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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고왔던 그녀의 얼굴에 수염이 났어요. ‘수염 난 여자’ 홈페이지

2005-06-07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여자를 상상해 보라.’
그 동안 수염은 거친 남자의 상징으로 신체적으로 여성과 남성을 구별 짓는 커다란 특징이 되어왔다.
‘수염 난 여자’의 홈페이지(www.pilsun.pe.kr)는 수염을 모티브로 그녀의 삶을 조심스럽게 풀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남성과 다를 것 없는 그녀의 독특하고 씩씩한 삶이 그대로 녹아 내리고 있다.
단지 여성에게는 보이지 않는 수염이 존재할 뿐이라고 말하는 디자이너 구필선.
그녀의 색다른 끌림이 있는 홈페이지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취재 | 권영선 기자 (happy@yoondesign.co.kr)


3년 전 갑자기 가세가 기울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갑작스럽게 불어 닥친 여러 가지 불운으로 무척 힘이 들 무렵, 문득 거울을 보았을 때 그녀의 얼굴에 덥수룩하게 난 수염이 환영(幻影)처럼 보였단다.
이제는 더 이상 약한 여자가 아닌, 세상과 맞서는 거친 남자와 같이 살라는 일종의 아버님의 전언이 아니었을까.
그 당시, 너무도 힘들어 하는 그녀에게 세상은 숨이 멎을 것처럼 버겁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구필선 디자이너는 그동안 운영해 오던 홈페이지의 이름을 ‘수염 난 여자’로 바꾸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덥수룩하게 얼굴을 뒤덮고 있는 수염을 깨끗이 깎아버릴 만큼 말이다.
외형만으로 사람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겉모습만큼 그 사람의 심경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고 말을 하는 그녀. 그녀는 자신의 홈페이지를 자신의 얼굴과 같다고 말을 한다.
그동안 힘들었던 과거, 열심히 노력하는 현재,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그녀의 미래가 이 공간에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곳은 다른 개인 홈페이지와 달리 유독 간결한 형식이 눈에 띈다. 메인 이미지 하나와 7개의 게시판으로 이루어진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곳을 만드는데 고작 한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단다.
웹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에 어느 누구보다 보여주는 것에 신경을 썼을 것도 같은데, 너무나도 간결한 형식이 오히려 놀라울 정도이다.
왜 이렇게 간결하게 홈페이지를 만들었냐는 질문에 그녀는 웹 디자이너가 홈페이지를 잘 만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지만, 그녀는 웹 디자이너라는 자신의 직업에 얽매여 단지 형식적으로 남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그런 곳을 만들기 보다는, 자기자신에게 충실한 그런 곳을 만들고 싶었다며 멋쩍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작 이곳에서 말하고 싶은 것을 채 풀어 놓기도 전에, 다른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보여주는 것에 너무 연연하다 보니, 홈페이지 만드는 것을 시작도 하지 못하고 끝내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이 곳은 무심코 머리 속에 스쳐 가는 일상사를 적는 ‘낙서장’과 가끔 혼잣말을 하거나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듯 짧게 글을 남기는 ‘하루하루’, 그리고 작업을 했지만 상업적으로 쓰이지 않는 것들을 모아놓은 ‘휴(休)지통’, 누구나 글을 남길 수 있는 ‘그냥 가면 섭하지’ 등의 게시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2001년 삼성 화재에 파견직을 나가 있을 때, 그녀는 무료한 점심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가방을 사다가 그 곳에 그림을 그렸다. 일종의 취미활동으로 시작을 한 것이었는데, 그때 그 가방을 본 남자 직원분이 무척이나 맘에 들었는지 팔라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다른 직원들도 덩달아 그녀에게 티에 그림을 그려 팔라고 말을 했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게시판에 작게 물건을 팔 수 있는 장터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구필선 디자이너가 물건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계기이다.

일 외에 몰두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무척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시작한 일은 어느새 그녀 삶에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게 하게 되었고, 일 외에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삶의 작은 행복을 안겨주었다.

작은 게시판에서 시작한 그녀의 쇼핑몰은 물건을 판다는 성격보다는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라는 개념이 강하게 작용한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제품을 받아본 회원들의 후기들이 빈번하게 올라오곤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인천 부두에서 일하고 계신 아주머니로, 물고기 그림을 즐겨 그리던 그녀에게 딸과 함께 나누어 가질 커플티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단다.
앞면에는 큰 물고기가 잡히는 모습을, 뒷면에는 엄마와 딸이 낚시를 하고 있는 모습을 그려 보내주었는데, 후에 후기로 올라온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티셔츠의 모녀 그림과 사진이 너무나도 똑같았던 것이다. 그 후에도 그 아주머니는 그녀의 쇼핑몰을 자주 이용하고 있으며, 지금은 서로의 안부를 물을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만든 견우와 직녀티는 커플끼리 서로 나눠 입으면 사이가 좋아진다고 소문이 나서 고객들이 즐겨 찾는 단골 메뉴가 되었다.

어느덧 디자이너 8년차가 된 구필선 디자이너는, 회사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수치적으로 80%가 넘을지 모르겠지만, 마음만큼은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붓고 싶다고 말을 한다.
일을 할 때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되, 다른 곳에서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갖고 싶다는 말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가짐을 잃지 않았기에 바쁜 일과 중에도 한결같이 홈페이지를 이렇게 열심히 운영해 올 수 있었다.
같은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웹 디자이너 친구들이 힘이 든다고 말을 할 때마다 그녀는 일 이외에 집중 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찾아보라고 조언한다.
그녀 또한 일상이 힘들고 지칠 때, 그 벽을 깨기 위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거창할 필요는 없다. 다만,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그 안에 무엇을 채우고,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갈지를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녀의 홈페이지에 누가 와서 글을 남긴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머릿속에 수없이 스쳐가는 바람 같은 생각들을 담아 둘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에 동감하는 많은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고, 그녀의 작업물이 그려진 옷들을 갖고 싶어하는 매니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큰 성공을 거든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작은 일일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는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길이 열린다는 가능성을 열어 준 계기가 되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참 많다. 몇 년 전 그녀가 고민했던 불운했던 과거를 돌이켜 보면 노력하는 사람에게도 하늘은 기회를 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일 또한 자신이 성장해 가는 하나의 과정처럼 느껴진다는 그녀는 이제 웹 디자이너 구필선이 아닌 '수염난 여자' 홈페이지의 주인으로 작은 꿈들을 키워가고 있다.

Jungle : 티셔츠와 핸드폰 액세서리를 만들어 파는 일이 현재하고 있는 웹 디자인과 다른 분야라고 할 수 있는데,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중고등학교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지만 ‘그림을 그리면 밥 곯는다’ 는 부모님의 심한 반대로 인해 무역학과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학부 과정을 거칠수록 더욱 미술과 관련된 일을 더욱 하고 싶었고, 그래서 생각을 한 것이 전공에 상관이 없이 할 수 있는 웹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손으로 작은 소품 만드는 것을 즐겼다.
우연히 ‘델로스’라는 분이 자신의 사이트에서 티에 그림을 만들어 파는 것을 보았다. 취미로 만들어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하던 것을 조금 발전시켜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지금의 사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Jungle : 홈페이지를 꽤 오래 전부터 운영해 왔다고 들었다.

98년도에 처음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그 당시만 해도 웹 디자이너가 무엇인지 많은 사람들이 모를 때였다. 2000년, 2001년 사람들이 학원을 다니고 웹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홈페이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 10번이 넘게 리뉴얼을 했던 것 같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만드는 시간과 보여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안에 무엇을 담고 어떤 말을 전달하고 싶은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홈페이지를 그럴 듯 하게 꾸미는 것보다 누구나 쉽게 들어와 찾을 수 있고, 말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더 나다운 공간이라는 것을 느꼈다.

Jungle : 홈페이지 안에 무엇을 담고자 노력했는가?
솔직히 기업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보다 개인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기업은 그 고유의 아이덴티티가 명확히 나타나있는 경우가 많은데 반해, 개인은 특징이 명확히 나타나 있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나 또한 나만의 색을 표현한다는 것에 늘 부담감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꾸미는 이 곳 또한 과연 어떤 나만의 색이 담아야 할까를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명확히 규정되지 못하는 이 모습 또한 나이기에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Jungle : 오랫동안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보람을 느꼈던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

평소에는 담고 있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주절주절 이야기할 기회가 없다. 그런 나의 삶의 이야기들을 홈페이지를 통해 이야기 하고 있다. 아무한테도 말하기 전에 이 곳에 글을 쓰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옷이 팔리는 것도 물론 기분이 좋지만 내가 쓴 글을 다른 사람이 읽어주고 카운트가 올라가는 것을 볼 때,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내 생각에 공감을 해주고 가끔 찾아와 따뜻한 글을 남겨주는 사람들을 볼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Jungle : 티셔츠는 만드는데 얼마나 걸리고, 하루에 몇 개나 만드는지 궁금하다.
그림마다 다르긴 하지만, 티셔츠 하나를 그리는데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것 같다. 예전에는 보통 하루에 4~5개를 만들었는데, 최근에는 2~3개 정도를 만들어 팔고 있다.
면 티는 보통 동대문에서 떼어다가 그림을 그려 만들어 팔곤 했는데, 최근에는 더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무지 티 전문점을 이용하고 있다.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만들어 입는 것은 누구나 손 쉽게 집에서 할 수 있다.
자신이 맘에 들어 하는 티셔츠에 그 동안 생각해 두었던 혹은 입고 싶었던 무늬를 그리고 완성이 된다. 주말을 이용해 연인 혹은 가족과 함께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수 있는 가족 티, 커플 티가 탄생할 것이다.

Jungle : 앞으로의 운영 계획은 무엇인가?
더 잘해보려는 마음은 있지만 그런 부담감은 스스로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처럼 꾸준히 홈페이지를 운영해 나갈 것이다. 앞으로 작은 꿈이 있다면 오프라인에 작은 샾을 내고 온라인에서 지금과 같이 내가 만든 물품들을 판매하고 싶다.
아직은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할 것이 더 많기에, 잠시 순위를 미루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더 열심히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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