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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리뷰

시간을 갈아입는 북커버 디자인

2008-08-19

읽기 위해 구입하는 책은 때로 수집욕을 불러일으킨다. 읽기 위해서든 수집하기 위해서든 독자의 마음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 것은 북커버 디자인이다. 책은 한 번 출간되면 그것으로 끝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스테디셀러라면 한 번쯤 옷을 갈아입게 마련인데, 출판사 ‘열린책들’의 책은 유독 옷을 자주, 잘 갈아 입히는 걸로 유명해 제법 마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다.

에디터 정윤희(yhjung@jungle.co.kr) | 사진 스튜디오 salt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도서 가운데 꾸준히 회자되는 책 중에 도스또예프스끼의 전집이 있다. 막심 고리끼로부터 ‘러시아가 낳은 악마적인 천재’라는 찬사를 받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은 2000년 6월 열린책들에서 출간한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을 통해 다시 한 번 주목 받게 됐다.
한편 2002년과 2007년에 새로운 디자인으로 출간된 반양장판과 보급판은 독자들로 하여금 도스또예프스끼라는 문호를 한층 쉽게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뛰어난 문학작품이자 소장가치가 있는 또 하나의 예술품으로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도스또예프스끼 전집은 총 19만부가 판매되는 기염을 토했다.

일명 ‘블루판’이라 불리는 이 초판본은 선종훈 작가가 전집을 위해 그린 도스또예프스끼 초상화가 삽입되었다. 파스텔, 콩테, 아크릴 등 혼합재료의 질감이 묻어나는 초상화를 메인으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 분위기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블루 톤이 배경으로 쓰였고, 도스또예프스끼의 친필 사인이 무게를 실어준다. 산돌성경체의 제목이 고전문학의 깊이를 한층 더해준 북커버 디자인으로 평가 받는다.
한편 책의 하드커버는 검은 표지에 도스또예프스끼의 친필사인을 음각으로 삽입하여 심플하면서도 중후한 분위기를 내었다.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초판본이 ‘블루판’이었다면 재판본은 ‘레드판’으로 불린다. 강렬한 빨강 바탕에 산돌성경체로 쓴 흰 글씨가 시선을 두 번 사로잡는 이 판형은 마치 도스또예프스끼를 염두에 두고 그린 것이 아닐까 하는 뭉크의 작품을 사용했다.
Workmen in the snow(1912), Death in the sickroom(1893), Self portrait between the clock and the bad(1940) 등 표지를 수놓은 뭉크의 그림은 소설 내용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미술과 문학이 결합된 또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었다.

초판 양장에서 재판 반양장으로 한결 가벼워진 도스또예프스끼 전집은 세 번째 전집을 출간하면서 한층 더 가벼워졌다. 전집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소프트커버로 출간한 것인데, 양장본으로 처음 출간됐을 때의 권당 가격이 9천원~2만원이었던 반면 소프트커버로 바뀌면서는 권당 7천8백원으로 가격을 인하해 초기 양장본의 절반도 안 된다. 하지만 마냥 가벼워지기만 한 것은 아니다. 레드판에서와 마찬가지로 뭉크의 그림을 표지로 채택해 무게감을 주되 강렬한 레드 컬러와 표지 서체를 각각 화이트 컬러와 Asia소설체로 바꿔 소프트커버의 가벼움을 살리면서도 이전에 출간된 전집에서 볼 수 있는 예술적인 흐름을 이어왔다.
또한 종전의 레드판은 표지 사이즈에 맞게 뭉크의 그림을 채워 넣었지만 보급판은 그림을 책등 부분까지 채우고 도스또예스프끼 심벌을 추가해 책장에 꽂았을 때 전집으로서의 통일감과 장식적인 면도 배려했다.

열린책들에서 출간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역시 도스또예프스끼 전집만큼 화려한 변신의 역사를 가졌다. 지금까지 <향수> 의 북커버 디자인은 네 번이나 바뀌었는데 그 때마다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독자들에게 소개되었다. 91년 출간된 <향수> 의 초판본은 저작사인 디오게네스(Diogenes)에서 나온 원서 표지와 동일한 디자인으로 출간되었다. 디오게네스가 전 세계에서 번역된 <향수> 의 표지가 동일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 소설 속 주인공인 천재적인 살인마 ‘그루누이’의 손에 향기를 빼앗긴 여자의 모습을 보는 듯한 유화 작품과 명조 계열 서체가 어우러져 한층 고전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95년에 두 번째로 출간된 <향수> 는 INI 외주 디자인 회사를 통해 의뢰한 북커버 디자인으로 한국 독자들의 취향을 고려하여 표지를 변경하기로 결정한 후, 여성과 향수 등의 소설 속 개념을 이미지화 해 표현한 것이다. 아라베스크 문양에 명조 계열 서체를 변형하여 디자인한 북커버 디자인은 소설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형상화 했다.
21세기로 접어든 첫 해에 독자의 취향 변화를 고려해 북커버 디자인을 바꾸기로 결정한 세 번째 변신에서 <향수> 는 본문에 등장하는 ‘흔적도 없고, 색깔도 없는’ 등의 표현에서 힌트를 얻어 북디자이너 이승욱이 본문 내용을 이미지화 하여 디자인했다. 본문 내용과 향수, 여성 등을 이미지와 하여 디자인된 북커버는 저작사인 디오게네스의 승인을 거쳐 출간되었다. 이 북커버 디자인은 양장에서 소프트커버로, 다시 미스터 노의 세계문학시리즈에 포함되기까지 유지되었다.
<향수> 를 원작으로 한 영화 <향수> 가 개봉되면서 다시 한 번 조명 받게 되자 네 번째로 변신을 감행하는데, 이 때에는 영화 스틸컷이 사용되었다. 지금까지의 북커버 디자인에 비해 직설적으로 소설 속 주인공이 저지르는 살인의 이유와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함축하고 있다. 표지 서체는 명조 계열 서체에서 스틸컷의 분위기에 맞게 변형하여 디자인되었으며, 실제로도 읽을 수 있는 미니북을 증정하는 이벤트를 펼치기도 했다.

프랑스 문단의 신데렐라로 좋거나 혹은 싫거나,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아멜리 노통브의 작품은 열린책들을 만나 한국에 차례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열린책들에서 출간한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은 2005년 7월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이전에 출간된 소설들은 새롭게 북커버 디자인을 바꾸었고, 이후의 책은 새롭게 변경된 디자인에 맞춰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2005년 7월 이전에 출간된 작품 가운데 <시간의 옷> , <사랑의 파괴> , <두려움과 떨림> 등은 본문 내용에 어울리는 분위기로 열린책들의 디자인팀에서 디자인하고 북커버 디자인에 알맞게 디자인된 서체를 입었다.

당시의 트렌드에 맞춰 다양한 북커버 디자인을 선보인 후 2005년 7월 <공격> , <머큐리> 의 출간을 계기로 북커버 디자인을 바꾸게 됐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통일하되 주 독자층인 20~30대 여성에게 어필할 수 있도록 일러스트레이터 경연미에게 북커버 디자인에 쓰일 일러스트를 의뢰한 것이다. 아멜리 노통브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살릴 수 있으면서도 기존의 출판 시장에 나와 있는 것과 다른 새로운 방식의 표지를 고민하다 찾은 해결책이었다. 경연미 작가의 라인드로잉 일러스트에 형광색으로 포인트를 준 뒤 산돌구운몽체를 변형하여 사용한 북커버 디자인이 완성된 것이다.


열린책들에서 출간되는 책들의 표지는 시간의 흐름에 열려있다. 그렇게 북커버 디자인을 열어둠으로써 러시아 문학 전문 출판사로서 다져온 입지를 발판으로 파트리크 쥐스킨트, 베르나르 베르베르, 움베르트 에코, 도스또예프스끼, 프로이트 등 걸출한 작가들의 고전을 국내 독자들이 신선하게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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