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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쪽 할래요?

2017-06-14

 


 

책 한 권 읽기가 쉽지 않다. 업무에, 약속에 읽을 시간이 없다. 출퇴근 시간에 짬짬이 읽어보려고도 해봤다. 가지고 다니기가 너무 무겁다. 변명에 변명을 거듭하는 당신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아주아주 가벼운 책이 나왔다. 더 이상 핑계는 통하지 않게 되었다. 

 


 

1장: 한 쪽으로 책을 읽는 시대

어느 날, 김태웅, 김미래, 유상훈, 김민해, 김인엽은 생각했다. 책을 좀 부담 없이 편하게 읽을 수는 없을까? 책은 왜 항상 폼 잡고 무게 잡고 만들어야 할까? 일정량의 볼륨을 충족하지 못하면 그건 책이 아닌 걸까? 수많은 의문과 고민이 오고 간 끝에, 이들은 지금까지 없었던 무척이나 파격적인 시도를 한번 해보기로 했다.

 

“독자에게 가벼운 책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오늘날의 책의 형태를 보면 실이나 본드로 엮은 것들이 대부분이죠? 그러려면 일정량의 종이 묶음이 필요하고, 결국 책은 두껍고 무거워져요. 하지만 분량이 적어도, 그래서 꿰매거나 철하지 않아도 콘텐츠가 완결돼 있기만 하다면 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한 쪽밖에 없어도요. 그렇게 되면 그동안 짧거나 소소하다는 이유로 독립적으로 출판되지 못했던 작품도 자연스럽게 재조명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독자는 가벼우면서 좋은 작품을 접할 수 있어서 좋고, 작품은 가치를 인정받게 되어서 좋죠.”

 

종이 한 장을 아코디언식으로 접어 만든

종이 한 장을 아코디언식으로 접어 만든 '한쪽책'

 

 

이들은 완결성이 뛰어나지만 짧아서 책이 될 수 없었던 작품을 ‘한 쪽짜리’ 책으로 출간하기로 했다. 아코디언처럼 접는 방식을 택한 덕분에 ‘제법’ 분량이 많은 것도 한 쪽에 다 담아낼 수가 있다. 실제로 한쪽책의 ‘밤’ 컬렉션 중 박상영 작가의 <샤넬 노래방과 비욘세 순대국밥>은 무려 열네 쪽이다. 물론 이것도 다 펴면 한 쪽이지만.  

 

2장: 찢고 꺼내고 펴고 접고 읽고

쪽프레스(이들은 한쪽책을 만든다 하여 ‘쪽프레스’라고 이름 지었다.)는 우선 각자가 좋아하는 근대작가 작품을 모아 출간해보기로 했다. 현진건의 <신년 신 계획>, 이상의 <모색> 등 15종을 가내수공업으로 제작해 출간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뜨거운 호응에 자신감을 얻어 마침내 첫 번째 쪽컬렉션 ‘봄’을 기획했다. 비닐 봉투에 책을 담았는데, 봉투 윗부분을 찢은 후 안의 내용물을 꺼내 이렇게 저렇게 접어가며 읽으면 된다. 

 

쪽컬렉션 0 버전. 책갈피, 표지 겸 띠지 등 책을 이루는 모든 요소를 모았다.

쪽컬렉션 0 버전. 책갈피, 표지 겸 띠지 등 책을 이루는 모든 요소를 모았다.

 

 

“콘텐츠가 짧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밀봉을 해야 하는데, 가장 안전하게 담을 수 있는 형태가 비닐 봉투라고 생각을 했고요.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자면, 비닐 봉투는 적극적인 독서 행위를 가능하게 해요. 일단 봉투를 직접 자르거나 찢어야 하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종이를 펼쳐야 하며, 펼쳐진 종이를 다시 접어야 비로소 한 쪽의 책을 읽을 수 있는 거잖아요. 이러한 독특한 손의 감각을 통해 좀더 기억을 자기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봄'을 주제로 한 쪽컬렉션. 비닐 봉투에 제목을 인쇄했다.

 

비닐 봉투 윗부분을 찢고 내용물을 꺼내 읽으면 된다.

비닐 봉투 윗부분을 찢고 내용물을 꺼내 읽으면 된다.

 

 

그게 2016년 봄이었고, 그해 겨울엔 ‘밤’을 주제로 두 번째 쪽컬렉션을 출간했다. 글만을 다뤘던 지난 컬렉션과는 다르게, 이번엔 만화, 엽서, 포스터 등으로 장르를 확대했다. 좀더 책의 모양과 가깝게 보이도록 표지 역할을 하는 일러스트 카드를 한 장 더 넣기도 했다.

 

두 번째 쪽컬렉션

두 번째 쪽컬렉션 '밤'. 이때부터 일러스트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3장: 종이 봉투로 다시 태어나다

비닐 봉투는 독자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고, 쪽프레스만의 정체성도 표현할 수 있는 꽤 훌륭한 도구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쪽프레스는 올해 4월, 지난 봄 컬렉션을 리뉴얼하면서 아끼던 비닐 봉투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기존 작품 5종에 새로운 작품 5종을 추가한, 총 10종의 작품을 ‘종이’ 봉투에 넣어 출간했다.  

 

올 봄에 리뉴얼된 쪽컬렉션

올 봄에 리뉴얼된 쪽컬렉션 '봄'. 종이 봉투로 바꿨다.


 

“비닐 봉투가 최소 수량이 되게 많아요. 저희는 한 종에 100장~200장 정도를 찍는데, 비닐은 최소 단위가 만 장이더라고요. 종별로 다른 요소를 집어 넣기가 힘들죠. 게다가 비닐 위에 인쇄하기도 어려워요. 한쪽책의 특성상 판권면은 표지 요소로 들어가는데, 비닐 위에 가늘게 쓰기가 까다롭고요. 사진도 반사 때문에 잘 안 나올 때가 많아요. 물론 비닐 봉투가 주는 매력이 있어서 아직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지만 여러 모로 고민이 많아요.”

 

하지만 종이 봉투로 바꾼 덕분에 기존과는 또 다른 느낌의 아름다운 쪽컬렉션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일러스트가 봉투에 직접 그려진 덕분에 표지 느낌도 더 확실하게 나고, 훨씬 다양한 컬러를 표현할 수도 있다. 봉투가 또 하나의 훌륭한 작품이 되는 셈이다. 봉투를 찢을 때의 느낌도 다르다. 비닐이 좀 캐주얼하고 가볍다면, 종이는 클래식하고 고풍스럽달까. 개인적으로는 종이 봉투에 한 표!

 

채만식의 <봄과 여자와>

채만식의 <봄과 여자와>

 

이병각의 <오월의 마음>

이병각의 <오월의 마음>


 

4장: 스펙트럼은 넓게, 주제는 좁게

쪽프레스는 ‘도시의 속살’을 주제로 하는 세 번째 쪽컬렉션 출시를 앞두고 있다. 총 19종(15종의 한쪽책+4종의 그래픽노블)으로, 7월 말 발행을 목표로 지금은 텀블벅으로 후원을 받고 있다. 봄과 밤이라는 시간을 주제로 한 지난 컬렉션과는 달리, 이번엔 공간을 주목한 것이 특징이다. 한쪽책 15권은 모두 은별색으로 인쇄될 예정이며(거의 확실), 텀블벅 후원금이 초과달성되면 쉽스킨(양피지 질감의 지류)을 사용할 거란다(조금 확실). 그들 말대로 ‘엉금엉금’이지만 성장하고 있었다. 

 



오는 7월 출간될 쪽컬렉션

오는 7월 출간될 쪽컬렉션 '도시의 속살' 편. 회색빛 도시를 환기하면서도, 고유한 도시의 반짝임을 담고 싶어 은별색으로 인쇄할 예정이라고.


 

“저희 다섯 명은 모두 각자의 직업이 있고, 쪽프레스는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 생계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비교적 느슨하게 작업하고 있죠. 조금 느리더라도 오래, 꾸준히 끌고 가는 게 목표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한쪽책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일단 주력해야 할 것 같아요. 현대작가의 폭도 넓히고,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해외 작가 작품을 소개하기도 하고요. 또한 지금까지는 봄이나 밤처럼 흔하고 포괄적인 주제가 많았다면, 앞으로는 조금 구체적이고 깊게 주제를 잡으려고 해요. 그럼 다른 데서는 볼 수 없었던, 보다 쪽프레스의 색깔이 분명한 컬렉션들이 나오게 되지 않을까요?”

 

Special Thanks to…

출근길 버스에서 ‘한쪽으로읽는봄’ 컬렉션 중 이기준의 <카페 시가>를 읽었다. 여덟 쪽짜리였는데,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손 안에 쏙 들어오니 옆 사람에게 피해줄 일도 없었다. 이로써 독서는 시간이나 장소의 제약이 아닌, 의지의 문제라는 사실이 경험적으로 증명이 됐다. 이게 다 쪽프레스 덕분이다. 

 

에디터_ 추은희(ehchu@jungle.co.kr)

자료 및 취재 협조_ 쪽프레스 김미래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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