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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인터뷰

[포커스 인터뷰] 보다 많은 사람이 향유하는 작품 제작하고파… 허욱 작가

2024-01-17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허욱 작가는 연세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동양철학과 예술철학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 그는 그것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찾다 시각디자인을 알게 됐고,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해 홍익대 대학원 시각디자인학과에 입학, 그곳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마쳤다. 

 

허욱 작가

 

 

그는 20여 년간 경인여자대학, 강남대학교 등에서 시각디자인과 전임교수로 근무하며 교육과 연구 활동에 매진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우리의 미의식에 대한 깊은 연구는 이어졌고, 지금도 역시 그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다. 

 

(사)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vidak), (사)한국현대디자인협회(kecd) 등 시각디자인 관련 단체에서 부회장 등 임원으로 활동한 바 있는 그는 국내외에서 약 40회의 개인전 및 150여 회의 단체전을 가졌으며, 시서화 일기 <혼밥>(2022년)을 출간했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우리의 아름다움에 대해 꾸준히 연구해 온 그는 마침내 전업작가의 길을 택했다. 

 

허욱 작가의 작품

 

 

허욱 작가는 참 작업을 많이 하는 작가다. 그의 SNS를 보면 매일 새로운 작품이 올라온다. 작가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작가들에게 있어 마치 ‘자존심’과도 같은 ‘작가정신’을 운운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을 낮추어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며, 누군가가 자신의 작품으로 인해 감동을 받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는 그런 작가다. 보다 많은 사람이 문화 예술을 향유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작품의 가격도 낮췄다.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이 부담 없이 낮은 가격으로도 예술작품을 수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감성을 어루만지는 글귀를 쓰고, 편안함이 느껴지는 그런 풍경을 그리는 그의 작업은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그의 작업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또 쓴다. 

 

작업을 농사에 비유하며 오늘도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허욱 작가의 작업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허욱 작가

 

 

Q. 철학을 전공했는데, 어떻게 작업을 시작하게 됐나. 

 

저는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했습니다. 특히 동양철학과 예술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어요. 졸업을 앞두고 회의감에 빠졌습니다. ‘사회에 나가 취업을 하게 되면 그간 열심히 공부했던 것들이 과연 어떤 쓸모가 있을까? 꼭 대학에 남는 게 아니더라도 그것들을 활용하며 살 수는 없을까? 그것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있다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제가 찾은 답은 시각디자인이었어요. 이후 대학원에 진학해 디자인의 기초부터 다지는 동시에, 동양미학, 특히 한국의 미의식을 우리 디자인에 담아내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대학 교수가 되어서도 그 노력은 이어졌는데요, 처음에는 주로 컴퓨터그래픽을 활용하다가, 어느날 마우스를 던져버렸습니다. 다시 수작업, 손으로 돌아가자고 결심했고,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요즘 AI가 디자인도 하고 그림도 그리는 시대라고 하지만, 저는 ‘그럴듯한 것’과 ‘진짜배기’는 결국 구분된다고 믿어요. 미술적 소질은 부모님께 물려받았지만, 따로 학원 같은 곳에서 배운 적은 전혀 없습니다. 오로지 독학으로 공부하였고, 지금도 그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허욱 작가의 작품

 

 

Q. 주로 캘리그라피 작업을 하는데, 언제부터 작업을 시작했나. 

 

사실 저는 ‘캘리그라피’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솔직히 독립된 분야로서의 캘리그라피도 인정하고 싶지 않고요. 저에게 캘리그라피는 그저 서예, 서도의 영어 번역에 불과할 뿐입니다. 굳이 우리말로 재번역하자면 ‘현대 서예’ 정도가 될 것 같아요. 여기서 ‘현대’란 ‘모던(modern)’이라기보다는 ‘동시대(contemporary)’의 뜻이 강하겠지요. 확실히 전통 서예는 이 시대와 동떨어진 답습, 전승의 이미지가 강한데, 캘리그라피는 이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캘리그라피가 서도의 대척점이 아니라 그 기반 위에 서야 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그저 글씨를 쓸 뿐입니다. ‘글씨’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이 있는데, 굳지 ‘캘리그라피라’는 외래어를 쓰고 싶지 않아요. ‘언제부터 글씨를 썼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요, 저는 그때마다 ‘한글을 깨칠 때부터’라고 답을 합니다. 글씨는 누구나 늘 써왔던 것이지요. 

 

본격적으로 서법을 공부하고 연마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좋은 글씨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한 가지 의문에서 출발했어요. 글씨의 궁극적인 목표는 명료합니다.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자기 글씨이고, 또 하나는 좋은 글씨입니다. 이 개성과 보편, 둘을 동시에 성취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게 그렇게 만만치 않아요. 글씨를 논할 때 모범적인 사례로 추사 김정희의 예를 많이 드는데요, 그의 글씨는 서법에서 어긋나지 않으면서, 서법으로부터 자유로운 글씨라는 평을 받고 있지요. 저 또한 그런 글씨를 쓰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있어요. 

 

주로 글씨를 쓰지만 간혹 수묵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서화동원(書畵同原)이기에 그림을 별개의 분야라고 따로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나타내고자 하는 바가 그림이 적합하면 글씨 대신 그림을 그릴 뿐입니다. 저는 제 그림을 문인화라고 부르는데요, 따로 문인화를 배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을 문인이라 생각하기에 저의 그림을 문인화라 하는 것입니다. 

 

 

 

 

허욱 작가의 수묵화

 

 

Q. 매우 많은 작업을 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대부분의 작가들이 특정 주제, 또는 특정 스타일(표현기법)을 정해 놓고 천착해 들어가지요. 그러나 저는 저의 일상 속에서 겪게 되는 모든 자극들을 제 작품의 소재로 삼습니다. 예를 들면 읽었던 책의 한 구절, 들었던 노래의 한 소절, 걸으면서 봤던 고양이 한 마리, 나무 한 그루 등 오감을 통해 들어온 먹잇감을 제 나름대로 소화해서 가시화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기를 쓰듯 작업을 하는 겁니다. 미뤄뒀다 쓰면 일기가 아니듯이, 그날그날의 겪은 일들을 글씨로 또는 그림으로 풀어내는 것이지요. 그러니 자연스레 작업의 양이 많습니다. 

 

또 그러니 몇 날 며칠 걸리는 대작은 거의 없습니다. 일기를 여러 날 걸쳐 쓰진 않잖아요. 실제 작업에 걸리는 시간보다는 더듬이를 세워 제게 들어오는 자극을 수용하고, 그것에 대해 사색하여 틈틈이 메모하고, 그것을 어떻게 풀어낼까 고민하는 시간이 많지요. 새벽 일찍부터 잠들기 전까지, 아니 꿈속의 얘기도 담아내려 하니, 일상이 작업이고 작업이 일상입니다.

 

Q. 작업을 농사짓는 것에 비유하신 문구가 눈에 띄었다. 작업에 대한 철학이 궁금하다. 

 

제가 작업을 예술노동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여러 종류의 노동이 있겠지만, 예술노동은 가시적 결과물들이 배출되잖아요. 저는 이것이 농사와 참 닮았다고 생각해요. 또 한 가지, 나름 열심히 작업을 하지만 그 결과가 하늘에 달렸다는 것도 작업과 농사의 닮은 점입니다. 100의 인풋(in put)에 어떤 때는 80의 아웃풋(out put)이 나오고, 어떤 때는 120의 아웃풋이 나오기도 하죠. 

 

한국의 미를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검이불루(儉而不陋)’입니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 개념이 제가 궁극적으로 작품에서 지향하는 목표입니다. 또한 저는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습니다. ‘글씨가 곧 그 사람’이라는 뜻인데요, 두 가지 방향에서 생각할 수 있어요. ‘좋은 글씨를 써야 좋은 사람이 된다’라고도 볼 수 있고, ‘좋은 사람이 좋은 글씨를 쓸 수 있다’라고도 볼 수 있지요. 우리가 글씨를 서도(書道)라고 하는 것은 인격을 수양하기 위한 일환으로 글씨를 대하기 때문입니다.

 

 

 

 

허욱 작가의 작품

 

 

Q. 작품 가격도 저렴하게 선보이는데.

 

저는 대학에 교수로 있을 때도 스스로를 교육노동자라고 생각했어요. 작가가 된 이후에도 스스로를 예술노동자라고 생각합니다. 일용직 노동자가 하루 품을 팔아 품삯을 받듯이, 저도 하루 작업이라는 품을 팔아서 품삯을 받고 그것으로 제 일상을 영위할 수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작품의 가격을 최소 인건비 수준으로 책정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저렴하게 작품 가격을 정한 이유는 예술 향유의 저변확대, 즉 일반 서민들도 부담 없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세상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즘 유행하는 아트테크, 즉 투자가치, 소장 가치로 작품을 바라보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그 무엇(작품)에게 자신의 작은 공간을 내어주고 같이 호흡하고 사는 것이 제 예술의 진정한 가치라고 믿어요. 

 

Q. 전업 작가로서의 어려움이 있다면. 

 

우리나라에서 전업 작가로 산다는 것은 이름이 알려진 몇몇 분들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것처럼 참으로 척박한 일입니다. 사정이 이러니 말로는 전업 작가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수강생을 받는 등 여러 가지 부업을 병행하고 있지요. 그런데 저의 경우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오로지 독학으로 글씨를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캘리그라피 관련 협회 사람들과의 인연도 없고, 그 흔한 캘리그라피 자격증도 없기에 수강생을 받기도 어렵습니다. 사실 저는 캘리그라피 관련 자격증에 대해 이해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변방의 붓소리’라고도 표현하지요. 

 

저는 오로지 작품 판매에만 그 수입을 의존하고 있는데, 캘리그라피라는 분야의 성격상 “와! 멋지다.” 하고 한번 보고 말면 그뿐이지 굳이 구입해야 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 이 시대의 현실이라서 작품 판매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 덧붙이자면 저의 작품을 활용한 여러 가지 어플리케이션이 나오면 좋겠지만, 그 또한 상품성을 따지는 그 분야 사람들의 몫이지, 제 몫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허욱 작가의 작품

 

 

Q. 작품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저는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이용하는데요, 제가 매일 올리는 작품에 대해서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받는다는 얘기를 종종 듣습니다.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되면서 삶의 형편이 많이 어려워졌어요. 저는 분명 지금 고난의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가수 양희은의 노래 <그대가 있음에>에는 이런 가사가 있지요. ‘슬픔이 슬픔을, 눈물이 눈물을, 아픔이 아픔을 안아줄 수 있죠.’ 저는 그 마음으로 작업을 합니다. 제가 고난 중에 만든 고난을 감추지 않은 것들이 고난을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Q. 작가로서의 목표가 있다면. 

 

작가로서의 목표가 따로 있겠어요? 그저 작업하고 먹고 살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죠. 그러기 위해서는 요즘 말로 ‘찐팬’ 즉, 고정고객을 늘려가야 합니다. 자랑같이 들리겠지만 제 작품은 재구매율이 높아요.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많아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고나 할까요. 고정고객 확보와 동시에 파이를 넓히듯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나름 노력하고 있어요.

 

캘리그라피의 저변이 확대되어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저변의 확대가 동시에 전체적 수준의 저하를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이에요. 좀 심하게 말하면 막 글씨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어버렸어요. 저는 이 와중에도 꼿꼿하게 기본과 원칙을 지키는 작가로 남고 싶습니다. ‘내 글씨’를 쓰면서 동시에 ‘좋은 글씨’를 쓰는 작가, 남의 글을 베껴 쓰는 작가가 아닌 내 문장을 내 글씨로 펼쳐내는 작가이고 싶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저는 30세 때부터 지금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개인전을 열어왔는데요, 작년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관객들을 직접 대면하지 못했습니다. 하루빨리 사정이 나아져서 다시 개인전을 개최하고 싶어요. 저에게 전시는 그간 작업했던 것들을 추려 나가는 성격의 것이죠. 

 

2022년 시서화 일기 <혼밥>을 발간한 이후, 시리즈로 다시 책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직 못 내고 있어요. 이 또한 올해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캘린더도 같이 만들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작은 작업실 겸 작품을 상설 전시 판매할 수 있는 공간을 하나 마련하는 것이 저의 먼 계획입니다. 편히 오셔서 작품 구경도 하고 담소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생기면 참 좋겠습니다. 같이 글씨를 써보고 싶다는 분들에게 자리도 내어 드리면서요.

 

인터뷰어_ 정석원 편집주간(jsw@jungle.co.kr)
에디터_ 최유진 편집장(yjchoi@jungle.co.kr)
사진제공_ 허욱 작가(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8661529245&mibextid=ZbWKwL, www.instagram.com/h_e_o_w_o_o_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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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진 에디터
감성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디자인, 마음을 움직이는 포근한 디자인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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