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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월드리포트

오르세야 반갑다!

서수연  | 2003-07-13

우리들이 중, 고등학교때 미술책에서 자주 보았던 서양화가들의 작품을 볼수 있는 오르세 미술관은 19세기 이후의 인상파 미술관이다.

너무나도 먼 곳의 이야기들처럼 여겨지는 루브르 박물관의 작품들과는 달리 오르세에 소장된 작품들은, 아~ 이 작품! 하고 머리에 새겨진 화폭들을 연상해 내기에 익숙한 것들로 가득차 있다.

미술책과는 달리 작품의 크기가 너무 작은것에 실망하기도 하고, 사진과는 달리 색채나 질감이 두텁지 않고 한번에 칠해진 유화의 마티에르에 놀라기도 한다.

서양의 유화라는 것은 무조건 두텁게 칠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은 실재의 작품을 보지 않고, 사진을 통해서 보았기 때문인데, 반사광에 의해 기름성분의 유화가 질감이 두터운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림책에 나오는 것을 실재로 보게되면, 동양화의 한번에 그윽 획처럼 색들도 한번의 텃치에 의해서 발라진것들이 대부분이면 겹칠이나 떡칠이 있지 않다.

오르세에 오게되면 서양의 그림에 대한 환상이 깨지게 된다.

우리의 미술교육에서 실재로 만져보고 느껴보고 호흡할수 있는 작품들을 소장할수 있는 날은 언제일지?, 그러한 환경을 만들지 못한다면, 전시를 유치하여 교류전이나 기획전을 통해 실재의 눈으로 보아서 깨닫게 할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될터이다.

오르세에 전시된 작가들은 쿠르베, 바르비죵, 밀레, 도미에, 엥그르, 인상파작품들 : 툴루즈, 로트렉, 시냑, 마티스, 세라, 고갱, 고호, 루소, 세잔느, 피사로, 모네, 시슬리등이 있다

오르세는 1900년 7월 14일 세계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완공한 이곳은 원래는 기차역이었다. 1977년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현대미술관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면서 수년 간에 걸쳐 재건축 작업 끝에 1986년 12월 1일 오르세 미술관으로 다시 세상과 만나게 된다.

<사진1>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이라는 파격적인 작품.
너무나도 적나라한, 여성의 음부를 클로즈업하여 묘사한 쿠르베의 `세계의 비밀'이란 제목의 그림이다. 사실과 같아 보여서 소름이 돋는 듯하다.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이 작품은 당대에는 선정성 문제로 큰 논란을 일으켰지만, 지금은 이 작품을 음란물로 보는 사람은 없다.

번호로 작가실을 나누고 있다. 차례로 작가들을 만나보도록 하자.

1-3 * 앵그르, 샘 (캔버스에 유채, 163x80cm, 1820~1856)
신고전주의의 수장, 낭만주의적 테마인 나부를 즐겨 그린 만년의 걸잘, 관능이 부드러운 여체 위로 흘러내리는 이 그림은 샘의 요정을 그린 것. 완전하게 마무리 된 뎃생으로 인체는 조각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인물상 전체에 부드러움을 풍기게 하고 있다
* 들라크르와

4. 도미에

6. 밀레 민종과 이삭줍기.
* 만종 밀레 (캔버스에 유채, 55.5x66cm, 1857~59)
프랑스 농촌의 여성들의 강인함과 인내심은 밀레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내 쪽에만 빛이 비춰지고 남편은 그늘 속에서 그 존재가 희박하게 그려져 있다.
이 작은 그림의 제목이 "만종"인 이유는 퐁텐불르의 변두리 마을 샤이이의 교회 첨탑 때문이다. 1867년 만국박람회에서 격찬을 받은 이 작품은 벨기에의 남작에게 1천 프랑에 팔렸다가 50년 후 80만 프랑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 루소, 꼬로

7. 쿠르베-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이라는 파격적인 작품.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리지 않는다."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면 나는 그것을 그릴 수 있다"라고 말한 프랑스 화가 쿠르베(Courbet, Gustave 1819-1877)의 그림은 지나치게 실경 묘사에 치우친 불경스런 희화(戱畵)라는 비난을 받았다.

당시의 고전주의와 같은 이상화나 낭만주의적인 공상표현을 일체 배격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할'것을 주장한, 그의 "사실주의"는 회화의 주제를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한정하며, 혁신하고 일상생활에 대한 관찰의 밀도를 촉구한 선구자였다.

13. 1870년 이전의 드가

18. 1870년 이전의 모네, 르느와르의 1870년대 작품,
* 르느와르 Renoir, Pierre-Auguste (1841~ 1926)
"그림이란 즐겁고 아름다운 유쾌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고 말고요. 즐거운 일이랍니다.!" 만년에 르느와르 자신이 말한 것처럼, 그는 평생 밝고 빛나고 풍부한 색채의 그림들을 그렸다.
1880년대에는 작품의 중점이 영원하고 40세에 21살이나 어린 알린느와 결혼하였다. 63세이던 1904년에는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화가의 한 사람이라는 영광을 얻었다. 말년에는 심한 관절염에 의한 고통으로 더이상 붓을 잡을 수 없게 되자 붓을 팔에다 고정시키고 팔레트를 무릎 위에 놓고 여전히 제작을 하였다.

-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1876年作)
인상주의의 진정한 선언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 당시의 무도회와 야외 술집의 즐거운 분위기를 잘 살린, 유쾌하고도 건강한 삶으로 흘러넘치는 찬란한 작품이다.

맨 위층으로 올라가 보면,

30. 드가와 마네, 드가는 발레리나의 모습과 일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작품.

* 마네의 풀받위의 식사 Manet, Edouard (1832-1883)
마네는 선원이 되기로 했다가 포기하고 회화에 전념한다. 동시대의 비평가와 관중으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지만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유파의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859년 살롱전에 낙선하자 개인전을 열어 엄청난 물의를 일으켰고 끊임없이 비평가들의 약점을 건드렸다.

- 풀밭위의 점심식사(1863年作)
그 당시 비평가는 그림 속의 여인이 "이 이상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 없을만큼 알몸으로 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작가는 여성의 나체를 스스럼없이 대자연 앞에 내놓아 그 청신한 자연의 분위기에 걸맞는 인간의 본원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다. 이 작품은 나부만이 아니라 빵, 바구니, 천 등 정물의 표현도 뛰어나다.

- 올랭피아 (1863년작) 마네(캔버스에 유채,130.5x190cm)
침대위에 유연히 누워서 또렷이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이 나부만큼, 발표와 동시에 엄청난 물의를 일으킨 작품은 서양 미술사상 그 유례가 드물 것이다. 작품 속의 나부는 풍기면에서 보면 당시 사회에 대한 반역이며, 회화 표현에 있어서도 유럽 회화사에 대한 커다란 반역이기도 하다. 크림빛 나부, 흑인여자, 꽃다발, 침대, 검은 고양이 등이 교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오랭피아"의 전체적인 모티브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차용하고 있으며 모델의 오만한 자세는 고야의 "나체의 마하" 자세를 따르고 있다. 다만 우르비노의 시녀를 흑인하녀로, 강아지를 고양이로 대체했으며, 원근법에 의한 백경의 방을 없앴을 뿐이다.

우리는 조화로운 고전적 구도와 상아빛이 도는 백색피부, 몇 개의 거친 터치로 그려진 꽃다발의 참신한 기법, 오랭피아의 리본과 꽃 그리고 쇼올의 꽃무늬가 상응하여 만드는 아름다움과 밀도 높은 배경의 멋진 조화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살롱에 출품된 이 걸작이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 - 종교화 위에 걸려서 우산이나 지팡이로 찔리고, 돌팔매를 당해야 했을까? 문제는 작가의 태도이다. 창녀를 그린 것이다.

관람자들은 흑인 하녀의 시중을 받으며,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오랭피아"의 차갑고 도발적인 표정에 돌을 던진 것이다 "누드=여신과 요정"이라는 전통에 익숙해져 있던 그들에게 "현실의 여성"은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의도적인 색면의 명확함과 밝은 색채의 사용은 새로운 모색을 하던 젊은 인상주의 화가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32. 모네의 수련, 정원, 지베르니, 성당, 양귀비꽃,
* 모네 Monet Claude (1840-1926)
1883년 고향인 노르망디의 지베르니 쉬르엡트에 정착. 경제적으로 절박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잦았고, 뒤랑-뤼엘을 통해 1880년대에 가서야 그런대로 벌이를 하기 시작했다. 명성은 1889년 조르주 프티 화랑에서 열린 로댕과의 2인전 이후 찾아왔다.
1874년 전시회에 출품된 <인상, 해뜨는 광경> 은 인상주의 유파에게는 기념비적 작품이다.

- 인상, 해뜨는 광경(1873年作)
떠오르는 아침해의 풍경은 순간적으로 포착하지 않으면 않된다. 따라서 사진처럼 세밀하게 묘사할 겨를이 없어진다. 순간의 인상만을 잡아 그려봄으로써 자연의 색체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한 셈이다.

- 루앙 대성당의 한낮(1894年作)
1892년부터 2년 동안 모네는 루앙 대성당의 연작을 그렸는데, 그의 많은 연작 중에서 가장 연작다운 연작이라 할 수있다.

- 양산을 쓴 여인 (캔버스에 유채, 131x88cm, 1886)
풍경 속에 인물을 그려 넣은 구도의 탐구에 열중했다. 이 시기, 그는 이 테마를 풍경화가의 입장에서 또한 인상파의 관점에서 다루면서 인물을 감싸고 있는 빛에 특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18세의 슈잔느 오쉬데가 이 그림의 모델인데 후에 모네의 두번째 부인이 된다. 모델의 얼굴은 거의 그리지 않고 있으며, 모델의 개성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다만 모네는 양산에 의해 얻어진 그늘과 빛의 조화를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 아름다운 여인의 파스텔조로 표현한 르느와르, 파사로

35. 반고호의 전시실에는 <닥터 가셰의 초상> , <오베르 쉬르 와즈의 성당> <자화상>

* 빈센트 반 고흐
...사물의 딱딱한 모습에서 살아 움직이는 형태를 감지하는 예리한 감수성, 웅변과도 같은 표현력, 넘쳐 흐르는 상상력 등은 그의 친구들을 놀라게 한다. (옥타브 미르보)

- 해바라기가 있는 정물(1887年作)
고흐는 해바리기꽃의 강한 모티브를 발견하고 그것을 그리는 데 열중하였다. 대담한 노랑색을 둘러싼 불꽃같은 꽃잎이 잠재적인 정열을 만나 생명력 있는 작품으로 이루어진 느낌이다. 아를르시대 이전 파리에서 그린 작품으로 해바라기의 최초에 해당한다

- 고흐의 방(1888年作)
농부들이 쓰던 건장하고 카다란 침대, 무뚜뚝한 의자, 벽면에 걸려있는 자신의 작품 등 가구다운 가구가 없는 소박한 침실은 고흐의 성격과 가난한 아를르 시대의 생활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 측백나무와 별과 길(1890年作)
창에는 오렌지색의 불빛이 비치는 낡은 여인숙, 높이 뻗어오른 한 그루의 측백나무가 똑바로 검게 서있다. 길에는 하얀 말에 끌리는 노란 수레 한 대와 그 앞을 산보하는 두 나그네. 굉장히 로맨틱하지만, 이것이 프로방스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측백나무를 그린 작품중 특히 유명한 것으로서, '흙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꽃'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36. 세잔느의 상픽토와르산
신인상주의 화가들

* 세잔느
프랑스 회화사에 있어서 세잔느는 가장 위대한 천재 중의 한 사람이다. 세잔느는 감각과 눈을 중요시하며 인상주의의 본질을 간직하면서도, 테크닉의 면에 있어서 인상주의에 반발하고 있다. 그는 끈질기게 한 화폭에 여러번 때로는 몇년이 지난 후에도 손을 대곤 하는데, 그럼으로써 사물의 겉모습을 넘어 본질의 세계를 다시 구축하고 절대를 추구하고자 한다.

세잔느는 1904년 상징주의자인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그의 미학 선언은 "나는 자연에서 원통, 구 ,원추를 봅니다. 적절히 배치된 사물의 면과 선은 구심점을 향해 움직입니다." 이말은 그의 회화세계를 잘 설명해 준다. 세잔느의 후기 작품인 「바구니가 있는 정물」에서도 위에서 말한 원칙들이 구현되고있다.

- 생뜨빅뜨와르 산 (1885~1887年作)
생뜨 빅뜨와르 산의 탁월한 연작들은 이 예술가가 죽을때까지 여러차례 그려진다.

- 사과와 오렌지(1895~1900年作)
바로크적인 구도를 지닌 만년의 정물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사과나 오렌지의 경우 붉은색에서 노란색에 이르기까지 그 변화가 매우 아름다우며, 형태나 양감이 매우 잘 묘사되어 있다.

- 대수욕(1898~1905年作)
만년의 7년간에 그린 이 작품은 수많은 수욕도 중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출품 당시 젊은 화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전경, 중경, 원경 등 빈틈없는 논리적 화면구성은 세잔이 점차적으로 가슴 속에 쌓아왔던 고전적 정신의 결실이라 하겠다.


37, 38. 드가 Degas, Edgar (1834~1917)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에 변화에 따른 사물의 다양한 인상을 포착하려 한 반면, 드가는 동작이나 자세, 선 등 끈질기게 형태의 분석에 매달린다.

드가는 무희들의 생활상을 많이 그렸는데 그 자신이 발레를 특별히 좋아해서도 아니며 또한 여인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껴서도 아니다. 단지 무희들의 움직임과 광선, 시각의 다양한 변화 등이 그의 관심을 끌게 한 것일 뿐이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오직 작품 제작에만 열중했다.


고전주의의 영향으로 날카로운 관찰을 통한 훌륭한 솜씨의 데생과 사물형태의 윤곽을 명확이 선묘하려느 것, 그리고 강한 명암 및 채도 대비의 효과 등에 치중. 바른말 잘하는 독신남으로, 1876년 동생 르네의 파산때문에 상속받았던 유산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렸다. 사망할 때는 거의 실명 상태였다.

- 무용수업(1874年作)
이 작품은 유명한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쥘 페로가 지도하고 있는 무용수업 장면을 그리고 있다. 엄격할것 같은 선생님의 모습과 등을 긁고 있는 피곤에 지친 아이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 머리를 손질하는 여인 (1887~90年作)
1886년 마지막 인상주의자 전시회때 드가는 목욕하고, 세수하고, 몸을 말리고, 닦고, 빗질하는 여인들이라는 제목으로 한 무더기의 뛰어난 파스텔화들을 발표하며, 죽기 직전까지 이 테마를 거듭 다루게 된다. 이 작품은 그 중 눈에 띄게 성공한 작품중 하나이다.

41. 거셰 컬렉션
42. 루소
44. 고갱
20세기 미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고갱은 야성적인 색채와 이국적인 표현기법으로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원시적 감성을 찾아 타히티로 떠난 이래, 그곳에서 대표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어디로 가는가> 를 6년여에 걸쳐 완성했으며, 최후까지 붓을 놓지 않으면서 고독과 우울속에서 만년을 보냈다.

- 황색 그리스도(1889年作)
타히티 이전의 고갱 작품 가운데 걸작으로 꼽을 수 있다. 옥타브 미르보는 여기에 그려진 그리스도에 대해 "이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지닌 우수는 뭐라 말로 표현 할 수가 없다. 그 얼굴에는 무서울 정도의 슬픔이 깃들어 있다"고 평했다

- 흰말(1898年作)
고갱 자신이 매우 만족감을 표했던 작품으로서, 새로운 화풍이 모색된 이 그림은 향후 그의 작품 방향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 아름다운 엔젤(1889年作)
고갱이 신세를 졌던 젊은 부부에게 감사의 표시로 그 부인의 초상화를 그려준 것인데, 부부 모두 그림을 보고 화를 냈으므로, 고갱은 하는 수 없이 그림을 가지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 타히티의 여인들 (캔버스에 유채, 69x91cm, 1891)
"언제까지나 이어지는 침묵, 저들이 몇 시간 씩, 며칠 씩 앉은 채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나른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을 알겠다. 나도 그 모든 것들이 내안으로 스며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고갱의 반려가 된 여인들을 통해서 그는 마오리족 혼의 권태롭고 우울한 매력의 포로가 되어갔다. 타히티 여인을 그린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그곳의 식물적인 동시에 힘있는 생활의 이미지를 보여 준다.

- 이아오라나 마리아-마이아를 숭배한다.(1891年作)
그러나 나는 50호의 그림을 한점 그렸다. 노란 날개를 가진 천사 하나가 두사람의 타히티 여인에게, 타히티 사람인 마리아와 예수를 나타내고 있는 그림이다. 고갱이 타히티 작품에 종종 기독교적인 주제를 채택하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45. 신인상파의 창시자로 알려진 쇠라, 시냑.

* 쇠라
신인상주의의 대표자인 조르쥬 쇠라는 1891년 구협염에 걸려 서른 한살의 나이로 요절. 이전의 인상주의자들의 탐구를 배격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세잔느처럼 그들에게 반발하지도 않으며, 일종의 논리적 방법에 따라 우연하게 발견한 것을 체계화함으로써 그들의 계승자가 되기를 원한다.

- 라 그랑드 쟈뜨 섬의 일요일오후(1884年作)
이 작품은 신인상주의의 핵심적 요소인, 터치의 체계적 분할에 의거한 분할묘법을 사용하고 있다. 쇠라의 대표작이다.

- 포즈를 잡는 여인들(1887~88年作)
쇠라의 또 다른 대작인 이 작품에서 그는 그의 탐구를 보다 밀고 나가 극한에 달하도록 체계화시킴으로써 선들의 콘트라스트를 시도한다.

- 서커스 (캔버스에 유채, 186x151cm, 1891)
점묘법의 묘미를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신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쇠라는 색채학 연구에 열중하였으며, 들라크르와의 작품을 연구하며 색채의 대비와 보색의 사용법을 터득했다.
끝없는 실험정신과 과학적 태도를 견지한 쇠라는 급성 디프테리아로 91년 사망했다. 서커스는 이러한 쇠라의 미완성 유작을 앞서 발표된 관객을 부르는 광대와 동일한 주제를 그린 이 작품에서 쇠라는 친구인 앙리의 선의 상징주의를 응용하고 있다.
신랄하고 경이적인 작품 "서커스"는 장식적이라기 보다 거의 추상적으로 주지화된 성격을 가지고 있어 포비즘이나 큐비즘의 선구가 되었다.

* 시냑
몇 점의 초상화를 제외하고 시냑은 거의 전적으로 풍경화에만 전념했는데, 이 풍경화에 그는 쇠라의 분할묘법 방법을 적용하고 있다. 신인상주의에 대한 관심을 한 권의 저서 속에 체계화 시켰고, 죽을 때까지 이 주의의 철저한 신봉자였다.

* 피사로 Pissarro, Camille (1830~1903)
인상주의자 그룹의 모든 전시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유일한 화가인 피사로는 후일 "내 생애는 바로 인상주의의 역사와 뒤얽힌 것이었다."라고 말한다. 피사로는 시골의 자연과 농촌생활을 그리는 화가로서 자리 잡는다. 들과 언덕, 마을과 과수원, 집과 나무들을 주로 화폭에 담았다.

그는 1860년 살롱전과 1863년 낙선전에 풍경화를 선보였으며 모네, 르느와르, 시슬레와 더불어 인상주의 기법을 전개했다. 1870년대에는 파리 동북부의 퐁투아즈에서 농민들의 생활을 그렸고, 근처 오베르에 살던 세잔과 함께 작업했다.
- 오스니의 밤나무(1873年作)
- 붉은 지붕들(1877年作) -

* 시슬레
인상주의자들 가운데서 뒤늦게라도 성공을 맛보지 못한 유일한 화가였던 알프레드 시슬레. 그의 작품들은 활기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매우 섬세하며, 예민한 감수성과 시정을 위주로 하는 프랑스다운 전통에 잘 부합된다. 모네의 영향을 받아 그의 예술은 보다 어지러운, 김이 서린것 같은 경지로 나아간다..
- 뽀르 마를리의 홍수(1876年作)

47. 뚤루즈, 로트렉
"나는 이상이 아니라 진실을 행하려 한다" 로트렉은 그 시대의 증인이 되고자 했고 사회의 모습을 가차없이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 물랑루즈에서(1892年作)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왼쪽 끝에 있는 붉은 수염을 기른 노인은 에두아르 뒤자르댕, 그 오른쪽은 스페인 댄서 라마카로나, 이어서 사진작가인 세스코, 실업가이며 로트렉의 친구였던 모리스 기베르이다.

그 뒤쪽에서 붉은 머리를 손질하는 여인은 라 굴뤼, 그 왼쪽에 나란히 걷는 사람이 로트렉과 그의 사촌동생 타비에드 셀레이랑인데, 사촌이 키가 크기 때문에 키가 작은 로트렉과의 배치가 아주 유머스러하다. 오른쪽 끝의'녹색과 황색의 칸델라'라는 평을 받는 네리 양의 얼굴은 특수한 조명효과 때문에 가면을 보는 것 같은 특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중간층

55. 자연주의 화파
59~60. 상징주의 화파
72. 보나르

그림은 알고 있는 것만큼 보인다. 오르세를 방문한다면 위의 기본적인 정보는 보시고 구경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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