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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남들은 듣기만 한 이름, 당신은 피부로 느끼십시오”

2004-01-12





광고를 위한 사진작업에는 대부분 고객으로부터 ‘촬영시안’이 제공됩니다. 촬영하려는 사진의 개략적인 밑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진가는 이에 맞추어 촬영을 진행하게 되지요. 실제로 촬영하기 전에 완성될 사진을 상상하여 연필로 대충 스케치해 본 정도의 시안도 있고,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전문 일러스트레이터가 칼라까지 입힌 촬영시안도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디지털 카메라가 대중화되면서 실제 촬영된 사진으로 제작된 거의 완성된 광고에 버금가는 시안들도 많이 등장 했습니다. 광고회사마다 경쟁적으로 고객 유치를 하다보니 광고주에게 제시해야하는 촬영시안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게 되었고 이러다 보니 때로는 필요 이상의 정열이 시안 제작에 쏟아 부어지곤 하는 것이지요. 완벽한 촬영시안에 눈이 높아진 광고주들은 왜 시안대로 촬영하지 않았느냐며 ‘무조건 시안하고 똑같이 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광고를 내보내면서(출고) 실수로 촬영시안을 대신 내보내고서도 아무도 몰랐다거나, 나중에 광고주가 알고서도 그리 문제 삼지 않았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들어 보았습니다.
제 경우에는 사진으로 제작된 촬영시안을 넘겨 받게되면 조명과 앵글, 색감 등이 이미 시안에 의해 한정되어 더 이상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없거나 최소한 방해를 받게 되는 경우를 자주 경험했습니다. 촬영시안이 그림일 경우 최소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어서 좋고 사진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어서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촬영 시안은 그림으로!

촬영회의가 있다고 해서 광고대행사를 방문했습니다. 보통은 촬영시안을 메일로 주고받고 전화통화를 하면 별도의 회의가 필요 없는 경우가 많지만, 이번엔 분위기가 좀 다르더군요. 들어가보고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임 : 아니, 이게 촬영시안입니까?
디자이너 : 예, 촬영시안 맞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광고주가 이 안을 선택 했습니다. 저희도 막막합니다. 하나에 40만원 가까이 하는 방문판매전용 최고급 화장품인데, 너무 가볍지 않게 진지한 분위기로 고급스러운 느낌을 최대한 살려달라는 요구입니다.

임 : 너무 막연하고 광범위한데요. 그래도 배경의 종류나 재질 느낌, 색감 등을 어느 정도 결정해 주시면 좋겠는데…. 부담스럽습니다.
디자이너 :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들도 고민 고민하다가 전화를 드렸습니다. 이런 경우엔 어설프게 저희들이 이런 저런 주문을 하며 제한을 두는 것보다 실장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결국 탁상공론보다는 제가 여러 방향으로 촬영한 결과를 놓고 몇 가지로 압축한 다음, 광고주와 협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부담스러울만큼 가이드 라인이 낮은 촬영시안이기는 했지만 제한없이 촬영을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의욕을 북돋우기도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테스트 촬영을 시작했지만 점심시간이 지나서도 변변한 성과가 없었습니다. 마음에 부담이 컸던 모양인지, 점점 초조해 지더군요.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것 저것 시도하며 한참을 해매다가 드디어 마음에 드는 사진 하나가 모니터에 떴습니다.
빛이 투과되는 유백색 아크릴을 바닥으로 삼고 그 위에 제품을 놓은 후, 붐 스탠드(T자형 지지대)를 이용해 허니컴 스팟(벌집 모양 격자가 달려 빛을 모으고 직진성을 살려줌)을 제품 위 약간 후방에서 비추었고, 부드러운 조명을 위해 바닥과 같은 종류의 유백색 아크릴판을 제품과 조명 사이 허공에 설치한 다음, 반투명 트레이싱지를 한 겹 더 설치하여 더욱 부드러운 빛이 되도록 조절했습니다.
이때 아크릴판과 트레이싱지 사이를 약 10cm정도 띄워서 설치해야 더욱 부드러운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소프트 박스를 사용하면 손쉽게 부드러운 조명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소프트박스의 경우 발광면 전체의 밝기가 고른 반면, 위의 방법으로 두 겹 이상의 확산판(빛을 부드럽게해주는 역할)을 스팟 라이트로 조명하면 하일라이트로부터 주변 부위로 부드럽게 톤이 넘어가는 밝기 변화를 효과적으로 만들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부드러운 조명으로 사진이 너무 플랫해지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광섬유로 만든 작은 스팟 라이트 두 개를 다이렉트로 사용했습니다. 한 개는 왼쪽에서 제품 목 부분으로, 다른 하나는 뚜껑 부분에서 비추어 주었지요. 이 세팅을 기본으로 여러 가지로 변화를 주어 다양하게 촬영한 결과물을 그날 저녁 인터넷을 통해 디자이너께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며칠 후 디자이너 분이 스튜디오를 방문하였고, 저는 광고주가 촬영 결과를 여러 가지로 많이 준비해주어 만족스러워했다는 뒷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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