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전체보기

분야별
유형별
매체별
매체전체
무신사
월간사진
월간 POPSIGN
bob

아트 | 리뷰

황톳빛 길의 추억여행

2011-06-20


태국에서 캄보디아를 여행하고 돌아온 날 밤, 카오산 로드의 숙소에서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에 아른거리는 그곳의 풍광들이 내 모든 정신들을 그곳으로 다시 끌어들였다. 그리워서 그 길 위에 다시 서고 싶어 나는 캄보디아에서 돌아와 방콕에 머문 지 이틀만에 다시 그곳으로 들어갔다.

글, 사진 | 사진가 신미식



태국 국경에서 캄보디아 포이펫(앙코르왓) 가는 길

태국 국경 아란에서 앙코르왓의 도시 포이펫으로 가는 그 길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곳으로 가슴에 담고 말았다. 무엇이 그렇게 내 마음을 만지고 내 마음을 흔들었는지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그 황톳빛 도로와 끝없이 이어진 지평선 너머에 지표를 알려주듯 홀로 서있는 한 그루의 쓸쓸한 나무.



이른 아침 출발한 버스는 태국의 아란 국경에 여행자들을 내려놓는다. 덩치보다 큰 배낭을 짊어진 여행자들은 흐르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사람들의 물결을 따라 걸어간다. 태국출입국관리소에서 간단한 출국 심사를 마치고 나오면 우정의 다리를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방콕의 사람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처음으로 가난을 생각하게 하는 사람들. 애처러운 눈빛으로 여행자들에게 마른 손을 건네던 그들의 눈빛은 무심한 여행자들의 바쁜 발걸음을 잡기에는 역부족인 듯하다.

우정의 다리를 건너 캄보디아 비자를 발급받고 출입국 건물로 들어가 순서를 기다리는데 한 나라의 출국장이라고 하기에는 건물이 너무 협소하다. 햇볕은 무섭게 내리쬐는데 피할 그늘 없이 줄을 서있어야 한다. 그나마 순서가 와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나은데 밖에서 기다리자니 여간 곤욕이 아니다. 길게 선 줄 사이로 출입국 직원이 다가와 입국 신고서를 나눠준다. 마땅히 앉아서 쓸 곳이 없으니 여행자들은 그 자리에 서서 서류를 작성한다.



태국의 출입국관리소 직원들과 달리 표정이 무뚝뚝한 관리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왔다. 아, 이곳부터가 캄보디아구나. 몇 걸음 차이로 태국과 캄보디아가 나눠진다니 육로로 국경을 한번도 넘어보지 못한 나로선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입국장을 빠져나오니 호객꾼들이 몰려온다. 포이펫으로 가는 택시를 알선해주는 사람들이다. 이곳에서 포이펫까지는 대략 35달러 정도에 흥정이 이뤄진다는 정보를 알았기에 속으로 35달러만 외우고 있었다. 여행자에게 35달러는 적은 금액이 아니다. 여행을 다니다보면 1달러의 소중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태국에서 떠나올 때 알게 된 한국인 여행자 셋이서 나눠 내기로 하고 택시를 탔다. 말이 택시지 우리로 치면 자가용 영업차인 셈이다. 이곳의 차들은 주로 일제 중고인데 그래서인지 핸들이 우측에 달려있다.

국경을 오가는 이곳 드라이버들의 운전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트 수준이다. 아스팔트가 파인 길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리는데 차에 탄 사람들 모두가 넋을 잃을 정도다. 차안에서 바라본 캄보디아는 소박하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과 트럭에 빈틈없이 타고 있는 사람들. 이들의 일상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캄보디아를 처음 접한 것은 킬링필드라는 영화였다. 20년이 더 지난 영화지만 아직도 영화 속 장면은 눈에 생생하다. 특히 체크무늬 수건을 하고 총을 쏴대던 사람들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저 사람들의 목과 머리에도 같은 수건이 둘러져있다. 그때는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던 수건의 문양. 그러나 전쟁은 이미 오래전에 이 땅에 많은 아픔을 남기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평화롭게만 보인다.

잠시 영화를 생각하는데 앞으로 확 트인 황톳길이 나타났다. 처음 보는 지평선 위의 황톳길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앙코르왓을 보러 캄보디아에 왔지만 자연은 내게 더없이 값진 풍경을 선물했다. 서서히 기울어가는 해는 황토먼지 사이를 뚫고나와 온 세상에 붉은 색을 선물한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척박한 땅이지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 보인다.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 위로 쓸쓸히 서있는 한그루의 야자수도 아름다움 그 자체다. 운전기사에게 부탁해 차를 세웠다. 그리고 셔터를 눌렀다. 붉은 하늘과 붉은 땅,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호기심까지 모두가 나에겐 새로운 경험이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건네는 황금 같은 미소를 카메라에 담고 길지 않은 시간에 수없이 많은 만남과 이별을 경험했다.



그렇게 나에게 감동을 준 그 길은 3시간 가량 이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사람들과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자전거 행렬들. 붉은 해를 안고 달려오는 아이들에게 소리쳐 인사를 건넸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이 난 즐겁고 행복했다.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뒤집어써야 하는 뽀얀 먼지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익숙한 듯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는다. 자동차 안에 있으면서도 길 위를 지나치는 한 장면 한 장면 모두를 기억했다. 다시 돌아와 기억하려는 듯이.

여행을 하다보면 예기치 않은 행복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 이 순간이 그런 때가 아닌가 싶다. 이 아름다운 황톳길 위에 머물고 싶다. 아주 오랫동안 이곳에 서서 모든 것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



사람에겐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이 남들과 다를 수 있다. 그 다름이 결국은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쳤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이곳에서 혼자 감격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오늘은 남들과 다른 시선을 가졌음에 감사하다. 이렇게 행복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니까.

길은 나에겐 언제나 희망이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도 그렇고, 길 위를 스쳐가는 바람 소리도 특별했다. 비록 오래 머물지는 못할지라도 난 이처럼 황토 빛이 나는 길을 보면 행복함에 온몸이 짜릿해져온다. 길은 언제나 생명을 연결시켜주는 사람의 핏줄과 같은 역할을 한다. 난 길 위에서 사랑을 했고, 길 위에서 이별을 했다. 기쁨과 슬픔의 진한 애정이 남겨진 길은 나에겐 결국 고향과 같은 존재다.

내가 만난 길 중 가장 사랑했던 태국 국경에서 캄보디아의 씨엔립으로 가는 이 길.

다음해에는 이 길이 포장된다고 한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겐 편리함을 안겨주겠지만 나에겐 소중한 추억이 남겨진 곳을 잃는 일이다. 검은 아스팔트가 덮여지기 전에 다시 가볼 수 있을지. 같은 곳을 여행한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느낌을 갖지는 않는다. 그곳의 황톳길에 뭔가를 놓고 온 듯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 아쉬운 마음을 평생 안고 살 자신이 없어 왕복 25시간을 투자해 결국 난 한 장의 사진을 가슴에 안고 1박2일만에 방콕으로 돌아왔다.


* 본 기사는 <월간사진> 2009년 5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facebook twitter

월간사진
새롭게 떠오르고 있거나,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진가가 월간사진을 통해 매달 소개되고 있습니다. 월간사진은 사진애호가와 사진가 모두의 입장에서 한발 앞서 작가를 발굴하고 있습니다. 심도 깊은 사진가 인터뷰와 꼼꼼한 작품 고새로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대표 사진잡지입니다.

당신을 위한 정글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