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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말과 사진

2011-11-29


0 한 장의 사진이 천 마디 말보다 낫고,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면, 발 없는 사진은 백만 리도 더 갈 터, 과연 사진은 말보다 멀리 그것도 빨리 가는 듯하다. 말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니 마니 부질없이 많았던 말들을 1877년 마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는 말 사진 한 장으로 잠재우지 않았던가. 달리는 말에도 발은 붙어 있었고 달리는 말의 발 중 하나는 분명 땅을 딛고 있었으니, 사진의 빠른 눈은 달리는 말의 발을 따라 잡았던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제 아무리 발 빠른 말도, 제 아무리 말 많은 사람도 떨어질 수 없었던 이 땅을, 그래서 결코 한 눈에 볼 수 없었던 이 땅을 보여준 것도 1968년 아폴로 8호 선원들이 땅에서 백만 리 떨어진 하늘에서 촬영한 땅 사진 한 장이었다. 그러나 천 마디 말보다 낫다는 사진이 천 리를 간다는 말의 목을 조른다면, 이 발 없는 사진은 괴물을 만들거나 혹은 그 자신이 괴물이 된다.

글, 사진 | 현린


1 매리 셸리(Mary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1818)은 사진이 탄생하기 전에 나왔지만, 사진이 말의 목을 조르면 어떤 괴물을 만들어 내는지 예견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인간 창조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대학에서는 이에 필요한 지식을 쌓고 교회 묘지에서는 시체를 주워 모아 조립한다. 하지만 이 피와 살과 뼈 덩어리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내장 조립의 어려움 때문에 그 크기가 8피트나 되었고, 재료가 재료인 만큼 변색된 피부는 속을 제대로 가리지도 못해 혈관과 신경 그리고 봉합의 흔적 등이 외부로 드러났다. 한마디로 보기에 좋지 않았다. 죽은 듯 누워 있을 때엔 그런 대로 봐줄 만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것이 깨어나 눈을 뜨고 살아 움직이는 몸이 되었을 때, 프랑켄슈타인이 보기에 그것은 추하고 무섭고 심지어 악한 몸이었다. 예술가였던 피그말리온과 달리 과학자였던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낸 몸은 한마디로 괴물이었으니, 피그말리온과 달리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만든 그 몸이 살아나는 순간 기겁을 하고 줄행랑을 친다.

거구의 아이는 이렇게 이름도 없이 버려져 숲을 떠돌다 어느 오두막집 옆 우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몸을 숨긴 채 오두막집의 가족이 쓰는 말을 배우고 몰래 그들을 돕는다. 앞을 보지 못하는 옛 프랑스 귀족 노인 드 라세와 그의 아들 펠릭스 그리고 딸 아가사에게 몸을 드러내지 않는 그는 ‘아름다운’ 혹은 ‘착한 정령’이었다. 아라비아에서 온 펠릭스의 연인 사피가 이 가족과 함께 살게 되면서 사피의 프랑스어 수업이 시작되었고, 덕분에 그는 글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물에 비친 몸은 자신의 눈에도 추하지만,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들도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 주리라 기대한 탓에 열심히 말과 글을 배웠다. 앞을 보지 못하는 드 라세, 한 사람만은 과연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아름답고 착한 정령이 몸을 드러냈을 때, 아가사는 졸도하고 사피는 달아났고 펠릭스는 무기를 들었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이번에도 그는 버림을 받은 것이다. 자신의 몸을 본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다른 몸은 추한 몸이 되고 추한 몸은 곧 악한 몸이 되었다.

전쟁을 선포하며 삐뚤어질 생각도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여전히 파괴가 아니라 공존이었으니, 자신과 더불어 살 수 있을 만큼 자신과 닮은 몸을 부탁하러 프랑켄슈타인을 찾아 간다. 도중에 한 아이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라면 말로 가르쳐 더불어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아이 앞에 몸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 아이마저 괴물이니 악마니 욕설을 퍼부었고, 그 말을 멎게 하려고 아이의 목을 잡았다가 그만 아이를 죽이고 말았으니, 불행하게도 그 아이는 프랑켄슈타인의 막내 동생이었다. 이렇게 해서 결국 눈에 보이는 대로의 괴물이 되어 버린 그는 마침내 프랑켄슈타인을 만나, 자신의 동반자를 만들어 주면 그녀와 함께 먼 곳으로 가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노라 말한다. 하지만 눈 때문에 귀가 먼 프랑켄슈타인에게 괴물의 말은 곱게 들리지 않는다. 흉측한 몸의 탁월한 말은 오히려 더 사악한 악의 징표로 받아들여진다. 결국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뜻에 따라 만들고 있던 새로운 몸을 바다에 내다 버린다. 이에 분노한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의 아름답고 착한 아내 엘리자베스를 목 졸라 살해한다. 추한 몸은 몸을 비추는 물에 던져 죽여 복수하고, 추한 말은 말을 내놓는 목을 졸라 죽여 복수한 것이다.


2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의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F?r eine Philosophie der Fotografie, 1994)는 사진이 말의 목을 조르면 어떻게 괴물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플루서에 따르면, 그 동안 두 번의 혁명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인간은 그림을 그려 ‘상상’으로 인식하고 소통했다. 그러다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림을 숭배하는 환각에 빠졌고, 그림을 그리는 대신 문자를 쓰기 시작하면서 이 마술에서 풀려난다. 문자를 씀으로써 갖게 된 ‘개념’이 비판의식과 역사의식을 낳게 하기 때문이니, 이것이 그가 말하는 첫 번째 혁명이다. 그런데 문자가 대중화되면서 개념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문자를 숭배하는 환각에 빠졌고, 이번에는 사진을 필두로 하는 기술적 영상을 찍기 시작하면서 이 마술에서 풀려난다. 개념이 이미 ‘정보’로 프로그래밍 되어 스스로 발전하는 최초의 ‘장치’(Apparat)인 사진기가 인간을 개념과 역사로부터 벗어나게 한 까닭이다. 이것이 그림의 전(前)역사적 시대와 문자의 역사적 시대를 이어 사진의 탈(脫)역사적 시대를 여는 두 번째 혁명이다.

사물이 아니라 사진을 주로 찍어내는 개념 없는 유희의 시대에 인간이 할 일이라고는 내장된 정보가 복잡해질수록 사용하기에는 간단해지는 장치를 가지고 노는 것뿐이다. 그림-면-2차원에서 문자-선-1차원에 이어 정보-점-0차원으로 축소해 들어가며 도달한 이 유토피아에서 유일한 문제는 인간이 이 사진 장치를 가지고 자유롭게 놀지 못하고, 이미 사진 장치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잉여 사진’을 반복해 찍으며 장치의 의도에 놀아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플루서는 세 번째 혁명의 도래를 선언하는 바, 이제 목표는 장치라는 이 신종 운명의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유희다. “사진의 철학이 해명해야 하는 사실은, 인간의 자유는 자동적인, 프로그래밍 되는 또는 프로그래밍 하는 장치의 영역에서는 그 여지가 없다는 점을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자유를 위해서 어떤 여지를 남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우리에게 열려 있는 유일무이한 형태의 혁명이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온 이 시시포스 신화 속에서 아직 사진 장치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지 않았기에 장치의 의도를 벗어나는 새로운 사진은, 그러나 찍히는 바로 그 순간에 장치에 프로그래밍 됨으로써 곧 헌 사진이 되고 만다. 사진가는 이 부조리한 운명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사진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장치에 몸과 땅 모두가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장치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몸을 버리고 땅을 떠나는 것, 즉 죽음밖에 없다. 이 몸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사진을 하며 살고자 한다면, 새로운 대상을 새로운 형식으로 찍고 새로운 채널을 통해 전달하는 것, 정보화(in-formation)의 유희에 투신하는 수밖에 없다. 사진 한 장 없는 사진을 위한 이 ‘묵시론적’ 철학인지 신학에서, 사진은 그 몸을 볼 수 없고 그래서 만질 수도 없으며 마땅히 저항할 수도 없는 절대 타자, 테크노 신비라는 괴물이 된다.


3 두 괴물 모두, 인간이 만들었으나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 제 뜻대로 산다. 그러나 둘 중 하나는 상상의 산물이고 나머지 하나는 환각의 산물이다. 하나는 광야를 달리는 말이고 나머지 하나는 말뚝에 묶여 떠도는 말이다. 셸리의 괴물이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을 가졌으나 이름은 없는 괴물이라면, 플루서의 괴물은 인간의 피와 살을 그의 몸으로 삼고 인간의 입을 통해 그의 말을 하는 장치라는 이름을 가진 괴물이다. 셸리의 괴물은 인간과 더불어 살려고 시도하지만 눈에 보이는 추한 몸 때문에 결국엔 인간과 싸우게 되는 반면, 플루서의 괴물은 인간과 한 몸인 탓에 서로가 싸운다는 것이 불가능하며 인간은 다만 괴물 안에서 괴물의 뜻대로 놀며 괴물의 몸을 살찌울 뿐이다. 그래서 셸리의 괴물의 발은 사진으로 잡을 수 있지만, 플루서의 괴물의 발은 결코 사진으로 잡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셸리의 괴물은 귀가 아니라 눈에 의지하는 인간이 낳은 산물이다. 사진이 이 인간의 눈을 대신할 때 사진은 말의 목을 조르고 새로운 괴물을 낳는다. 반면 플루서의 괴물은 사진의 산물이 아니라 사진 그 자체이다. 눈의 대상이 아니라 눈 자체이고, 사진의 대상이 아니라 사진 자체이다. 그것은 말의 목을 졸라 만들어낸 괴물이 아니라 말의 목을 조르는 괴물이다.



*본 기사는 <월간사진> 2010년 3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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