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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리뷰

실수와 실패의 기록

타이포그래피 서울 | 2016-03-24

 

 

2015년도 끝났다. 돌아보면 작년 한 해는 실수가 잦은 한 해였다. 하루에도 몇 번은 실수했다. 휴대전화를 놓고 나오거나(일주일에 한 번 정도), 버스를 잘못 타거나(이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원했는데 차가운 아메리카노가 나오고(이건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스테이크를 만들었는데 맛이 없거나(이건 아주 자주) 하는 일이 일어났다. 

 

기사제공 | 타이포그래피서울

 

사소한 실수는 쌓이면 실력이 느는 게 아니라, 실패할 확률이 훨씬 커진다. 내게 낙서는 딱 이런 실수가 모여 만들어진 실패의 역사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 오면 한 번쯤 달력을 만들어 보거나 연하장을 만드는데, 2013년의 12월은 연하장에 쓰일 2014년이라는 숫자를 만들기 위한 실패의 달이었다. 

 

 

완성된 2014년 연하장 이미지

완성된 2014년 연하장 이미지

 

 

정확히 2년이 지난 노트를 꺼내보니, 수많은 2014의 숫자가 묘비의 숫자처럼 실패와 어둠의 이름으로 남겨져 있다(한 번에 머릿속에서 정확히 디자인하고 이미지를 떠올리는 디자이너가 부럽다). 다음은 주변 사람을 위해 2014라는 숫자 연하장을 만들기 위한 실패의 기록이다. 

 

2014년의 연하장은 다음 3가지 조건으로 만들었다. 

 

1. 컬러풀: 색상이 화려하게 

2. 확장: 다양하게 확장할 수 있는 구조

3. 숫자: 숫자로만 이루어진 연하장 

 

그리고 이런 거창(?)한 문구를 끄적거린 흔적이 보인다. “2014년은 그냥 한마디로 컬러풀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냥 다양하게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니 2014라는 숫자는 다양한 색상이 고정되지 않은 형태의 숫자와 조화롭게 만나야 한다는 정말 대책 없는 콘셉트이다. 검은색 볼펜으로 숫자를 수백 번 그리면서 ‘아 이런 색을 넣으면 되겠네!’라는 망상에 가까운 상상을 하면서 2014라는 숫자가 반복되었다. 

 



 

낙서가 중반에 가까워지면, 어김없이 만화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상한 생명체가 나타나 ‘Hi!’라고 말한다. 이런 망상이 극에 달하다 보니 낙서 귀퉁이에 “나는 밝은 게 좋습니다”라고 혼잣말도 끄적거린다. 작업과 상관없는 낙서가 많아질수록 실패의 확률은 커지지만, 머리를 식힐 수 있다. 초반의 숫자가 중반에 이르면, 해체되고 점이나 선으로 탈바꿈하면서 형태를 표현하는 방식을 많이 고민했다. 

 

낙서가 중후반이 넘어가자, 점점 일이 꼬이거나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선을 그어가며 선으로만 이루어진 숫자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선으로만 이루어진 형태에서, 면과 곡선이 만나 모듈이나 줄무늬로 이루어진 표현에 좀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음이 변해 다시 레터링으로 2014라는 숫자를 만들어보면 어떠냐는 변덕을 부린다. 이런 실수와 실패와 변덕이 한번에 모이면서 작업은 산으로 가기 시작한다. 

 

그러다 다시, 선으로 돌아와 선의 겹침이나 변화로 이루어진 다양한 색상의 연하장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최종 결심을 하였다. 정확한 콘셉트 없이 작업을 하면 얼마나 일이 꼬이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작업이다. 

 

2014년의 연하장을 만든 2013년 12월이 정확히 2년 지난 2016년의 나는 여전히 이런 실수와 실패의 기록을 반복하며 낙서를 하고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 내가 만든 포스터와 각종 디자인 결과물이 어떤 실패와 실수로 기록되고 남을지는 다시 2년이 지나봐야 알 것 같다. 그래도 실수와 실패로 얼룩진 디자인 작업이 결국 나라는 사람의 일부분임을 인정하고 나면, 뭔가 초연해지는 기분이다. 

 

분명 2년 후 2018년의 나는 또 다른 실수를 하며 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지 않을까. 그러니 다분히 실수하고 실패하고 기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실수를 하며 실패라는 결과를 안고 살아간다.

 

 

강구룡

그래픽디자이너, 디자인 저술가. 포스터와 책을 주로 디자인하지만, 디자이너로 작업하며 실패한 경험과 성공 이야기를 8:2로 버물려 글도 쓴다. 틈틈이 이 둘을 왔다갔다하며 낙서를 한지도 제법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그린 낙서로 조만간 새로운 책을 내려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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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최유진 에디터
감성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디자인, 마음을 움직이는 포근한 디자인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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