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18
나지막한 언덕 위에 얹힌 회색 의자.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또 여러 개의 의자가 존재한다. 사실 의자뿐만 아니라 콘솔, 벤치, 각종 소품까지 없는 게 없다. 유리문 사이로 펼쳐진 의자들이 호기심을 자극해 잠깐 들렀다지만, 디자이너 한정현의 이야기가 담긴 가구를 만나고는 기분 좋은 마음으로 문을 나서게 되는 곳. 여기는 ‘체어스 온 더 힐’이다.
에디터 | 이영진(yjlee@jungle.co.kr)
얼핏 봐서는 이곳의 정체를 알 수 없다. 가회동사무소와 북촌미술관 사이 골목길 끝, 경사진 담벼락 밑에 자리 잡은 회색 건물. 정갈하고 수려한 외모의 건물 ‘체어스 온 더 힐’을 보자마자 ‘이런 동네에 이런 가게가 있네’하는 놀라움이 앞선다. 이곳의 정체는 숍 이름을 그대로 해석해도 무방한, 의자가 주가 되는 가구 갤러리 겸 카페다. 주인장은 미국에서 가구 디자인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우리나라 젊은 가구 디자이너의 대표주자가 된 한정현이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녀가 직접 디자인한 가구들과 수입한 인테리어 소품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모던하고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의 의자, 책상, 책꽂이, 그 밖에 흥미로운 아이템들도 꽉 차 있다. 다채로운 색상의 벽시계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구경하는 재미에 시간가는 것도 잊게 만든다. 문득 지금이 몇 시인가 궁금해질 때 즈음,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ㄴ’자 거울에 달린 시계가 눈에 들어온다. 초침 옆으로 거울 속에 비친, 파벽돌로 장식된 게이트로 아늑하게 구획된 공간이 일상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그 가벼움과 편안함은 가구와 공간에 이야기를 담고자 하는 한정현의 노력과 가회동이라는 지역적 특성이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가구디자인을 전공하고 돌아온 한정현은 동네의 정취에 매료되어 이곳에 둥지를 틀기로 했다. “처음 문을 열 때만 해도 강남에 가구 가게가 많았죠. 전 복잡하고 어수선한 곳은 싫었고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서 작업하며 가게를 꾸리고 싶었어요. 가회동에 자리 잡아 문을 연 지 이제 2년 정도 되었는데, 아직까진 많이 알려지지는 않은 것 같아요. 조금 더 바쁘게 뛰어야죠. 저의 디자인 작업을 세상과 소통하고 싶으니까요.” 요란하지 않은 고즈넉한 동네를 배경 삼았지만, 그녀의 모습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디자인’을 ‘좋아하는 공간’에서 하고 있다는 열정이 느껴졌다.
한정현은 소품을 비롯해 테이블, 시계 등을 디자인하고 있지만 유난히 편애를 하는 가구는 ‘의자’다. 대표작인 ‘텔레사피언스’, ‘벤치 포 투’는 물론이고 마시고 남은 샴페인의 코르크를 하나씩 끼워 완성해 나가는 ‘코르크 앤 코르크’ 등도 모두 의자다. “가구디자이너라면 모두 매력을 느끼는 오브제죠. 사람과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몸에 가까이 닿는 가구야말로 의자인 것 같아요. 그래서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기도 하고요.” 가구디자이너로서 왕성히 활동하면서 상명대학교 공간디자인학과 출강과 각종 전시, 숍 운영까지 쉴 틈 없이 바쁜 요즘이지만 여전히 그녀는 살아서 이야기를 지닌 가구를 디자인한다. 그녀의 실험적인 가구 놀이터, 체어스 온 더 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