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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안 보여도 이젠 찍을 줄 알아요!"

2012-02-21


소리로 사진을 본다? 시력이 전혀 없는 재문이는 카메라를 귀에 대고 찍은 사진을 확인한다. 뭐든 청각에 의지하는 몸에 밴 습관이 사진촬영에서도 그대로다. 사진이 들릴 리는 없지만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워 자신 앞의 풍경과 바람소리를 느끼려 한다. 재문이 곁에는 멘토인 강지운 학생이 재문이의 손가락을 잡아끌어 디지털카메라의 액정 화면 크기만큼 사각형을 그려 “화면이 이만큼이고 이 안에 무엇이 얼만큼의 크기로 여기에 찍혔어” 알려준다.

기사제공│월간사진


무덥던 여름이 한창이던 8월 중순, 부산의 부산맹학교 고등학교 1학년2반 학생 8명과 경성대학교 사진학과 대학생 8명이 경남 남해를 찾았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두명이 멘티와 멘토로 한 팀을 이룬 16명의 손에는 제각기 카메라가 들렸다. 이들은 남해로 ‘오각만족 보물섬 찍기’(오각여행) 여행을 떠나온 참이다. 말 그대로 안 보이는 시각을 제외하고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생각 다섯 가지를 맘껏 즐기고 체험하는 게 여행의 목적이다.

여행 이야기는 맹학교 1학년2반 학생 8명과 담임교사가 매주 한차례씩 서로의 장래희망이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누는 시간에 처음 나왔다. 학생들은 친구들과 함께 경치와 공기 좋은 곳으로 떠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사진도 찍고, 신나게 놀다왔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시각장애인에게 경치 좋은 곳과 사진이라니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각여행을 준비한 사직사회서비스센터 정재은 사회복지사는 “시각장애 청소년들도 비장애 청소년들처럼 외출을 하거나 친구와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거나 원하는 것은 똑같다”며 “여행처럼 일상적인 것들이 매번 같은 길만 오가는 시각장애 청소년들에게는 이루고 싶은 소원 중 하나”라고 말했다. 장애와 상관없이 바라는 건 똑같지만 시각장애인들이 낯선 곳으로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정재은 복지사와 부산맹학교 학생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여행을 직접 기획하기 시작했고, 다행히 아름다운재단의 청소년여행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여행경비를 지원받을 수 있게 됐다.

이제 남은 건 이들과 함께 떠날 도우미다. 여행지의 풍경을 사진에 담기 위해서는 사진을 잘 아는 도우미가 필요하다. 다녀온 여행을 자랑하고 추억으로 남기기 위해 학교에서 작은 사진전시도 계획하던 터라 이왕이면 전문가(?) 멘토여야 했다. 정복지사는 자신의 출신 대학의 사진학과에 도움을 요청했다.


만지고 생각해서 찍는 사진, 신기하고 신나요!

보이지 않는 아이들과의 사진수업은 어떨까? 과연 어떤 아이들일까? 경성대 사진학과 2학년인 김혜진씨는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맹학교를 찾았다. 4학년 강지운 선배의 제안을 받고 봉사라는 생각보다는 잠시나마 아이들의 눈이 되어 함께 한다는 설레임에 오각여행의 멘토를 자청했다. 자신을 비롯해 2학년부터 4학년까지 8명의 사진학과 학생들이 맹학교를 찾아가 처음 만난 아이들은 여느 청소년과 다를 바 없었다. 눈이 안 보여 불편하게 보일 뿐 또래 청소년처럼 아이돌의 노래를 따라 하고 장난끼가 넘쳤다. 걱정과 달리 첫 만남부터 금새 친해졌고 그중 이강민 학생과 짝을 이뤘다. 약하게 시력이 남아있는 강민이는 찰칵찰칵 셔터소리와 카메라의 떨림을 좋아했다.

강민이의 손을 잡고 카메라를 만지며 렌즈와 셔터 등의 형태와 위치부터 익혔다. 다음에는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반셔터의 개념을 설명하고 셔터와 조리개도 손으로 확인시켰다. 사진을 찍을 때는 앞에 뭐가 있는지 설명한 뒤 카메라의 방향을 맞추느라 시간이 걸렸지만 강민이의 재밌어하는 모습에 뿌듯하고 대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경성대 사진학과 학생들과 맹학교 학생들은 오각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틀간 실내 사진수업과 야외 촬영실습 시간을 가졌다. 아예 볼 수 없는 전맹에서 저시력까지 시력 상태가 다 달라 학생들에겐 일대일 사진교육이 필요했다. 전맹인 정재문 학생과 짝을 이룬 강지운씨는 먼저 재문이의 콤팩트 카메라를 일정한 노출이 나오도록 설정한 뒤 앞에 뭐가 보이는지 설명하고 그것에 재문이의 손을 가져다댔다. 사물의 크기와 촬영 거리에 따라 사진에서 어느정도 크기로 찍히는지를 여러번의 촬영과 설명을 반복하면서 익히는 과정이다. 유독 하늘을 가득 찍곤 하던 재문이는 “어떻게 나왔어요?” 연신 신나하면서 신기해했다.

3학년인 전혜원씨는 소리에 민감한 아이들을 위해 소리에 집중해서 눈앞의 풍경을 들려줬다. “소리를 들으면 주위 환경이나 분위기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 다음 바로 앞에 도로가 있고 그 너머엔 산이 하나 있다는 식으로 원근감을 말로 하나하나 풀어서 설명하니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찍히던 대상에서 찍는 주체로, 자신감 가장 큰 수확

2박3일간 오각여행을 떠난 남해의 다른 공기와 자연 아래서 시각장애 청소년들의 마음의 눈은 더 크게 열렸다. 상쾌한 바닷바람과 냄새, 발에 감기는 갯벌, 손으로 만드는 수제 초콜릿, 맛난 음식은 온몸의 감각을 일깨웠다. 그 사이사이마다 보이진 않지만 만지고 느끼고 생각해서 여행지의 풍경을 한 장 한 장 사진에 담았다. 마음이 즐겁고 가벼워서인지 아이들에게 카메라는 금새 재밌는 놀이도구가 되었다. 좋은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해 집중하는 진지함도 볼 수 있었다.


사진을 통해 아이들이 얻은 자신감과 적극성은 바로 오각여행에서 찾으려던 보물섬이었다. 정복지사는 “항상 찍히던 대상이었던 아이들이 사진을 찍을 줄 안다는 것만으로 굉장한 자신감을 얻었다”며 “사회에 나갈 아이들에게 사진은 적극성과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방식을 길러주는 유용한 수단인 것 같다”고 말했다. 첫 사진여행은 부산맹학교에 작은 변화를 가져왔다. 사진교육에 관심을 갖는 교사가 생겼고, 쉬는 시간이면 친구나 교사를 세워놓고 사진 찍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번 오각여행은 시각장애 청소년에게만 해당되는 보물섬이 아닐지도 모른다. 배움의 대상으로 사진을 공부하던 사진학과 학생들 역시 시각장애 청소년과 함께 떠난 여행을 통해 특별한 경험을 했고, 자극을 얻었다. 강지운씨는 “즐겁고 적극적으로 배우는 모습에서 처음에 가졌던 가르칠 수 있을까 라는 선입견이 모두 깨졌고, 무엇보다 사진 하는 즐거움을 잊어버린 듯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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