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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나태양(tyna@jungle.co.kr) | 2015-09-10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에 공중에 달 줄 안 그는”.

시인 유치환은 〈깃발〉이라는 제목으로 제법 낭만적인 노래를 남겼지만, 흔한 7~80년대생에도 깃발이 슬프거나 애달픈 대상일까? 글쎄. 아침 조회 시간에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이라고 매일 같이 맹세하던 국민학교 세대에겐 좀 다른 얘기일지 모른다. 매스게임으로 경기장에 태극기를 수놓던 풍경. 인제 와서는 〈국제시장〉 같은 영화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촌극이지만, 국기 게양 시간이면 하던 부부싸움도 접고 태극기를 향해 경례하던 시절도 있었다.

에디터 | 나태양(tyna@jungle.co.kr)
 

태극기만 바라봐도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던 시대는 끝났다. 2007년 행정자치부는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라는 부분을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으로 수정하고, ‘몸과 마음을 바친다’는 구절도 삭제했다. 애국주의와 깃발의 구태의연한 결합은 많은 젊은이가 국기를 소 닭 보듯 하게 만들었다.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선전 기능은 이제 욱일기나 IS 플래그, *남부연방기에서 군국주의의 망령으로 발견될 따름이다.

*남부연방기(The Confederate Flag): 미국 남북전쟁 당시 노예 해방에 반대하던 남부연방을 대표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깃발로, 미국 내에서 여전히 철학적, 정치적, 문화적, 인종적 논란을 빚고 있다. 특히 올해 남부 캐롤라이나에서 벌어진 흑인 교회 무차별 총격 사건은 애플, 이베이, 월마트, 아마존 등 주요 기업에서 남부연방기 포함 콘텐츠 판매를 중단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애국 패러다임의 쇠락과 관계없이 시각 매체로서의 깃발은 여전히 건재하다. 해외여행이 세계인의 취미로 보급되면서 깃발도 새로운 생명력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현지 기념품 가게에 들르면 수도 없이 접하게 되는 플래그 응용 디자인을 보자. 이제는 내국인 아닌 외국인이 더욱 자발적으로 소비하는 깃발은 일종의 ‘관광재’인 셈이다. 깃발은 지역의 얼굴이자 아이덴티티고, 어떤 관광 디자인 상품보다도 효과적인 브랜딩 파워를 발휘한다. 더불어 전체와 집단이 아닌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회적 흐름은 깃발의 표현 가능성을 확장하고 있다. 현상 자체는 더할 나위 없이 고무적이지만, 으레 그렇듯이 디자인은 어디까지나 보기 좋아야 좋은 법이다.

디자인 및 건축 전문 팟캐스트 ‘99% Invisible’의 진행자 로만 마스(Roman Mars)는 올해 4월 “시티 플래그가 당신이 몰랐던 최악의 디자인일 수 있는 이유(Why city flags may be the worst-designed thing you’ve never noticed)”(TED 영상 보기)라는 강연을 펼쳤다. 이 강연에서 시카고 주의 깃발은 좋은 플래그 디자인의 모범으로 손꼽히는 반면, 샌프란시스코 주 깃발은 조목조목 조리돌림 당한다. 샌프란시스코의 깃발이 독보적으로 못생겼다는 사실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왜’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마스는 북미 기학(旗學) 협회(North American Vexillological Association, 이하 NAVA)가 제시한 ‘깃발 디자인의 다섯 가지 기본 요소’를 근거로 든다.

① 단순할 것(Keep it simple).
깃발은 어린이가 외워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해야 한다.

② 의미 있는 상징을 이용할 것(Use meaningful symbolism).
깃발의 이미지, 색채, 패턴은 그것이 상징하는 바와 관계있어야 한다.

③ 2~3가지의 기본색을 사용할 것(Use two to three basic colors)
빨강, 하양, 파랑, 초록, 노랑, 검정 등의 기본색 가운데 2~3가지를 사용하라.

④ 글씨나 인장을 사용하지 말 것(No lettering or seals).
깃발은 100피트 밖에서 휘날려도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깃발에 글자를 써야 한다면, 당신은 상징화에 실패한 것이다.

⑤ 독창적일 것(Be distinctive).

그렇다. 북미 대륙의 ‘깃발 덕후들’이 세운 기준에는 합리성과 설득력이 있다. 본 기사에서는 NAVA의 권위를 빌려 올해 나름대로 이목을 끌었던 플래그 디자인에 별점을 매겨보고자 한다. 다만 다섯 가지 요소를 ‘단순성’, ‘상징성’, ‘독창성’이라는 세 가지 평가 기준으로 축약할 것이다. 광의로 해석하면 3번 조항은 1번 조항에, 4번 조항은 2번 조항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국가를 위한 플래그: 뉴질랜드의 국기 리디자인

사실상 뉴질랜드 최초의 국기는 1834년 선정됐다. 뉴질랜드 무역 선박 보호와 마오리족의 독립성 공표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하자, 마오리족 족장들은 영국 선교사 헨리 윌리엄스(Henry Williams)가 제시한 디자인을 ‘부족 연합기(Flag of the United Tribe)’로 탄생시킨다. 안타깝게도, 부족 연합기는 영국이 네덜란드를 식민 지배하면서 6년 만에 단명했다.

영국 해군의 예비 함기(Blue sign)를 고스란히 이식한 현 국기는 뉴질랜드 독립 이후 비판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식민 역사의 시대착오적 파생물일 뿐만 아니라, 호주 국기와 흡사해 변별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뉴질랜드 내에서는 뜻밖에 비용, 역사, 영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2015년 〈뉴질랜드 헤럴드〉가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는 반대 응답률이 무려 53%를 기록했다.

2015년, 국기 교체 합의에 지지부진한 난항을 겪어 온 뉴질랜드가 마침내 칼을 뽑았다. 뉴질랜드 총리 존 키(John Key)는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국기 교체 국민 투표를 실제에 옮겼다. 정부는 세대, 지역, 성별, 종교를 대표하는 12인의 심사위원단을 구성하고, 오픈 크라우드로 공모된 총 10,292점 가운데 40점을 선발했다. 지난 1일에는 네 가지 최종 후보 디자인이 발표됐다.

결승전에 오른 작품들은 뉴질랜드를 상징하는 전통적 모티프인 은 고사리(Silver Fern)와 고사리 싹 코루(Koru)를 전면에 내세운다. 카일 록우드(Kyle Lockwood)는 바다를 상징하는 파랑, 마오리족의 희생을 상징하는 빨강, 뉴질랜드의 별칭 ‘긴 흰구름의 나라(Land of the Long White Cloud)’를 상징하는 하양으로 ‘Silver Fern(Red, White and Blue)’을 완성했다. 앤드류 파이프(Andrew Fyfe)의 코루 모티프는 새로운 삶, 성장, 힘, 평화를 상징하며, 앨로피 칸터(Alofi Kanter)의 디자인은 뉴질랜드 정부 마스터 브랜드 로고의 변형으로 알려졌다.

뉴질랜드는 최종 대안을 가려내기 위해 11월 20일부터 12월 10일까지 우편 국민 투표를 시행할 예정이며, 선정된 디자인은 2016년 3월 기존 국기와 다시 겨루게 된다.

개인을 위한 플래그: 니키 곤니센(Nikki Gonnissen)과 피에케 버그만즈(Pieke Bergmans)의 ‘JÁ!(Now!)’ 깃발 시리즈

국가가 아닌 개인을 위한 플래그, ‘JÁ!(Now!)’ 깃발 시리즈는 네덜란드 디자인 스튜디오 ‘토닉(Thonik)’의 니키 곤니센(Nikki Gonnissen)과 네덜란드 디자이너 피에케 버그만즈(Pieke Bergmans)의 협업으로 탄생했다.

‘JÁ!’는 2015 브라질 디자인 비엔날레(2015. 05. 15~2015. 07. 12)의 개최 도시 플로리아노폴리스(Florianoploris)에서 펼쳐진 장소 특정적 퍼포먼스다. 1979년 플로리아노폴리스 한복판에서 벌어진 군부 정권 대항 시위로부터 영감을 얻은 니키와 피에케는 ‘시적이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오늘날 브라질 민주주의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고자 했다. 공동으로 디자인한 배너, 개인 플래그, 레터링 티셔츠가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한 명당 한 표(one man – one vote)’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제작된 ‘JÁ!’ 깃발 시리즈는 플로아노폴리스 지역의 전통적 가옥들을 모델로 삼았다. 총 28점의 깃발은 파사드, 난간, 문양, 색채 등 실제 가옥의 독자적인 형태를 그래픽화 함으로써 개인의 자주적 아이덴티티를 상징한다. 니키와 피에케는 완성된 깃발을 건물 거주자들에게 전달한 뒤 사진 촬영을 위한 포즈를 취해달라고 부탁했고, 해당 주민들은 강렬한 제스처를 취하며 삶에 대한 이야기와 정치적 비전을 공유했다. 플로리아노폴리스 사람들의 바람은 그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를 낼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다고.

 

기업을 위한 깃발: 애플의 ‘실리콘 밸리의 해적’

“해군에 가입하느니 해적이 되는 것이 낫다( It’s better to be a prate than join the navy).”

맥 그룹이 급성장하던 1938년, 스티브 잡스가 매킨토시 팀과의 비공식적 미팅에서 남긴 전설적 강령이다. 군대처럼 관료주의화 되어가는 조직에서 구성원들이 ‘반항적인’ 초심을 지키기를 바랐던 잡스의 슬로건은 매킨토시 팀에 대단한 감화를 주었다. 특히 이 ‘해적’이라는 명칭이 구성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에 매킨토시 팀의 프로그래머 스티브 캡스(Steve Capps)는 해적이라면 깃발이 필요하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당시 매킨토시 부서는 밴들리 3(Bandley 3) 건물로 이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밴들리 3 건물은 애플 캠퍼스의 다른 빌딩들처럼 별 개성이 없었다. 캡은 즉흥적으로 검은 천을 사서 직접 깃발을 바느질하고, 디자이너 수잔 카레(Susan Kare)에게 천 위에 해골과 십자 모양 뼈다귀를 그려달라고 요청한다. 카레는 해골 위에 안대 대신 무지개 애플 로고를 전사해 깃발을 완성했다. 캡은 월요일 아침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전날 밤 10시 위험을 무릅쓰고 깃발을 달았고, 이후 ‘실리콘 밸리의 해적’은 매킨토시 팀의 아이덴티티로서 1년 반 이상 밴들리 3 건물을 장식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다.

현재 각국 애플 스토어 입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애플의 사기(社旗)는 심플하지만 ‘포스’가 넘친다. 검은 바탕에 애플 로고를 그려 넣은 디자인에서는 여전히 ‘해적’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애플은 9월 9일 신제품 발표 이벤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샌프란시스코 빌 그레엄 강당 파사드에 게양된 애플 깃발 사진을 공개해 기대감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한편, 2014년 수잔 카레는 ‘실리콘 밸리의 해적’을 다시 제작한다는 소식으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본인의 회사 개인 공간에 걸 수 있도록 똑같은 깃발을 제작해달라고 요청한 한 애플 직원의 편지가 발단되었다고. 카레는 실제로 온라인 샵에서 깃발을 판매했는데, 깃발 자체보다는 대담한 가격 책정이 돋보였다(1,900달러~2,500달러).

사회 평등을 위한 깃발: 레인보우 플래그(Pride Flag)

1978년, LGBT의 자부심과 사회 운동을 상징하는 레인보우 플래그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티스트이자 인권 운동가인 길버트 베이커(Gilbert Baker)는 깃발에 회화이나 옷, 로고와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있음을 발견한다. 바로 ‘선언’하는 기능이다. 그는 굳이 ‘게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아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상징이 필요하다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성 소수자를 위한 플래그 제작을 결심한다.

레인보우 플래그 디자인은 주디 갈랜드(Judy Garland)의 곡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와 히피 운동에서 영감을 얻었다. 초기 디자인은 핫 핑크(섹슈얼리티), 빨강(삶), 주황(치유), 노랑(햇빛), 초록(자연), 청록(마술/예술), 인디고·블루(평온/조화), 보라(영혼)의 8개 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30명의 자원가가 손수 바느질하고 염색해 완성한 두 장의 플래그는 ‘게이 프리덤 데이(Gay Freedom Day)’ 퍼레이드를 장식했다.

이후 레인보우 플래그의 수요가 증가하자 ‘파라마운트 깃발 회사(Paramount Flag Company)’가 재고가 충분한 7색 천으로 깃발 생산을 시작했고, 베이커 역시 패브릭 상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색이라고 판단하고 핫 핑크를 포기한다. 7색 레인보우 플래그는 1978년 다시 한 번 개정되는데, 가로등에 수직으로 걸면 중앙 부분이 모호하게 보인다는 이유였다. 청록색을 제외함으로써 완성된 빨강/주황/노랑/초록/파랑/보라의 6색 레인보우 플래그는 현재까지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무지개는 LGBT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모티프로 정착되었다.

레인보우 플래그는 올해 6월 미국 대법원이 동성결혼 합헌 결정을 발표하면서 다시 한 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레인보우 플래그를 든 사람들이 전 세계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무지개 필터를 적용한 프로필 사진들이 SNS를 도배했다. 미국 정부는 대법원의 결정을 기념하며 백악관을 무지개색 조명으로 물들였고,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는 레인보우 플래그를 소장 컬렉션에 포함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올해 제법 주목 받았던 플래그 디자인의 배경과 역사를 개괄하고 별점을 매겨 보았다. 이 채점표에 NAVA나 로만 마스가 동의할지는 미지수지만, 깃발이 국가나 거대 기관의 부속물이라는 바운더리를 벗어났다는 데서 의미를 찾고자 한다. 1인 1깃발 시대를 기원하며, 통계와 깃발 디자인을 접목시킨 Nadeem Haidary의 인포그래픽 작품 소개로 글을 끝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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