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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한국광고 120년의 고백

2012-05-31


한국 광고의 역사와 광고로 표출되는 현대사회와 대중의 가치를 탐구하는 전시, 「고백 : 광고와 미술, 대중」展이 8월 19일까지 일민미술관에서 열린다. 전시 타이틀인 ‘고백(告白)’은 숨겨놨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의미의 말이기도 하지만 한국 광고사에 있어서는 개화기, 광고를 뜻하던 최초의 용어이기도 하다.

‘고백’전은 1부 ‘한국광고 120년’과 2부 ‘8가지 키워드의 광고와 미술, 대중’, 두 가지 주제로 구성된다. 일민미술관 1층에 전시된 ‘한국광고 120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광고인 ‘덕상 세창양행 고백’부터 개화기, 일제 강점기, 경제성장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주요 광고들을 시대순으로 선보인다. 그리고 2부인 ‘8가지 키워드의 광고와 미술, 대중’에서는 성공(Success), 미래(Future), 섹슈얼리티(Sexuality), 수퍼 파워(Super-power), 정체성(Identity), 신뢰(Trust), 내러티브(Narrative), 하이퍼 리얼리즘(Hyper-realism) 등 소비자를 설득시키는 광고의 8가지 키워드로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를 탐구한다.

매거진정글에서는 ‘고백’전의 1,2부를 두 번에 걸쳐 들여다보고자 한다. 먼저 1부인 ‘한국광고 120’년을 통해 한국광고의 역사와 지나온 광고들이 비추던 시대상을 연대순으로 살펴본다.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자료제공 | 일민미술관(www.ilmin.org)


근대광고 태동기1876-1910

한국 최초의 근대광고인 세창양행 ‘고백’ 광고가 「한성주보」4호(1886. 2. 22)에 실린 이후, 한일병합이 조인된 1910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신문뿐만 아니라 잡지, 전단, 간판, 전신주에 다양한 광고들이 등장했다. 광고가 보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 것은 1896년 창간된「독립신문」으로, 이후 10여년 사이에 광고의 개념이 거의 정착되었다. 옥외광고, 비교광고, 의견광고, 신년축하광고, 간판, 통신판매광고 등 현대광고의 원형들이 이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창양행 ‘고백’ (1886. 2. 22 한성주보)
한국 최초의 신문광고다. 헤드라인인 ‘덕상세창양행고백’은 독일상사 세창양행의 광고라는 뜻이다. 수출품과 수입품의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광고를 보면 소, 호랑이, 말 등의 가죽, 동전 등을 수출하고 염료, 허리띠, 서양못, 성냥 등을 수입하는 것으로 나와있다.


‘독닙신문’ 광고 (1896. 4. 7 독립신문)
독립신문 창간호로 광고가 논설보다 앞선 1단에 자리한다. 1년의 1원30전, 한달에 12전, 한 장에 동전 한 푼이라는 구독료와 장기구독자에 대한 할인혜택을 준다는 점까지 명시되어 있다.


솔표석유의 비교광고(1903. 10 28 황성신문)
미국 스탠더드회사에서 낸 솔표(松票)석유 광고에서는 타 브랜드 석유와의 차별화를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비교, 표현했다. 다른 석유를 쓴 등잔은 그을음이 많이 나는 장면으로 보여주는 반면 솔표석유를 쓴 등잔의 불빛은 환하고 밝게 빛나는 것으로 그려냈다.


옥호서림모자 (1909. 9. 3 대한매일신보)
‘대한전매특허 모자등록상표’를 강조하며 갖가지 모자를 소개하고 있다. 어수선해 보일 수 있으나 당시로서는 꽤나 세련된 레이아웃이었다. 또한 서양식 모자와 양장, 양화로 갖춰진 패션은 1909년에 비춰보면 상당히 파격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는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한양상회의 통신판매 광고(1910. 2. 15 대한매일신보)
우리나라 최초의 통신판매 광고로 ‘특별광고’라는 헤드라인이 강조되어 있다. 광고의 문구를 그대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놀라지 마시오 지방에 계신 여러분이여. 겨우 1전5리의 통신비를 쓰시면 다대한 여비와 번잡을 제하고 능히 서울 제일 염가의 물품을 득하는 묘방이 현출하였으니 이는 구미 각국에서 유행하는 통신판매법이오...”


일본제도 도입기 1910-1920

일제의 식민지배가 시작된 이후부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기 전인 1920년 까지를 말한다. 광고 요금 및 거래 관행 등이 모두 일본식으로 바뀌었고, 서구적 근대를 동경하는 식민지 근대성의 단면이 광고에 드러나는 시기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정치 선전과 행정 홍보를 위해서도 광고가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동서연초상회 스포-트 담배 티저광고(1914. 3. 3, 1914. 3. 4 매일신보)
“겨우 2전으로 천금을 얻음. 내일 본지 1면에 어떤 상품이 등장할까?”. 내일 신문 1면을 주목하라며 호기심을 유발하는 티저 광고(위). 다음날 1면에 등장한 것은 동서연초상회의 꿩 그림이 들어간 스포-트(SPORT) 담배광고(아래)였다. 1910년대 초에는 담배 판촉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당시 20개들이 한 갑에 5전이었던 것을 과감하게 2전으로 내린 스포-트가 단돈 2전으로 천금을 가질 수 있다며 다소 과장하여 표현한 것이다.


조선연초의 신축낙성 축하광고(1914. 11. 8 매일신보)
조선연초 담배회사 건물의 신축 낙성을 축하하는 광고로 비주얼 위주의 메시지 전달이 인상적이다. 백화표(White Cosmos), 미인표(Chun Hyan), 화표(Paradise) 세 가지 종류의 담배를 소개하고 있다. 광고에 핵심 이미지로 등장하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젊은 여성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다.


사꾸라 정종(1911. 3. 3 매일신보, 왼쪽)
‘대일본 최우등 청주’라는 한문 헤드라인 아래 ‘사꾸라(벚나무) 마사무네(정종)’라는 일본말이 한글로 쓰여 있다. 지속적인 광고를 통해 정종은 일본 술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다.

삿뽀로 맥쥬(1915. 6. 24 매일신보, 오른쪽)
당시 조선인들의 입맛을 잡기 위해 펼쳐졌던 일본 맥주 브랜드 삿뽀로와 아사히 맥주의 공동광고. 거품이 넘치는 맥주잔의 이미지와 보리 이삭을 잔 왼쪽에 그려 넣은 그래픽이 재미있다. 브랜드 이름 위에 ‘국산’이라 표기된 점이 우리 역사의 슬픈 자화상을 표현하는 듯 하다.


근대광고 성숙기 1920~1940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강제로 폐간된 1940년까지로 일본의 문화정치가 시작된 시기다. 이 시기 한국은 본격적인 일본 상품의 소비시장으로 변했으며, 광고 역시 국내 광고주의 광고보다 일본에서 들어오는 것이 더 많아졌다.


‘현대 신사의 일일’ 협동광고(1922. 5. 25 매일신보)
만화처럼 보이지만 신사가 하루에 해야 할 일을 8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협동 광고로 각각의 이야기는 다양한 상품과 연결되어 있다. 이야기를 따라가면 먼저 아침에 일어난 신사는 일본산 ‘라이온 가루치약’으로 이를 닦고, ‘레토후드’에서 만든 크림을 바르고, ‘오리지나루(Original)’ 향수를 뿌리고 출근한다. 약속장소를 가기 위해 동경가스전기 주식회사의 자동차를 타며, 피로회복에 좋은 ‘헬프’ 약과 구강 위생을 위해 ‘카오루’도 챙긴다. 일을 할 때는 ‘스완’ 만년필을 사용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카스케도’ 맥주를 한잔 하며, ‘아지노모도’ 조미료를 써서 만든 부인의 요리를 기다린다. 식사가 끝나면 ‘부인구락부’ 잡지를 읽고, 아이에게는 ‘모리나가’ 밀크캐러멜을 건네준다.


아까다마 포트와인
1920~30년대의 일본 포도주 아까다마(赤玉)의 포트와인 광고. 드로잉과 카피가 조화를 이루는 시각적 표현이 돋보인다. 아끼다마는 이와 같은 디자인을 바탕으로 10년 가까이 지속적인 광고캠페인을 전개했다.


포르노 책 광고(1924. 9. 7 동아일보)
활자로 가득한 포르노 책 광고로 중간 중간 그려져 있는 여자의 몸 그림이 시각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말 못할 즐거움. 진본 8책을 단지 1원에 산다”는 카피가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1926년식 정치광고(1926. 11. 22 동아일보)
선거 후 당선자들이 유권자들에게 인사하는 당선사례 광고. 경성부(서울시) 의원에 당선된 것에 대한 감사의 글이 실려 있는데, 이름을 제외하고는 모두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


전보통신사 주최 전국대표미인 선발광고(1929. 10. 26 조선일보)
1929년 개최된 미인선발대회 광고. 예기(藝妓) 배은주라는 이 대회의 선발된 미인의 사진이 가운데를 차지하고, 그 바깥쪽으로 대회를 협찬한 일본 광고주들의 광고들이 배치되어 있는 모습이다.


조선글 타자기(1934. 5. 18 조선일보)
1934년 한글 타자기는 기존의 필기구를 대체하는 강력한 기계문명이었다. 송일상회의 광고에서는 ‘조선글 타자기’ 헤드라인과 “현대문명의 특색은 신속과 정확”이라는 리드카피 아래 조선글 타자기의 특성을 9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대학목약 최승희 모델(1937. 12. 14 동아일보)
당시의 가장 유명한 대중스타였던 현대무용가 최승희를 모델로 내세운 ‘목약(안약)’ 광고. 광고 지면의 대부분이 모델 사진이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최승희라는 모델 이미지를 브랜드 이미지로 연결하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근대광고 쇠퇴기1940-1945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시작한 상황에서 1945년 8월 15일 해방까지로 1940~45년은 언론과 광고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세일 금지, 신문의 전면광고 금지, 화장품 광고 자숙, 사치품 광고 금지, 네온과 전력을 이용한 광고 금지 같은 조치가 계속 이어지며, 광고세(廣告稅)가 부과되기도 했다. 전쟁 말기에 이르러서 신문은 타블로이드판으로 하루 한 장(2면)짜리로 발행되는 것에 그쳤다.


헌납 광고(1944. 1. 4 매일신보)
‘헌납광고’는 일제강점기에서만 사용되었던 독특한 광고용어다. 광고내용을 보면 전쟁참가를 독려하거나 전쟁을 미화하는 것으로 상품메시지와는 무관한 내용인데도 광고비는 광고주가 지불하게 했다. 광고내용을 오른쪽부터 차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귀신과 짐승 같은 적국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자. 한국 대학생의 출정에 대해 만만세 부르자” “결전장은 너를 부른다” “공습에의 대비는 잘 되었는가” “쌀 공출에 나타나는 황농혼” “증산 1억의 정신” “1억 전투배치로 서둘러”


현대광고 태동기 1945-1967

해방 이후부터 종합광고회사가 출범하기 직전까지의 시기다. 한국 최초의 광고전문 월간지 ‘새광고(1960)’가 창간되기도 했고, 합동통신사 광고기획실(오리콤의 전신, 1964)이 신설되어 광고 산업의 활성화를 광고회사가 이끌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한글이 광고에서 메시지를 표현하는 주요 언어가 되었고, 1956년에는 텔레비전 방송광고 메시지가 처음으로 송출되기도 했다.


친근한 한글광고
소비자의 관심을 이끌기 위해 한글의 가독성을 높인 광고들이 등장하며 카피의 문자와 문체가 한문 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일본 제품들이 사라지면서 일시적으로 표현 수준이 퇴보하기도 했으나, 점차 우리 기업 제품 광고들이 친근한 표현으로 그 자리를 대신했다.


영화관련
이 시기 한국 사회에서 대중문화는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국민들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존재였다. 특히 영화는 당시 발간되던 신문광고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대중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


가전제품 라디오
우리 가전 산업의 역사는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가 1958년 창업되면서 시작됐다. 1959년 6월 금성이 최초로 선보인 국산 라디오는 국내 생산 가전제품 1호로 곧 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하게 된다.


현대광고 도입기 1968-1981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던 시기로 국제화의 물결 속에서 광고 대행업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텔레비전, 신문, 라디오, 잡지의 광고 4대 매체가 완전하게 구축되었으며, 코카콜라, 펩시콜라, 칼텍스 같은 다국적 광고주들의 새로운 광고 크리에이티브가 국내 광고계에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코카콜라의 카피
“오직 그것뿐!”. 1969년 코카콜라의 카피는 한국 광고의 현대화, 그 시작이었다. “It’s the real thing”를 번안한 이 카피는 “산뜻한 그 맛~코카콜라!”라는 외국풍 리듬과 함께 젊고 발랄한 분위기로 대중들에게 친숙해지며 광고 표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박카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는 10대 광고주 1위부터 5위까지가 제약회사였다. 동아제약 박카스는 “피로를 이기는 영양을 마시자”, “승리는 체력에서” 등의 카피를 적극 활용하였는데,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도였던 가로쓰기를 한 점이 흥미롭다.


텔레비전
금성사의 금성 TR 텔레비전 광고. 금성의 기술력으로 새로운 텔레비전을 개발했다는 단순한 내용이지만, 70년대 텔레비전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만큼이나 반향을 일으킨 광고였다.


농심라면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의좋은 형제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농심라면 광고는 우리의 전통적 미덕인 양보를 포장함으로써 한국형 커뮤니케이션의 전형을 제시했다.


현대광고 성장1기 1981-1988, 성장2기 1998-현재

1981년 시작된 컬러 방송과 함께 국내 광고시장은 개방과 국제화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을 거듭했다. 언론통폐합이라는 악재도 있었던 반면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가 설립되기도 한 시기다. 개방에 따른 광고 표현의 다원화가 이루어졌고, 포스트모던 스타일의 크리에이티브가 부각되었다. 전통적 가치관과 서구적 가치관이 혼재했던 당시의 사회적 풍경이 광고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1981년부터 1988년까지를 국내 현대광고의 성장 1기라면 본격적인 뉴미디어가 출현한 1998년부터 현재까지는 성장 2기라 볼 수 있다. 2000년 이후 인쇄매체 광고에서는 기존의 금기를 깬 파격적인 표현 소재들이 종종 활용되었으며, 신문 지면의 증가에 따라 광고 지면도 대형화 되었다. 또한 카피의 위치나 헤드라인의 서체가 자유롭게 사용되었고, TV광고에는 컴퓨터 그래픽과 디지털 기술의 활용이 보편화 되었다. 표현전략에 있어서는 스토리텔링 기법이 크게 각광받았다. 2010년을 전후해서 인터넷과 모바일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광고, 디지털 방송광고를 비롯한 스마트 미디어가 크게 활성화되며 국내 광고 시장은 총광고비 10조원대로 확장을 이어가고 있다.


컬러 TV
1980년대를 시작하며 일어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라면, 컬러 방송의 시작일 것이다. 색의 혁명, 방송의 컬러화는 TV광고 제작 기술의 진일보를 가져왔다.


한국적 쌍용광고
1984년 5월 스승의 날에 쌍용그룹이 실시한 기업 광고. 광고 소재로 한국적 소재가 얼마나 훌륭하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줬던 사례다. 6•25 전쟁을 경험했거나, 196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던 보릿고개를 경험한 세대라면 공감할 만한 감성적 광고다.


현대광고 성장1기의 광고들


현대광고 성장2기의 광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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