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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월드리포트

스페인 대가들이 다닌 미술 학교

김민지 | 마드리드 | 2012-09-17



프란시스코 고야가 강의하고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가 학생으로 다녔던 학교가 존재한다면? 이름만 들어도 어마어마한 세계 거장들을 줄줄이 배출해 낸 예술학교가 이곳 마드리드 중심부에 있다. 그림에 관한 관심이 조금만 있다면 아마 지금쯤 눈이 동그래지고 귀가 솔깃해졌을 것이다. 마드리드에 있는 미술관 중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Real Academia de Bellas Artes de San Fernando)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적막한 공간에서 스페인 미술과 일대일로 마주하고 싶다면 꼭 한 번 방문해야 할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글, 사진 ㅣ 김민지 마드리드 통신원(tominji@gmail.com)


1744년 펠리페 5세가 왕령을 내려 만든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는 프라도 미술관 다음으로 귀중한 작품들을 1,000여 점에 가깝게 소장하고 있으며 주로 고야, 수르바란, 리베라, 무리요, 벨라스케스 등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의 스페인 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는 아카데미의 회원 작품만을 전시해오다가 문호를 개방한 이후 많은 미술품을 반입하여 현재는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마드리드 미술학회의 본부이기도 하다. 주로 마드리드의 많은 관광객들은 프라도에서 고전 미술을 감상하고 레이나 소피아에서 현대 미술 컬렉션을 둘러보면 마드리드에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작품을 접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피레네 산맥 남쪽에 조용히 자리잡은 라틴 미술가들의 그림에 대한 정열을 확인하려면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를 놓치고 지나가면 안 된다. 이곳은 다른 미술관들과 달리 관람하는 관객들에게 치이지 않고 작품 하나하나에 진심으로 편안하게 다가갈 수 여유를 주는 몇 안 되는 귀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프라도 미술관,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거기에 티센 보르네미사까지 방문하면 고야의 그림은 백여 점이 넘고 피카소, 달리, 벨라스케스의 습작부터 완성작까지 줄줄이 만날 수 있어, 여행책자에서 소개하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명화” 같은 작품들을 보려는 사람들에게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는 그리 추천할만한 곳은 아니다. 다만, 스페인 미술 그룹의 2진 즈음에 있는 작가들의 탄탄한 기반을 감상하고 프란시스코 고야가 이젤 앞에서 던지는 예술적인 물음 앞에 진지하게 마주 서기를 원한다면, 이곳을 찾아서 작가의 눈이 나를 응시하는 시간을 온전히 즐겨보아야 할 것이다.


힘이 있는 구도에 빛과 색감의 뛰어난 표현이 어우러져 인상적인 작품 속의 고야는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을 무렵인 40세 전후반의 모습으로 보인다. 고야의 수많은 자화상 중에서 이 작품만이 모자를 쓴 고야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의 아들 하비에르의 말을 따르면, 고야는 해가 지는 황혼에도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챙에 촛불을 둘러 고정한 모자를 썼었다고 한다. 자화상에서 보이는 고야의 날카로운 시선과 평범한 작업 도구들 대신에 놓아둔 테이블 위의 잉크 스탠드와 종이들, 그리고 장식용 빨간 수술과 투우사의 재킷. 이 모든 것들이 일상적인 고야의 작업 모습은 아니라고 보인다. 고야는 남들보다 똑똑하고 강하며 남자다운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의식하고, 이를 자화상을 통해 드러내려고 한 것이 틀림없다.

이라는 이 작품은 마드리드에서 열렸던 성회일의 축제를 그린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매년 2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성회일)을 시작으로 부활절 전까지의 40일을 사순절이라고 하며, 이 동안은 결혼식을 금하는 등 철저한 금욕 생활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순절 기간이 시작되기 전에 신 나게 놀자는 취지에서 카니발이 시작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회일에 마드리드에서 벌어지는 정통카니발에는 광대들 뒤로 높이 쳐든 거대한 마네킹이 따라오는 행렬로 끝을 맺었는데 이 마네킹에는 자그마한 정어리가 붙어 있고, 군중의 행렬이 만사나레스 강둑에 이르면 그것을 매장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림 어디에도 정어리는 보이지 않고 마네킹 또한 가면으로 장식한 깃발로 대체된 것으로 보아, 고야는 이 그림 속에 당시 축제의 원형을 제대로 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혹자는 이 그림이 1813년 3월 프랑스군의 철수를 희화적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무서운 얼굴이 그려진 깃발 주변으로 즐겁게 춤추고 마시는 북적이는 관중을 순간적으로 정확하게 포착한 이 그림은 고야의 거대한 작품세계 속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거나 아니면 가까운 친구들만을 위해 그린, 창작의 규율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그림을 그렸다는 주장도 있다. 그림 정중앙의 깃발을 옆쪽에서 쳐다보면 마치 해골처럼 보이는데 이는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된 수많은 고야의 다른 그림들과 연계해 보았을 때, 고야가 이 작품에 숨겨둔 첫 번째 생각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축제에 대한 표현임에도 그림 자체가 어두침침하며 기괴하며 매우 음산하다. 이는 이 작품이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관점에서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악습을 비판한 고야의 “Disparates, 부조화 동판화 연작(1816-1817)”으로, 나아가 늙고 쇠약해진 상태에서 스페인 궁정과 교회의 타락에 대한 염증과 혐오감을 강렬하고 전율적인 주제로 그린 “Black Paintings(1820-1823)”로 이어지고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당시 고야는 질병으로 청각장애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공포와 히스테리의 발작과 같은 신경질환으로 심각한 건강상태에 처해 있었으며, 스페인도 나폴레옹 전쟁 후의 정치적 혼돈으로 혼란스럽고 어려운 상태였다.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는 연작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고야가 마지막으로 아마 가장 조심스럽게 작업한 판화이며, 동판화와 애쿼틴트(aquatint)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은 “수수께끼”라는 단어로 이 작업들을 표현하곤 하는데, 1815년경에 시작하여 끝을 맺지 않은 이 시리즈가 그에 대한 설명이나 어떠한 짧은 해설도 포함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시대에 걸쳐 작품의 제목조차 계속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 등의 <환상의 변덕들>로 불렸으나, 1864년 이라는 첫 번째 에디션이 나타난 후, 1918년경에 현재 이름인 , 의 <부조화 연작>으로 바꿔 불리게 되었다. 고야는 주제와 제목을 모호하게 한 채 ʻ모든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종과 어리석음에서 주제를 얻었다고 말했지만, 이 작품은 반사회적인데다 유명인사들을 지목한 것으로 여겨져서 공식적인 판매는 금지되었다고 한다.



노년기에 왕의 억압 정치 때문에 고야와 고야의 친구들은 대부분 망명길에 올랐고 고야는 더는 공식 초상화를 그리지는 않았지만, 친구와 친척들의 초상화와 자화상은 그 후에도 지속해서 그렸던 것 같다.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 시기 고야의 수많은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그 중 고야의 16번째 자화상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왼쪽) 고야가 70세 경에 그린 것이며 이는 고야의 자화상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노쇠기에 이른 나이지만 이 그림에 나타난 고야는 큼직한 얼굴, 깊이 꿰뚫는 듯한 예리한 눈, 굵은 목둘레, 딱 벌어진 가슴 등에서 강인한 의지력을 엿볼 수 있다. 색조 자체는 비교적 단조로우나 붓 터치나 텍스쳐 등에서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이 있어 고야의 깊은 정신적 내면세계를 잘 나타냈다는 평이다.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는 고야의 특별 전시실이 따로 있을 만큼 고야의 작품에 대한 비중이 높은 편이지만, 엘 그레코, 베로네제, 루벤스, 반 다이크 등 거장들의 그림을 비롯한 스페인, 이탈리아 작가들의 컬렉션도 대단한 편이다. 뿐만 아니라 마드리드에서 가장 번잡한 솔 광장에서 몇 걸음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조용한 침묵 속에서 스페인 미술의 저력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더욱 매력적인 곳이다. 그러므로 그림을 관람하는 것을 목적으로 스페인에 방문한 사람들은 꼭 빼먹지 말고 이곳에 들러 스페인 거장들의 손때가 그대로 묻은 학교와 미술관을 둘러보며 영감을 얻어가기를 바란다. 피카소와 달리 같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스페인 대가들도 이 학교를 다니면서 선배 화가들의 흔적을 느끼며 성장했다는 것을 잊지 마시라.


관련 사이트 http://rabasf.insd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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