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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리뷰

한국의 빅 프로젝트 수행한 외국 디자이너

2008-05-13

한국의 대기업 CI 리뉴얼 바람을 일으킨 리핀컷 머서

SK의 CI가 지금의 모습으로 바뀐 것은 2005년이다. 제법 눈에 익숙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에 비해 의외로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소비자가 위화감 없이 받아들이고 친근감을 받는 CI라는 의미일 것이고, 이 리뉴얼을 단행한 리핀컷 머서의 역량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SK그룹이 워낙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선도하는 대기업이기 때문에 노출 빈도가 많아서 그렇게 느껴지는 점 또한 있겠지만 말이다. 기존의 SK CI가 상당히 딱딱하고 중화학공업 업체라는 인상이 강했던 것에 비해, 연 혹은 나비를 연상시키는 ‘행복 날개’를 형상화한 지금의 CI는 상당히 감성적인 느낌으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리핀컷 머서는 SK의 CI를 리뉴얼하기 전, 이미 1993년에 또 하나의 한국 최대 규모 기업인 삼성 CI를 리뉴얼한 바 있다. SK의 CI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데 비해, 삼성의 CI는 상당히 이성적이고 차갑기까지 한 느낌을 주는 것은 대조적이다. 삼성 CI는 외국 아이덴티티 회사들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진출하는 신호탄으로서의 의미도 있었다.
삼성이 외국 회사에 맡겨 CI를 교체한 것은 글로벌화가 시급하다는 절박한 위기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글로벌화에 초점을 맞춘 대기업들이 연달아 CI 리뉴얼을 단행했고, 국내 전문회사에 맡긴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아무튼 당시 대기업의 촌스럽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걸맞지 않았던 CI가 세련되게 바뀐 것만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단지 그것을 한국의 전문회사가 할 수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긴 한다.
리핀컷 머서는 1943년에 리핀컷&머질(Lippincott & Margulies)로 설립되어 CI를 전문으로 개발해왔다. 현재는 뉴욕, 런던, 보스턴, 파리, 두바이, 홍콩에 사무실을 두고 시티그룹, 엑슨 모빌, 맥도날드, 닛산, 코카콜라 등의 브랜드를 개발했다.

한화 CI 디자인에 등장한 뜻밖의 캐스팅, 카림 라시드

본래 한화그룹은 제조업 기반의 보수적인 기업이었다. 하지만 변화를 원하는 욕구는 강렬했다. 기업 이미지를 혁신하는 시작은 혁신적인 CI를 만드는 것이고, 어쩌면 슈퍼스타 디자이너이면서도 CI는 전혀 해본 적 없는 사람을 섭외하는 것은 그 자체로 혁신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화그룹은 스스로가 ‘상호 유기적인 그룹’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고, 평소 유기적인 곡선을 자주 보여준 카림 라시드를 기용하게 되었으며, 실제로 카림 라시드가 보내온 수백 개의 시안도 유기적인 곡선을 강조한 형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구나 제품 디자인을 그에게 맡기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카림 라시드가 CI를 디자인한 것은 외국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한화그룹이 그에게 CI를 맡긴다고 했을 때, 가장 놀라고 의아해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카림 라시드 자신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한화 CI는 한화그룹 자체보다 자신의 포트폴리오에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경력을 추가할 수 있게 된 카림 라시드에게 더 많은 영향을 남긴 프로젝트였는지도 모르겠다.


한국타이어가 세계에 진출하기 위해 선택한 파트너, 리서치 스튜디오스

한국타이어는 국제 시장에서 수출을 늘려가고 있었고, 단순한 외형적 꾸미기에 머물러 있던 기존 CI에서 벗어나 통일된 브랜드 전략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한국의 디자인 회사를 주축으로 작업하면서도 국제적인 디자이너를 프로젝트에 참여시키고 싶어 했다. 리서치 스튜디오스는 크로스포인트의 소개로 한국타이어의 CI 레노베이션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최종 결정된 CI는 타이어를 상징하는 오렌지색 심벌과 속도감을 보여주는 기울어진 로고 타이프로 구성되었다.
리서치 스튜디오스는 런던, 파리, 베를린 등에 직원을 거느리고 있긴 하지만 앞서 소개한 기업들과는 달리 소규모 스튜디오에 속하는 회사다. 하지만 한국타이어는 큰 규모의 회사보다는 오히려 실제 디자인 담당자와 직접 커뮤니케이션 하기 쉽다는 장점 때문에 작은 회사를 선택했다고 한다. 리서치 스튜디오스는 비록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1990년대에 포스트모던한 타이포그래피로 이름을 날린 네빌 브로디가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있는 곳이다. 살로몬, 도이치뱅크, 매크로미디어 같은 CI를 작업하기도 했다.


네덜란드 타이포그래피의 전통을 한국에 소개한 토탈 아이덴티티
하나로텔레콤 CI를 디자인하면서 혜성처럼 한국에 이름을 알린 토탈 아이덴티티는 전통적인 그래픽 디자인의 강국 네덜란드의 회사답게 세련된 색채 사용과 타이포그래피를 보여준다. 대표적인 사례인 현대카드의 경우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유앤아이(Youandi)’라는 전용 서체를 개발하고, 이를 카드 디자인의 전 영역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현대카드는 또한 국내 크레디트 카드 시장에서 컬러풀한 색채로 디자인이 마케팅 포인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신용카드라고 하면 금색과 은색 일색으로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보면, 토탈아이덴티티가 진행한 현대카드의 디자인이 한국 디자인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토탈 아이덴티티는 1963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토탈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지만, 2000년부터 디자인 프로세스에서 통합적인 아이덴티티 개발을 강조하게 됨에 따라 토탈 아이덴티티로 회사명을 바꾸었다. 현재는 네덜란드 4개 도시 이외에 독일, 벨기에, 한국에 각각 해외 지사를 두고 있다. 토탈 아이덴티티라는 이름답게, 단순히 CI만 디자인하는 것은 아니다. 네덜란드의 공간 디자인 그룹인 콘크리트(Concrete)와 함께 현대카드 ‘파이낸스 숍’을 디자인했다.

한국 대기업이 가장 선호하는 랜도 어소시에이츠

랜도 어소시에이츠와 한국의 인연은 198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금호㈜가 삼양타이어를 인수하고 새로운 BI를 개발하던 때였는데, 국내 디자이너들에게 만족하지 못한 금호㈜는 LA에 있는 회사를 섭외해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금호㈜가 보기엔 그 회사의 결과물조차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러자 LA의 회사가 추천해준 곳이 바로 랜도 어소시에이츠였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은 금호㈜가 금호아시아나라는 거대 그룹이 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 밖에도 랜도가 디자인한 국내 기업의 CI, BI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금호아시아나 외에 대표적인 클라이언트로는 LG, GS, KB, 신라호텔, 아모레퍼시픽, 삼성에버랜드 등이 있는데 대체로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로 진출하려는 목표를 가진 대기업이거나 혹은 업무 분야 특성상 외국인과 자주 상대하는 기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랜도의 작업물은 그림만 놓고 봐서는 뭐가 그렇게 대단한지 언뜻 알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작업물에는 랜도 브랜드 전략 팀의 치밀한 연구가 있었다는 차이가 있다.
이는 창립자인 월터 랜도(Walter Landor) 자신이 디자인 프로세스의 한 부분으로 리서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랜도의 전통에서 유래한다. 그중 하나가 ‘브랜드 드라이버(Brand Driver)’라는 브랜드 분석 도구로, 모든 브랜드의 표현물을 하나로 일관되게 묶어주는 핵심 콘셉트를 뽑아내는 시스템을 말한다. 이것은 짧으면서도 감동을 줄 수 있는 단어나 문장, 혹은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된다. 2002년에 선포된 국민은행 CI의 경우, 당시 국민은행과 H&CB 간의 합병을 놓고 두 은행의 화합이 구성원들 간에 중요한 목표로 떠오르고 있었다. 브랜드 드라이버는 이러한 구성원들의 바람과 비전을 담아 “리딩 더 웨이. 투게더(Leading the way. Together)”라는 문장으로 만들었다.
더불어 이는 기존의 보수적이고 서민적인 이미지에서도 탈피해 도전적이고 용기 있는 리더십으로 세계 시장에서도 금융계의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하려는 비전을 담은 말이기도 했다. 브랜드 드라이버는 해당 브랜드 전개를 위한 모든 아이디어의 구심점과 원동력이 되며, KB의 CI는 물론 다른 모든 기업의 CI 또한 각자의 브랜드 드라이버에 의해 개발되었다. 이 전략은 단순한 CI 개발뿐 아니라 이어지는 애플리케이션 개발을 위한 가이드라인으로도 활용된다는 면에서 특히 유용할 것이다.
랜도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본부는 홍콩에 있지만, 1987년에 설립된 랜도의 한국 지사는 2004년 3월부터 샌프란시스코 본사에 직접 소속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한국 클라이언트들이 본사와 일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객의 선택에 따라 랜도의 글로벌 네트워크(17개국 24개 사무소) 중 어느 곳과도 일할 수 있는 유연한 체제로 되어 있다. 홍콩 지사에서 총괄한 신라호텔 CI와 아모레퍼시픽 CI의 사례를 보면, 8개국의 사람이 근무한다는 홍콩 지사도 충분히 글로벌한 요구를 소화할 수 있으며 수준 면에서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업 디자인 세계의 전설이 된 폴 랜드와 솔 바스는 그들의 죽음 이후 자신들이 만든 디자인 전통을 더 이상 계승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랜도 어소시에이츠는 월터 랜도의 죽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이는 개인의 창조성에 지나치게 의존하기보다 시스템과 팀워크를 확립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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