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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리뷰

예술가, 좀비를 소환하다 ②

2012-07-02


나는 좀비영화를 그다지 즐겨보지 않는다. 부패한 시체에 대한 거부감도 거부감이지만 좀비라는 존재 자체가 가진 상징성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래 좀비란 부두교의 주술로 시체를 부려 힘든 농사일을 대신 시킨다는, 약간은 건설적(?)일 수도 있는 산업역군이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모 제약회사의 실수나 원인 모를 바이러스 유출로 인해 나타나며 당연히 농업발전 따위는 아랑곳없이 그저 사람을 산 채로 뜯어먹는데 여념이 없는 존재들로 전락되었다. 그러나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하게 변질되어 버린 이들의 이야기에 현대인의 다수가 갈채를 보내며 매년마다 영화표를 끊는 이유는 이들의 모습이 다분히 현대인의 삶을 반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배불리 밥을 먹기 위해 타인을 갈취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기 위해 똑같은 행동만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한때는 그래도 멀쩡한 인간이었을 이 좀비들의 행태가 거울에 비추어진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았다. 내가 좀비영화를 그다지 즐기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점이 찔려서이다.

하지만 여름이 다가오고 납량특선 공포영화가 유행하기 시작할 즈음, 좀 생소한 좀비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들의 존재 속 숨겨진 의미를 표현해 줄 수 있는 작가들이 좀비를 주제로 단체전시회를 한다는 것이다. 많이 궁금했고 그만큼 기대했다. 예술가들은 전문적으로 사물 속의 의미를 찾아나서는 직업군의 사람들인데, 과연 어떻게 좀비의 의미를 표현했을까. 혹시 그들은 내가 떠올리지 못했던 무언가를 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중 몇몇은 어딜 가나 좀비가 횡행하는 이 사회에 대해 무언가 희망 정도는 말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비록 덧없을 지라도 말이다. 전시회의 타이틀은 '좀비 666, 전시장소는 갤러리 애비뉴, 기간은 6월6일부터 17일까지였다.

글 | 남대남 일러스트라이터( statchs@hotmail.com)

2층은 아랫층과는 분위기가 판이했다. 일층의 어떤 그림은 지나치게 주제에 사로잡힌 나머지 개인적인 감정 표현을 통한 공감 호소의 메세지보다 정신적인 디오라마 연출에 가까웠던 작품이 가끔 보였던 반면, 이층의 몇몇 그림들은 아래층과 전혀 다른 분위기와 호소를 가지고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선 눈에 확 띄이는 곳에 사진이 걸려있었다. 한참을 들여다보았지만 무엇을 찍은 건지는 알 수 없었는데, 사실 피사체의 정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묘한 에로티즘까지 느껴지고 있었지만 아무리 이상하다 해도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것이라면 마음 내키는대로 상상을 가져다 붙이면서 이리저리 즐겨보는 것이 사람 심리인지라 나 역시 그 기묘한 느낌이 마음에 들어 한참동안 서 있었다. 노예의 초상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좀비전에 걸려있다라. 알 듯 모를 듯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차라리 모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다크 포스가 작렬하는 멋진 사진이었다.

조그만 룸에서는 동영상을 상영 중이었는데, 작가를 보니 스포츠투데이에 구로막차 오뎅 한개피를 몇 시즌째 연재하던 김은구 작가 아닌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상당히 유명한 성인만화였다. 여하간 구로막차의 작가가 동영상 제작에 일가견이 있어 단편 애니메이션을 여럿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의 동영상 작품을 실제로 보긴 처음이었다.

영상은 그림자 연극처럼 흑백으로 이루어진 작품이었지만 상당한 수준이었다. 초승달 모양의 머리를 가진 기묘한 생물체가 어떤 구식 자전거 앞에서 고개를 까딱거리는 작품이었는데, 간단한 형식의 애니메이션이 무한반복되는 옛날 영화필름같은 느낌은 주제인 좀비와 썩 잘 어울렸다. 이 작가와 내가 가지고 있던 좀비에 대한 선입관은 상당부분 부합하는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단순히 세상 타령만 하는게 아니라 무언가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의지까지 엿보이는 것 같아 즐거웠다. 여기서 나는 아래층의 꽃좀비를 보며 받았던 고정관념 타파에 대한 충격의 상당부분을 회복할 수 있었다.

분위기를 휘어잡으면서도 대단히 낮익은 그림체이다. 기린 작가의 효도하자 시리즈. 오늘날의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연히 기억하듯겠지만 당시는 이런 때려잡자 김일성 류의 반공포스터가 대세를 이루던 시절이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보지 못해 잊고 지냈던 것들이다. 추억이 어린 조약돌을 전혀 생각지도 않은 바닷가에서 주운 심정이 되었다.

효도하자 시리즈가 주는 느낌은 다른 작품에 비해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우리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에도 좀비는 존재했을 지도 모른다는 너무나 이질적인, 그리고 좀 황당한 느낌에 그만 이층의 분위기가 단번에 휘어잡혀 버린듯 했는데, 마치 오래된 국민학교의 복도에 서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아련한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아랫층의 혼돈 속에서 추억어린 쉴 곳을 찾은 느낌이랄까. 이 그림이 아랫층에 있었다면 아마 효과는 반감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층의 전혀 다른 공간에 자리잡고 있어 충분한 매력을 남겨주었다.

2층에도 일등석은 절대 될 수 없는 우묵한 공간이 있다. 이제와서 생각하면 대체로 이 전시회장에 걸린 그림은 빈곤한 공간에 있는 그림들일수록 괜찮아 보이는 특징이 있는 것 같았다. 이 강렬한 대형 군상화는 그야말로 속사로 인한 에너지와 필력이 넘쳐흘렀지만, 뒤로 물러설 공간이 마땅찮은 곳에 반쯤 꺾인 채 걸려있어 한눈에 보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몇번을 노력했지만 포기하고, 절반씩 떼어볼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역시 주제에 지나치게 녹아든 나머지 좀비 묘사에만, 굳이 덧대어주자면 사회성 묘사에만 그치긴 했지만 거칠고도 빠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힘을 그림에 집어넣는 이유는 십중팔구 어떠한 의지의 표출이기 마련이고, 그러한 터치를 관객이 전달받게 되면 대개 의지와 욕구표출을 통한 감명으로 이어진다. 델로스 작가의 We were zombie 자체가 가진 한계의 상당부분은 이러한 힘의 공식에 의하여 해소되고 있었다.

뒤로 물러설 공간이 마땅찮은 장소에 걸려있었기 때문에 좋든 싫든 그림에 빨려들듯이 바짝 붙어 보아야만 했는데, 안전거리를 무시한 덕분인지 전면의 감상은 어려웠을망정 그림이 가진 힘은 더 강하게 다가올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떻든 이 그림도 물리적으로는 감상이 살짝 힘들었지만, 계단을 내려와 돌아가려는 순간 이 갤러리에서 제일 황당한 전시장소를 찾아냈다.

「일부러 이렇게 사진을 찍은게 아니라, 이게 최선이었다. 계단이 가로질러 놓여있었기 때문에 이 작품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위치에서 감상해야 했다. 아까부터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슬며시 화가 날 지경이었다.」


관람이 가능한 거리에 계단이 가로질러 놓여있어서 사실상 관람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숨은그림 찾기 하듯이 요모조모 찾아가며 즐겨야 하는 그림 같은데 무리한 자세를 시도하면 모를까 4미터 가량의 거리에서 여기저기 숨어있는 좀비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이다.

결국 난간에 기대어 바짝 다가가선, 문화시민답지 않은 자세를 취하고 나자 그림이 좀 보이기 시작했는데 백설공주의 사과에 얽힌 내용같았다. 이 갤러리의 큐레이터는 관람객에게 서커스를 시키기 좋아하는 모양이었나본데, 팔뚝이 뻐근해질 정도로 비스듬한 계단 난간을 힘주어 붙잡은채 고개를 젖히고 보려니 너무 곡예의 난이도가 높았다. 아무리 관람하는데에도 체력은 필요하다지만 이건 너무 심하다 싶어 이 작품의 관람을 포기했다.

이 역시 나중에 따로 사진을 구해야 했다. 숨은그림 찾기 수준의 아기자기함이 살아있으면서도 공간을 메꾼 퀄리티가 훌륭하고, 나름의 독립적인 스토리도 있다. 애초에 내가 기대했던 사회성은 아랑곳없이, 전혀 딴 소리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자신의 세계관에 충실한 작품이었지만 뭔가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좀비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작가라는 느낌은 받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걸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걸어두면 어쩌란 건가. 숨은그림 찾기 하다가 눈알 빠지는 줄 알았다.

대체적으로 전시되었던 작품들은 훌륭했다. 일단 동선을 포기하고 나자 기대했던 만큼의 정신적 포만감을 가질 수 있었고, 가외로 전혀 생각지 못했던 충격까지 먹은 채 꽃향기를 풍기며 돌아왔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작품은 훌륭했지만 전시는 훌륭하지 못했다.

전시는 관객에게 작품을 보여주는 또다른 시도이고, 그림을 걸고 조명을 배치하며 관람공간을 확보하는 일은 결코 가벼운 작업이 아니다. 그림에 걸맞는 제대로 된 액자를 끼우는 것만으로도 그림의 질이 달라질 수 있고,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마무리하여 관람객에게 제공하는 것이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으로서 잊기 쉽지만 대단히 중요한 또 하나의 과제일 것이다.

전시회의 기승전결도 그다지 남는 것이 없었다. 들어가자마자 눈길을 끌고, 분위기를 휘어잡아 뉘앙스를 각인시키는 작품은 여럿 있었지만 그것들이 다소 무질서하게 배치되어 동선이 엉키거나 온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경우도 몇 번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여운을 남겨 전시장을 나서는 관객을 배웅해 줄 작품. 즉 처음 볼 때와 두번째 볼 때의 느낌이 다른 작품도 제 위치에 걸려있지 않았다.

이는 다분히 어쩔 수 없는 전시장의 구조에 따른 문제였겠지만, 관람객은 그런거 일일이 기억해주지 않는 사람들이다. 나는 동선을 포기한 채 스스로 여운이 될 만한 그림을 찾아다녀야 했는데, 그런 내게 있어서 이 전시회는 어디까지나 단지 작품만 좋았던 전시회가 될 수 밖에 없었고 불가피하게 눈앞에서 놓쳐버린 몇몇 작품은 두고두고 아쉬워 따로 사진을 수배해야만 했다.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면전에서 대놓고 무시당한 느낌이 들어 화가 날 지경이었다. 관람객을 무시하는 작가라면 예술을 착각하는 작가에 불과한데, 이 전시회에 대고 흠잡을 곳 없다는 말을 하게 된다면 그건 단지 면피용 멘트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많은 작가들은 자신들이 단지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하는 것 같던데 이는 대단한 오해다. 작품을 만들었으면 그걸 보여주어야 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메시지가 모든 오해를 배제한 최선의 상태에서 관람객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그렇게 치밀하게 준비하여 열심히 전달한다해도 작품 자체가 중의적이라면 관객은 제 멋대로 자기 추억이나 경험을 덧붙여가며 열심히 오해하기 마련인데, 볼 기회마저 절반쯤 박탈해놓고 전시회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이는 거의 억지에 가까운 일이다.

전시회(展示會) , 펼 전자에 보일 시자. 제대로 펴 놓아야 보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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