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3
전시장에서 이미경 작가의 작품 앞에 서면, 처음에는 ‘익숙함’이 먼저 온다.
그러나 익숙함은 곧 서늘할 만큼 깊은 정조로 바뀐다. 구멍가게라는 소박한 풍경 속에 배어 있는 시간의 흔적, 누군가의 하루를 지탱하던 조용한 움직임들, 그리고 사라질지도 모를 풍경을 붙잡기 위한 작가의 긴 호흡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20여 년 동안 한 주제를 붙들고 걸어온 작가의 궤적을 펼쳐 보이며, ‘기억을 기록하는 회화’가 어떤 울림을 만들어내는지 섬세하게 보여준다.
이미경 작가
제천의 소녀, 도시의 골목에서 다시 기억을 깨우다
이미경 작가는 충북 제천시 백운면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의 골목, 냄새, 풍경은 시간이 흘러도 그녀의 내면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와 만난 구멍가게들은,
그 어린 시절의 정서를 또 다른 방식으로 불러오는 창문과도 같았다.
도시의 작은 가게들—문방구, 잡화점, 떡볶이집, 좁은 슈퍼 한 켠— 이들은 시골과는 다른 결을 갖고 있었지만,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함이라는 점에서는 그녀의 기억과 맞닿아 있었다. 그래서 이미경에게 ‘구멍가게’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정서적 귀향의 장소였다.
대곡리가게 (65x65cm, 2025)
노곡수퍼 (91x72cm, 2025)
버티수퍼 (80x80cm, 2025)
퇴촌 관음리에서의 운명적 조우 - 펜화의 시작
1997년, 경기도 광주 퇴촌 관음리로 이사한 어느 날.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그녀는 해가 막 기울어가는 저녁 무렵 우연히 한 작은 구멍가게 앞에 멈춰 선다.
그 순간, 오래된 간판에 내려앉은 빛, 창문과 벽에 붙어 있던 스티커들, 가게 앞에 세월을 견딘 자전거 한 대가 풍경 속에서 묵묵히 버티고 있었다.
이미경은 그 순간을 ‘기억의 문이 다시 열리는 순간’으로 표현한다. 그날 이후 그녀는 붓 대신 극세 펜과 아크릴 잉크를 잡았다. 유화로는 표현할 수 없던 촘촘한 시간의 결, 사소하지만 중요한 흔적들을 기록할 수 있는 도구였다.
첫 작품을 완성하는 데만 두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 두 달은 앞으로 20년 넘게 이어질 그녀의 대표 작업 세계를 여는 문이었다.
임고면에서 (100x65cm, 2025)
약수식품 (100x65cm, 2025)
소백산자락길 (117x73cm, 2025)
선으로 쌓아 올린 시간 - 이미경 작품의 미학
전시장에는 멀리서 보면 평온해 보이던 그림들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놀라울 만큼 치밀한 세계로 변한다. 벽의 균열, 간판의 벗겨진 페인트, 포스터의 찢긴 모서리와 먼지가 앉은 진열대… 따뜻하지만 단단한 색, 바래 있지만 선명한 기억의 톤. 그녀의 그림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의미를 확장한다.
<기억의 채도>
강렬함 대신 시간의 흐름을 닮은 색조. 오래된 사진처럼, 마음속 장면을 천천히 밝힌다.
<선의 집요함>
수천, 수만 개의 선이 겹겹이 쌓여 마치 공간의 공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질감을 만든다.
<사람 없이도 사람을 그리는 방식>
누구도 등장하지 않지만, 가게를 지켜온 주인의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평상 위에 놓인 박스, 걸레질로 반짝이던 출입문, 매일 같은 자리에서 하루를 시작하던 이들의 숨결이 보인다.
삼이로 감나무가게 (117x13cm, 2025)
시골가게 (117x73cm, 2025)
관객들이 작품 앞에서 멈춰 서는 이유
전시를 찾은 관람객들은 그림 앞에서 유난히 오래 머문다. 그리고 거의 비슷한 말을 한다.
“우리 동네에도 이런 가게가 있었어요.”
“엄마가 하던 잡화점이 생각나요.”
“학교 끝나면 문방구 앞에서 놀았던 그때가 떠오르네요.”
사람은 각자 마음속에 ‘단 하나의 구멍가게’를 가지고 산다. 그 가게는 유년 시절의 배경이었고, 어른들에게는 소소한 쉼표 같은 공간이었으며, 동네 공동체가 숨 쉬던 작은 중심지였다.
이 대목에서 필자 역시 오래 묵혀두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필자의 고향인 전주에서 살던 집 대문만 열면 바로 맞은편에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다.
늘 같은 자리에 있던 그 가게는 어린 시절의 나에게 세계의 중심처럼 느껴졌던 곳이다. 여름이면 얼음과자를 쥐어주던 가게집 주인 아주머니, 겨울이면 그 가게 안에서 새어 나오던 군고구마 냄새… 그 모든 것이 내 기억의 첫 장면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미경의 작품들은 단순히 ‘누군가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필자의 마음속 어느 장면을 조용히 끄집어내는 듯한 힘이 있었다.
가화만사성 (117x91cm, 2025)
글그림책 <마음을 두고 온 곳, 세계의 구멍가게 이야기>
작가와의 개인적 인연을 잇는 오래된 맥락
이번 전시가 유독 더 따뜻하게 다가온 데에는 필자와의 개인적인 인연도 한몫했다.
이미경 작가의 남편은 그녀의 서울예고 시절 미술 선생님이었다. 학생과 은사로 만난 인연은 오랜 시간에 걸쳐 깊어졌고, 결국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또한 필자와 같은 전주 출신, 같은 전주고 동기, 그리고 같은 서울 미대 동문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지방의 같은 도시에서 비슷한 풍경과 공기를 들이마셨던 인연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렇게 이어지는 것을 보며 전시를 보는 내내 묘한 친근감이 그림 속에 더 깊게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구멍가게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시대의 호흡이다
한국 사회에서 구멍가게는 거의 사라지고 있다. 새로운 건물, 프랜차이즈, 상업적 질서 속에서 오래된 것들은 계속해서 자리를 잃고 밀려난다.
그렇기에 이미경의 그림은 더욱 절실하다.
그는 공간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지켜온 사람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처럼, “10년 뒤에는 그림 속 가게들도 대부분 사라질 겁니다. 그래서 그립니다.”
그 말은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다.
그리고 이 시대가 점점 더 잃어가는 것들에 대한 조용한 경고이기도 하다.
호반슈퍼 (193x97cm, 2025)
대운슈퍼 (145x112cm, 2025)
로컬이 세계의 감성을 울리는 순간
최근 이미경의 작업은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BBC는 한국의 동네 슈퍼를 소개하며 그녀의 그림을 인용했고, 동남아시아 아트페어에서도 ‘시간의 미학’을 담은 펜화로 호평받았다. 제주의 독립책방에서는 《세계의 구멍가게》 원화전이 열리며 그녀의 시선은 세계 곳곳의 작은 가게로 확장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구멍가게가 해외 관객에게도 따뜻한 로컬의 감성으로 진하게 전달된다는 점이다. 작은 가게의 풍경은 모든 나라에 존재한다.
그 안에는 시간의 기척, 사람의 온기, 공동체의 기억이 간직되어 있다. 그래서 그녀의 작업은 국경을 넘어 같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영국 그알리아 상점 (50x50cm, 2025)
벨기에 코너샵 (50x50cm, 2024)
모로코 아시칸 식료품점 (45.5x45.5cm, 2025)
일본 후세식품점 (60x40cm, 2025)
네팔 박타푸르에서 (40x60cm, 2024)
스리랑카 마을가게 (73x50cm, 2024)
라오스 길가가게 (55x35cm, 2025)
태국 수상시장가게 (61x41cm, 2025)
네팔 담푸스가게 (62x33cm, 2025)
호주 데이데이마켓 (55x35cm, 2024)
베트남 꼴레잡화점 (55x35cm, 2024)
튀르키예 카멜기다 (62x33cm, 2025)
네팔 담푸스가게 (62x33cm, 2025)
중국 미문잡화점 (45.5x53cm, 2025)
몽골 식료품점 (135x75cm, 2025)
필리핀 골목가게 (45x53cm, 2024)
우리가 잃어가는 것, 작가가 지켜내는 것
전시장을 나서며 가장 오래 남은 생각은 바로 이것이었다. ‘예술은 사라지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마지막 힘’이라는 것.
구멍가게는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이미경의 그림 속에서는 그 공간들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작은 가게 한 채가 품고 있던 온기와 서사, 그 시간이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 우리에게 다시 건네는 일— 그것이 그녀의 예술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서 우리 자신의 어린 시절, 우리의 골목, 그리고 우리가 잃어가는 세계의 한 조각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이미경의 구멍가게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하나씩 품고 있는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대한 그리움”의 풍경이다.
이미경 개인전 포스터 (전시기간: 12월 1일~27일, 전시장소: 갤러리 이마주)
글_ 정석원 편집주간 (jsw0224@gmail.com)
사진제공_ 이미경, 갤러리 이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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