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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놀이로서 사진

2011-11-11


0 흔히들 실제 사냥과 전쟁에 나설 일이 없어진 후에 쓸모없어진 총 대신 메고 다니는 것이 사진기라고들 한다. 요란하게 무장하고 나서지만, 가지고 돌아오는 것은 호랑이 가죽이 아니라 고작 호랑이 사진이라고도 한다. 대개는 사진의 유치함과 비겁함을 비아냥대는 말들로 한마디로 “놀고 있다”는 소리다. 진지하게 사진에 임하는 사람에게, 더구나 놀이란 저열한 것이라 아는 사람에게, 이는 분명 모욕이니, 놀이라면 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을 사냥에 비유한다고 해서 또는 놀이라 놀린다 해서 놀라거나 눌릴 필요 없다. 개도 할 수 있는 것이 놀이라고 해서 놀이 자체가 저열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개도 놀지만 인간도 논다. 다만 인간은 인간답게 논다. 게다가 바야흐로 엔터테인먼트와 퍼니즘(Funnism)의 시대, 사냥의 또 다른 잔재라 알려진 쇼핑(Shopping)도 놀이와 재미라는 차원에서 재발견되고 재발굴되고 있는 마당에, 슈팅(Shooting)만 유독 유치한 놀이라고 놀림 받을 이유가 없다. 가죽을 찢건 사진을 찍건, 중요한 것은 제대로 노는 것이다. 그러니 놀이로서 사진을 부정하기보다는 놀이로서 사진이란 무엇인지 묻고 제대로 즐기는 편이 낫다.

글, 사진 | 현린

1 호이징하(Johan Huizinga)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 1938)에 따르면 인간이란 오직 놀이 속에서 인간다울 수 있는, 본질상 노는 존재다. 개보다 우등한 인간은 개도 한다는 그 놀이를 통해 개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스포츠와 학문, 예술 그리고 경제와 정치까지 아우르는 일체의 문화를 창조해 왔다. 심지어 사냥과 전쟁 또한 놀이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지, 사냥과 전쟁의 모조품이 놀이인 것은 아니다. 개처럼 네발로 바닥을 기고 뒹굴며 까르르 웃던 아이가 세련된 놀이를 즐기며 자람으로써 나중에는 쓰디쓴 전쟁의 패배에도 썩소일망정 웃을 줄 아는 전사가 되는 것이다. 놀이가 단순히 과잉 에너지의 방출이나 긴장의 해소에 불과하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놀이가 특정한 터와 때 안에서 형식과 규칙이라는 틀을 따르는 질서 있는 놀이이기 때문이다. 그 재미란 것 역시, 놀이에 필요한 탈을 쓰고 기꺼이 그 틀을 따르는 과정에 몰입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진지한 재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작은 개마저 즐길 수 있는 놀이이고 재미였으나, 그 끝은 인간만이 즐길 수 있는 놀이이고 재미로 발전한다. 반면 새로운 놀이 질서를 창조하지도 않으면서 기존 놀이 질서를 파괴할 때, 놀이만이 아니라 문화까지 타락한다.

그런데 퍼니즘의 선지자인 호이징하가 보기에 인류 문화는 화려했던 로코코 양식에서 절정에 달했고 그 이후로는 계속 타락해 왔다. 산업주의에 물든 일하는 인간들의 잿빛 의상, 상업주의와 실용주의에 물든 예술과 학문, 대중매체의 발전과 함께 달아오른 스포츠 그리고 신사도를 망각하고 개싸움이 되어버린 비열한 전쟁 등등. 사치와 장식의 귀족 문화가 사라진 후 찾아온 대중들의 편한 세상이 호이징하에게는 제대로 놀 줄 모르는 천박한 것들의 더러운 세상일 뿐이다. 험담과 기만 역시 놀이라고 하더니 형식과 내용의 구별이라는 지극히 모던했던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급기야 놀이에서 성스러움을 찾기까지 한다. 놀이의 자율적 형식을 강조하던 그가 고대의 단순한 놀이에서 근대의 복잡한 놀이로 접근하면서는 그 다양한 형식의 경합과 교합을 놀이의 진화로 인정하기보다 타락이라 개탄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놀이의 형식은 불변하는 닫힌 형식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하는 열린 형식이며, 그래서 놀이와 놀이가 경합하기도 하고 놀이와 놀이가 교합하기도 한다는 점을 간과한 탓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호이징하는 사진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설령 사진에 관심을 기울였던들, 놀이다운 질서와 재미를 찾을 수 없다며 단순한 붓질을 놀이로 인정하길 주저했던 그가, 대량생산된 사진기의 단순한 셔터질을 놀이로 인정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복고주의적이고 귀족주의적 경향으로 미루어 보건대, 문화를 타락시킨다며 사진을 비난했을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아무 터와 아무 때를 가리지 않고 아무나 아무거나 찍어대는, 그것도 잿빛 사진이 놀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퍼니즘에도 신약의 시대는 열렸으니, ‘놀이와 인간’(Les jeux et les hommes, 1967)에서 카이와(Roger Cailois)는 호이징하보다 더욱 엄격한 형식주의를 고수하면서도 놀이의 진화를 고려함으로써 놀이의 폭을 더욱 확장시킨다. 그래서 호이징하와는 반대로 설령 문화를 파괴할지라도 놀이는 놀이일 뿐이라며 관용을 베푼다. 때문에 놀이로서 사진에 대한 자문을 얻고자 한다면, 이제 더 엄격해서 더 관대한 카이와를 찾는 편이 낫겠다. 그 역시 사진을 직접 다루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는 쿨하다.


학교라고 하면 감시나 체벌 같은 불행한 추억만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어릴 적 그들을 포함한 세계의 대다수 아이들에게 여전히 학교만한 놀이터가 없다. 학교가 아니라면 여지없이 거리로 나가 관광객들에게 사진엽서를 팔거나 구걸을 해야 하는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레스토랑과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오는 수입의 일부로 운영되는 학교가 없었다면, 글이나 춤의 근사한 재미 따위를 이 아이들이 즐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답게 놀지 못하고 인간답게 자랄 수 없었을 것이다.


2 카이와에 따르면 놀이는 일반적으로 아래 여섯 특성 중 다섯 가지를 갖는다. 첫째 강요 없는 자발적인 활동이다. 둘째 한정된 공간과 시간 안에서 일어난다. 셋째 그 전개도 그 결과도 결정되어 있지 않다. 넷째 비생산적 활동이다. 다섯째 승패를 가릴 수 있는 규칙이 있다. 여섯째 현실에 비하면 명백히 비현실적, 허구적 활동이다. 모든 놀이는 다섯째와 여섯째 둘 중에선 하나만을 갖는다. 달리 말해 각각의 놀이는 승패를 가릴 수 있는 동시에 허구일 수는 없다. 이 기준에 따라 취합한 모든 놀이는 크게 다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권투나 육상경기처럼 기량의 탁월함을 다투는 아곤(Agon), 주사위 놀이나 도박처럼 운명을 시험하는 알레아(Alea), 회화나 연극처럼 모방 또는 모의하는 미미크리(Mimicry), 회전목마나 번지점프처럼 현기증을 즐기는 일링크스(Ilinx)가 그것이다. 일단 놀이로서 사진을 전제한다면, 카이와가 분류한 네 놀이 집단 중 사진이 속하는 놀이 집단이 어떤 것인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다.

첫째 네 가지 놀이 집합들끼리는 그 질서나 재미의 우열을 비교할 수 없다. 예컨대 아곤의 질서가 일링크스의 질서보다 낫다고 할 수 없고, 알레아의 재미가 미미크리의 재미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질서의 극단인 루두스(Ludus)와 무질서의 극단인 파이디아(Paidia)를 양극으로 하는 축을 따라, 동일한 놀이 집합에 속하는 놀이들끼리는 그 질서의 정도를 비교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아곤 중에서도 권투는 루두스에 가깝고 이른바 개싸움은 파이디아에 가깝다. 둘째 놀이는 그 규칙을 바꿈으로써 다른 종류의 놀이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예컨대 흑돌과 백돌을 가지고 노는 바둑은 그 규칙을 바꿈으로써 오목으로 바뀔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바둑판이 오목판이 되고, 바둑알은 오목알이 된다. 셋째 실제의 놀이는 하나의 놀이 집합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집합에 동시에 속할 수 있다. 예컨대 카드놀이는 알레아와 아곤에 동시에 속하고, 관중이 지켜보는 대개의 스포츠는 아곤과 미미크리에 동시에 속한다. 요컨대 실제의 많은 놀이들은 잡종이고 앞으로 더욱 잡종이 될 수 있다. 이렇듯 복잡다변한 놀이의 특성 때문에 실제에서는 하나의 놀이 집합에만 속하는 놀이를 찾기 힘들다. 그러니 사진도 여러 놀이 집합에 그것도 동시에 속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우선, 조준해서(Aim) 사격하고(Shoot) 포획한다(Take)는 사냥과 유사한 특성을 고려하면 사진은 분명 아곤에 속한다. 여기에 경쟁이 있다면, 그 상대는 촬영 중인 피사체이거나 동일한 피사체를 겨누는 다른 사진가들이다. 어느 경우건 게임의 승패는 탐색과 조준, 사격과 포획 과정에서 발휘하는 사진가의 기량에 달렸다. 이와 대조적으로 승패를 기량이 아니라 운에 맡길 때 사진은 알레아에 속한다. 극단적인 경우 뷰파인더를 보지도 않고 무엇이건 일단 낚은 후에 골라낸다. 기실, 노출 시간 동안엔 피사체는 물론이고 사진기도 사진가의 통제에서 벗어난다. 그러니 적어도 이 순간, 사진기는 바닥에 구르는 주사위와 같다. 한편, 회화의 재현술을 발전시킨 것이 사진술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진은 미미크리에 속한다. 너무 쉽고 너무 진짜 같아서 주저스럽다면, 더 적당한 예로 피사체를 만들어 찍는 이른바 연출사진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촬영 장비와 촬영 행위 자체를 볼거리로 만드는 경우도 미미크리에 속한다. 여기서 관심의 대상은 피사체가 아니라 관객이고 촬영장은 하나의 무대가 된다. 사진기라는 자동화된 상품을 매개로 슈팅과 쇼핑이 만나 하나의 놀이(Play), 하나의 연기(Play)가 되는 것이다. 남은 것은 일링크스인데, 전혀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촬영을 하면서 현기증 혹은 의식 불명 상태에 이르는 광적인 경우가 과연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이 항목은 일단 비워둬야겠다.


세계란 신의 놀이, 환영(幻影)일 뿐이라고 설명하는 힌두이즘이야말로 퍼니즘의 원조라 할 수 있다. 다만 이제 노는 자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리하여 빛의 도시 바라나시는 힌두이즘의 성지이자 퍼니즘의 성지가 되었다. 특히 사진을 찍기 위해 여행하는 포토퍼니스트(Photofunnist) 순례자라면 꼭 찍고 가야 하는 곳이 바라나시다. Welcome to the Photo Funny World!


3 투박한 스케치만으로도, 그 안에 담긴 사진의 면면이 놀이하는 인간의 면면만큼이나 다채로움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놀이가 다종다양한 만큼 그 많은 놀이들을 모두 사진으로 일일이 담아내며 놀기에도 바빠 보이고, 그 놀이들과 교합하여 새로운 사진 놀이를 만들 가능성도 무궁무진해 보인다. 놀이는 특정한 터와 때 안에서만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아무 곳 아무 때나 아무나 아무거나 찍고 놀 수 있다는 것이 놀이로서 사진의 장점 아닌가. 어느 곳에서건 사진기를 꺼내 드는 순간, 아니 사진적 태도를 갖는 순간, 이미 이 놀이는 시작된다. 더구나 포니(Pony)를 생산하며 뒤늦게 포디즘(Fordism)인지 포니즘(Ponism)인지의 시대에 합류했던 이 나라도, 이제는 퍼니즘(Funnism)의 시대를 열고 사방에서 쇼를 하느라 바쁘다. 그러니 가히 아니 찍고는 아니 놀지는 못하는 것이리라. 세계 자체가 사진을 위한 터이고 때인 듯 보이니, 유토피아(Utopia)는 모르겠으나 포토퍼니즘(Photofunnism)의 궁극, 포토피아(Photopia)는 실현된 듯 보인다. 하지만 전부(全部)는 곧 전무(全無)이기도 하니, 불행하게도 실제로는 찍을 터와 때라고 공인된 곳에서 조장된 것만 찍고 논다. 그러니 포토피아의 실현은 아직 멀었다. 우리가 노는 이곳은 사방에서 쇼를 하는 놀이동산, ‘포토 퍼니 월드’(Photo Funny World)일 뿐이다. 채우지 못하고 비워둔 마지막 항목 일링크스는 아마도 이런 사진을 위한 것인지 모른다. 놀이동산을 가득 채운 달콤한 현기와 향긋한 광기.



*본 내용은 <월간사진> 2010년 2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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