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15
천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를 오늘의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맡긴다면 어떤 공간이 만들어질까.
더구나 서로 사용하는 언어도, 문화도, 디자인을 배워온 방식도 다른 여러 나라의 학생들이 하나의 팀이 되어 그 도시를 디자인한다면 어떨까.
지난 7월 9일부터 15일까지 중국 허난대학교에서 열린 ‘2026 AIDIA International Student Workshop’은 바로 그런 흥미로운 실험의 현장이었다.
한국실내디자인학회(KIID, 회장 이소영)가 참여한 이번 워크숍에는 한국과 중국, 태국의 실내디자인·공간디자인 분야 학생과 교수진이 함께했다. 이들이 마주한 것은 단순한 가상의 디자인 과제가 아니었다.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도시 카이펑(開封)과 그 안에 자리한 저우차오(Zhouqiao) 유적이었다.
학생들에게 주어진 질문은 어쩌면 오늘날 세계의 수많은 역사도시가 안고 있는 공통의 질문이기도 했다.
‘오래된 도시를 어떻게 보존하면서 오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로 만들 것인가.’
AIDIA 총회 (Roundtable Discussion)
AIDIA Academic Forum 패널 토론
<천년 도시 카이펑을 교실로 삼다>
이번 워크숍의 주제는 ‘Encounter Asia: Exploring the Protection of Ancient Urban Heritage and the Development of Asian Civilization’.
역사문화유산의 보호와 아시아 문명의 발전을 함께 생각해보자는 취지다.
카이펑은 오랜 역사의 흔적과 현대인의 일상이 한 도시 안에서 겹쳐 있는 곳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책이나 인터넷 자료만 보고 디자인하지 않았다. 직접 도시를 걸었다.
카이펑의 도시 구조를 살펴보고 역사문화유산을 답사했으며, 저우차오 유적이 현재의 도시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 관찰했다.
도시 자체가 교실이 된 셈이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유적을 단순히 ‘보존해야 하는 과거의 흔적’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오래된 유적과 현대 도시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시민과 방문객은 역사적 장소를 어떻게 경험하게 할 것인지, 지하에 남아 있는 유적과 지상의 도시생활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어떤 팀은 유적과 주변 도시를 연결하는 보행 흐름과 공공공간에 주목했고, 어떤 팀은 지하 유적과 지상 도시의 관계를 풀어냈다. 또 다른 팀은 방문자가 역사적 흔적을 발견해가는 경험이나 전통문화와 현대적 프로그램의 결합을 디자인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보존’에 대한 학생들의 접근이다.
역사유산을 보존한다는 것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얼려놓는 일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만드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도시의 디자인은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을 연결하는 디자인이라는 것을 학생들은 공간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오인욱 명예회장 (AIDIA 초대회장) AIDIA 국제학생워크숍 오프닝 스피치
이근혜 교수 (AIDIA 사무총장) AIDIA Academic Forum 기조연설
<말은 달라도 디자인은 통했다>
이번 워크숍에는 한국과 중국, 태국 학생들이 섞인 12개의 다국적 팀이 참여했다.
국적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다.
디자인을 배우는 방식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하나의 공통 언어가 있었다. 바로 ‘디자인’이다.
학생들은 스케치와 도면, 모형, 디지털 이미지와 영상으로 서로의 생각을 설명했다. 대상지를 분석하고 콘셉트를 만들고 공간을 구성하고 시각화하는 모든 과정을 함께 진행했다.
자료에 담긴 그룹 작업 사진을 보면 이 워크숍의 성격이 더욱 잘 드러난다. 한 테이블에 둘러앉은 학생들이 노트북과 스케치, 각종 자료를 펼쳐놓고 토론한다. 완성된 결과보다 오히려 함께 만드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디자인교육처럼 보인다.
내가 알고 있는 방식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 학생의 생각을 이해하고, 서로의 아이디어를 조율하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국제 디자인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어를 얼마나 잘하느냐보다 서로 다른 생각을 디자인이라는 언어로 얼마나 잘 연결할 수 있느냐인지도 모른다.
AIDIA 국제학생워크숍 필드트립
AIDIA 국제학생워크숍 그룹 작업
<AI가 디자인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 워크숍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대목은 AI다.
AI 기반 이미지 생성과 디자인 시각화 도구를 비롯한 새로운 작업방식이 학생들의 프로젝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활용됐다. 각국 학생들은 자신이 익숙하게 사용하는 디지털 도구와 표현기법을 서로 공유했다.
국제학술포럼에서도 AI는 중요한 화두였다.
AIDIA 사무총장이자 가천대학교 건축학부 실내건축전공 주임교수인 이근혜 교수는 특별강연을 통해 인공지능이 디자인교육과 창작과정에 가져오는 변화를 소개했다.
특히 AI를 단순히 그럴듯한 이미지를 빠르게 만드는 도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아이디어와 사고를 확장하는 ‘협업 도구’로 활용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대목은 앞으로의 디자인교육에서 꽤 중요하다.
이제 학생들에게 AI를 사용하게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쟁하는 단계에서 벗어나야 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AI를 이용해 얼마나 멋진 이미지를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AI를 이용해 얼마나 깊이 생각했는가.’
도구는 빠르게 바뀌지만 디자인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여전히 사람과 공간, 도시와 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이소영 회장 AIDIA 국제학생워크숍 오프닝 스피치
<디자인교육은 교실 밖에서 완성된다>
이번 행사가 흥미로운 또 하나의 이유는 학생 프로젝트만 진행된 것이 아니라 교수와 전문가들이 참여한 국제학술포럼이 함께 열렸다는 점이다.
각국 교수진은 변화하는 사회와 기술환경 속에서 공간디자인이 담당해야 할 역할과 미래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역량을 논의했다. 서로 다른 나라의 디자인교육 방식과 디지털 기술 활용 사례도 공유했다.
유한대학교 실내건축전공 장은지 교수도 한국 대표로 패널토론에 참여해 아시아 디자인교육의 변화와 국제협업의 중요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학생들에게도 이번 경험은 일반적인 대학 수업과는 달랐을 것이다.
낯선 나라에 가서 실제 도시를 걷고, 처음 만난 다른 나라 학생들과 팀을 이루고, 짧은 시간 안에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도면과 이미지, 영상과 프레젠테이션으로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야 했다.
실제로 학생들은 짧은 일정 속에서도 최종 디자인 패널과 프레젠테이션 자료, 공간 워크스루(Walkthrough) 영상까지 완성했다.
결과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학생들이 경험한 ‘다름’이었을 것이다.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교육방식이 다른 사람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은 강의실에서 이론만으로 배우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국제학생워크숍은 디자인 결과물을 만드는 행사를 넘어 미래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협업 능력을 훈련하는 작은 국제 디자인 스튜디오라고 할 수 있다.
AIDIA 국제학생워크숍 오프닝 세리모니
AIDIA 국제학생워크숍 클로징 세레모니
<26년간 이어온 아시아 디자인교육의 네트워크>
이러한 국제교류가 갑자기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AIDIA(Asia Interior Design Institute Association)는 2000년 한국실내디자인학회, 중국실내디자인 관련 학회, 일본실내디자인학회가 중심이 돼 설립됐다.
특히 한국은 창립 당시 초대 회장국을 맡았고 오인욱 가천대학교 명예교수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현재는 한국·중국·일본·말레이시아·태국·필리핀·싱가포르·대만 등 8개국이 참여하고 있으며, 국제학술대회와 국제학생워크숍 등을 통해 아시아 실내디자인 분야의 교육·학술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이번 개막식에서도 오인욱 명예회장이 한국 참가단을 대표해 인사말을 전하며 디자인을 통해 각국의 문화와 생각을 공유하고 국제적 협력과 우정을 넓혀가기를 기대했다.
26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하면 AIDIA의 의미는 단순히 국제행사를 여러 차례 개최했다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한 세대의 교수들이 시작한 국제 네트워크 안에서 이제 다음 세대의 학생들이 만나고 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AIDIA 국제학생워크숍 최종 발표
AIDIA 국제학생워크숍 그룹 작업
AIDIA 국제학생워크숍 그룹별 최종 발표 기념촬영
<미래의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한국실내디자인학회 이소영 회장은 이번 워크숍에 대해 학생들이 글로벌 디자인 환경을 직접 경험하고 다양한 문화적 배경의 참가자들과 협업하면서 국제적 소통 역량과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을 키웠다는 점에 의미를 두었다.
다음 ‘2028 AIDIA International Student Workshop’은 태국 방콕에서 열릴 예정이다.
카이펑에서 만난 학생들이 그때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번에 학생들이 가지고 돌아간 경험이다.
오래된 도시를 새롭게 바라보는 법.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의 생각을 듣는 법.
자신의 생각을 디자인이라는 언어로 설명하는 법.
AI라는 새로운 도구를 자신의 사고와 결합하는 법.
미래의 공간디자이너에게 필요한 능력은 어쩌면 어느 하나의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다루는 기술만은 아닐 것이다.
도시의 시간을 읽고,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다른 문화와 협업하고, 새로운 기술을 자신의 생각을 확장하는 도구로 사용할 줄 아는 능력.
천년 도시 카이펑에서 일주일 동안 진행된 이번 워크숍은 미래의 공간디자이너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작은 디자인 실험으로 보여준 자리였다.
그리고 그것이 국제학생워크숍이 단순한 ‘해외 행사’를 넘어 디자인교육 그 자체가 되는 이유일 것이다.
글_ 정석원 편집인(jsw0224@gmail.com)
사진 제공_ AI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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