렵다. 위험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막연한 불안감이 만연한다. 울리히 벡은 지난 3월 한국에 와서 “국가가 모든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민의 불신을 사는 위험한 전략이다”라고 말했다. 약 두 달 뒤 광우병 사태로 그러한 우려가 현실화되었다.


역설적으로 드러내기

정주하는 주민들의 심정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오랫동안 영광의 성산리를 드나들었다. 전시 도록 ‘대낮의 불안’ 편에 수록된 사진 중 35점이 영광군 홍농읍 성산리의 모습이다. 발전소 건설이 끝난 뒤 떠날 사람은 다 떠나고 어업의 길이 막혀 마을은 ‘고스트 타운’으로 변하고 더는 아무도 살려고 들어오지 않는 마을에 남아 이도 저도 못하는, 도록 서문에서 이선애가 묘사한대로 ‘위험 사회에 반항하지 않고 백기를 든 모습’이 그 안에 있다. 실상 그들에게나 우리들에게나 ‘반항’할 수 있는 명분이나 수단이 별로 없다. 그저 ‘적응’할 뿐이다.

어떤 관객은 정주하의 작업이 예상과는 달리 압축적인 흑백 소형이 아니라고 실망한다. 그런데 그가 대형 컬러로 작업하는 것은 그것이 일상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의 작업은 위험한 장소에서의 평온한 일상, 평화롭기만 한 풍경 속에 숨겨져 있는 역설적 불안을 담담하게 드러내며 보다 철학적이며 사변적인 공간으로서 사진 이미지를 제시한다는 평을 받는다. 정주하의 사진에서 위험과 불안은 어느 즐거운 한낮a pleasant day에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행동 속에 조용히 묻혀 있을 뿐이다.

정주하의 작품은 일련의 성찰을 요구한다. 정주하는 ‘불편한 진실’이 한 장의 사진을 통해 드러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듯하다. 쉽게 드러난다면 그것은 위험의 진면목이 아닐 터이다. 보는 이가 설핏 작가의 의도에 대해 듣거나 읽고 나서 사진을 보며 ‘너무도 일상적이고 평범해서 오히려 무언가 으스스하고 미묘하게 불안한 공기가 감지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오도된 것일 수 있다. 사전 정보 없이 전시장에 들어선 많은 관객들이 전시를 일람한 뒤 아무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걸 왜 찍었고 왜 전시 했어?”라고 불평하며 전시장을 나갈 때 바로 그 위험의 비가시성이라는 측면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정주하는 위험과 불안의 느낌을 사진을 통하여서도 쉽게 드러나지 않게 함으로써 현대 사회의 구조적 위험의 진면목인 비가시성과 은폐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나게 하여 그 위험의 비가시성에 도전한다. 그렇게 보면 이 전시는 개별 작품들을 매개로 한 일종의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성찰을 이끄는 시각적 화두

요즘 광우병 파동에 온 나라가 들썩인다. 그러나 정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결국 공장형 축산 관행과 우리들의 육식 과다 습관이 문제인 것이다. 조류독감도 마찬가지다. 핵 에너지 문제 역시 근본적으로는 우리들의 에너지 소비 중독 현상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육식 의존도를 줄이고 공장형 축산에 대하여 비판적이 되지 않고는 광우병이나 조류독감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 에너지 과소비 중독에 걸린 행태를 바꾸지 않고는 핵 에너지 의존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비가역적인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대안은? 로컬 푸드? 로컬 에너지? 지역과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식량과 에너지 자급률 향상에 대한 논의를 긴급히 시작하고 실천에 옮기지 않고서는 그 비가시적이고 비가역적이며 초지역적인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다. 문제는 우리다. 우리의 성찰과 자각이다.

박혜영은 인간이 다른 생물들과 달리 주어진 서식처에 적응하기 어려워진 것은 현대 과학이 발달하면서부터라고 하였다.( <녹색평론> 100호) 서식지에 적응하기 위해 진화하는 다른 모든 생물들과 달리 인간은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 서식지를 바꾸려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세상을 바꾼 대표적인 책 『침묵의 봄』의 저자 레이첼 카슨은 이렇게 인간 조건을 편리하게 바꾸려는 욕망의 근저에 바로 우리 문명의 파괴성이 본질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카슨은 현대 문명의 오만을 과학의 문제가 아닌 윤리의 문제로 성찰하였는데 이러한 근본적 성찰 없이 우리의 항상적 불안의 근본이 되는 구조적 위험 문제가 해결될 길은 없다. 한나 아렌트는 ‘사유할 수 없는 것’이 지금 인류가 직면한 최고의 악이라고 말했다.(박혜영, 같은 문헌)

정주하의 사진은 파국을 향해 치닫는 현대 문명의 파괴적 욕망에 대한 성찰과 사유, 그리고 그 욕망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시적 감수성의 회복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깨닫게 해 주는 시각적 화두이다.

글 최효준 (전북도립미술관 관장) | 사진 제공 아트선재센터

<정주하 불안, 불-안a pleasant day> 전
2008.5.1~7.27
아트선재센터(02-733-8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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