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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인터뷰

[정글 특별 초대석] 한글에 담긴 예술성 알리는 강병인 작가

2023-04-03

멋글씨, 캘리그래퍼 강병인 작가는 25년간 붓으로 글씨를 써왔다. 이름을 들으면 붓으로 쓴 한글로고가 먼저 떠오르는 수많은 제품들이 그의 손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한글로 쓰여진 로고는 제품의 가치를 높였고, 디자인을 더 빛나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글이 지닌 힘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린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곳에서 한글을 접하고 있으며, 한글의 힘을 알게 됐다. 

 

강병인 작가는 한글의 예술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작가다. 한글의 창조성과 과학성, 사람을 생각하는 애민정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그만큼 한글을 사랑한다. 

 

강병인 작가를 인터뷰하기 위해 세 번이나 그를 만났다. 한글에 대한 이야기, 세종에 대한 이야기, 글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참 한글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미처 몰랐던 한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글이 새삼 아름답게 느껴졌다. 한글의 예술성을 알게 해준 그에게 참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한글의 예술성, 아름다움 그리고 무한한 잠재력을 지금도 지속적으로 발견하고 있는 그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한글의 멋을 널리 알리고 있다. 

 

그는 한글의 위대함만을 말하지 않는다. 한글에 담긴 정신을 이해하고 한글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그는 한글의 예술성을 글씨로 표현한다. 

 

2021년 그간의 디자인 서예 작업을 정리한 책 <글씨의 힘>을 출간했던 그는 이번에 순수 서예 작업을 모은 작품집 <강병인의 글씨 묶음집>을 선보인다. 이 책을 통해 그는 다음의 새로운 작업을 계획하고 연구하고자 한다. 

 

강병인 작가로부터 한글과 한글의 예술성, 작업 이야기에 대해 들었다. 

 

강병인 작가

 

 

캘리그라피 작업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먼저 캘리그라피라는 용어를 멋글씨로 바꿔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 그 이유는 뒤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초등학교때 한글 서예를 했는데 무척 좋아했다. 중학교때 교과서에서 추사 선생을 만난 후 나도 크면 나중에 훌륭한 서예가가 돼 보겠다는 뜻을 나름대로 새기면서 호를 영묵(永墨)이라고 지었다. 막연하게 그분을 닮아보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한자로 된 선생의 글씨를 보면서 ‘나는 저걸 한글로 바꿔 써야겠다’ 생각했다. 이후로 잘 쓰던 못 쓰던 붓을 가지고 놀았고 그것은 운명이 되었다.

 

20대 초반에 출판사에서 편집디자인을 처음 시작했다. 붓은 놓지 않았다. 30대 초반에 편집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기도 하면서도 서예를 계속 살펴보았다. 우리나라 서예와 일본 서예, 중국 서예가 어떻게 다른지, 또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특히 일본여행을 통해서는 서예(일본은 서도라 한다)가 상업적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알다시피 일본은 사케 로고 같은 것이 대부분 서예다. 길거리 간판도 10개중 7, 8개는 서예 또는 손 글씨로 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의 시장으로 형성돼 있구나 했고, 그걸 우리나라에서도 응용할 수 없나 생각했다. 

 

1997년 IMF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 편집디자인회사를 정리하면서 그 때 나머지 삶에 대해 고민하다가 ‘내가 좋아하고, 또 열심히 하면 잘 할 수 있는 게 뭘까’ 질문했다. 오직 서예와 글씨밖에 없더라.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글씨로 업을 삼고자 했다.

 

순수 서예와 디자인 서예 분야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두 가지로 나누어 작업을 하고자 했다. 하나는 우리말의 뜻과 소리를 살려낸 순수 한글 서예였고, 다른 하나는 디자인과 서예를 접목한 디자인 서예, 캘리그래피였다. 하지만 두 작업 모두 목표는 하나였다. 당시만 해도 한글이 단순해서 멋이 없다는 편견이 적지 않았다. 활자적인 측면에서도 다양한 서체가 많이 나올 수 없는 시기였다. 한글 서예도 한자 서예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순수 한글 서예와 디자인 서예를 통해 한글 꼴도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양하다는 걸 보여주고, 한글의 독특한 조형과 아름다움을 알리고자 했다. 


그러면서 ‘다른 생각, 다른 글씨가 아니라면 차라리 붓을 놓겠다’는 각오였다. 정말이지 이 말을 목숨처럼 여기며 살아왔다. 

 

순수 서예와 디자인 서예의 경계를 넘나든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


내가 정신적 스승으로 여기고 있는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선생의 글씨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추사 선생은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이고 정치가였지만 서예가로 이름이 더 알려졌다. 선생은 특히 현판이나 당호(집의 이름)를 많이 썼는데, 그 글씨들을 보면 모두 전략적이다. 오늘날로 본다면 최고의 광고 디자인을 했던 게 아니었나 싶다. 선생의 글씨는 우리가 디자인을 할 때 먼저 주제, 즉 컨셉을 도출하기 위해 많은 자료들을 분석하는 것처럼 대상을 철저히 분석했다. 예를 들면 침계(梣溪)라는 글씨는 선생의 친구 윤정현(尹定鉉, 1793∼1874)의 부탁을 받은 지 30년 만에 썼다. 30년이라니...추사의 글씨는 오늘날의 디자인 표현기법과 닮아 있다. 좋은 글씨의 본을 찾지 못해 쉽게 쓰지 못하다가 북조(北朝) 금석문을 읽던 중 해서와 예서의 합체(合體)로 된 글씨가 친구 윤정현의 삶과 철학과 닮아 있음을 발견하고 비로소 부탁받은 <침계> 글씨를 쓴 것이다. 철저한 고증을 통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 위한 추사의 예술적 고뇌가 얼마나 컸는지 드러나는 작품이다. 침계 글씨를 완성하기 위해 30년이라는 세월동안 고심했다는 것은 오늘날 기업광고나 제품광고를 만들기 위하여 그 기업의 이념이나 제품의 성격, 마케팅전략, 주 소비자층의 심리까지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고려하는 점과 맥을 같이 한다.  다시 말해 순수서예와 디자인 서예를 동시에 추구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침계(梣溪)〉, 김정희, 122.7×42.8cm, 1852년경, 보물 제1980호,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침계(梣溪)는 김정희의 친구 윤정현의 호이다.

 


브랜드 로고 등 수많은 글씨 작업을 하셨는데.


디자인 글씨, 캘리그라피의 가장 큰 덕목은 제품을 예로 들면 그 제품의 속성이나 특징, 마케팅 전략과 디자인 전략에 걸맞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글씨를 만들어내는 거다. 이를 위해서 제품을 만드는 회사의 이념 등은 평소에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다. 특히 기업들의 신제품 출시 소식이나 시장에서 반응 등은 놓치지 않고 챙기기도 하고.


물론 글씨 의뢰가 들어오면 모든 감각기관들이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제품의 이름에 담긴 의미나 ‘참이슬’을 예로들어 ‘ㅊ ㅏ ㅁ ㅇ ㅣ ㅅ ㅡ ㄹ’의 글자를 해체하고 조합해 본다.  또한 주 소비자층이 누구인지, 이성적 소구인지 감성적 소구인지 등등 글씨의 방향성, 컨셉을 도출하기 위해 며칠을 생각하는 시간으로 채운다. 그러한 생각의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글씨의 방향성과 꼴이 떠오른다. 그때 비로소 붓을 든다. 


나는 이러한 과정으로 만들어낸 글씨를 ‘의미적 상형성의 글씨’라 규정하고, 이 주제로 석사 논문도 썼다. 제품의 속성과 이름에서 드러나는 뜻과 소리, 형상을 담은 글씨(디자인 서예)를 말하는데, ‘화요’ 글씨가 한 예이다. 원래 화요火堯는 처음 마실 때는 불처럼 일어나지만 점차 평화로워지는 뜻을 담고 있다(화요의 브랜드 이름은 크로스포인트 손혜원 대표가 지었다). 그러나 한자(신영복 선생 글씨)를 한글로 새롭게 쓰면서 나는 ‘좋은 술을 좋은 사람과 마시니 우리들 마음속에 꽃 한 송이 피어나지 않겠는가.’라는 방향성을 잡고 ‘화’ 글자를 파자하여 ‘호’를 매화 한 송이 피어나는 모습으로 담았고, ‘요’에서는 신선들이 바둑을 두면서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담았다. 이렇게 한글로 된 ‘화요’ 제품이 출시된 후, 어느 술집 주인이 화요글씨를 보고 나와 같은 글씨 이야기를 풀어놓아 깜짝 놀란 적도 있다.

 

광주요 〈화요〉, 디자인 디스커버리 아이, 글씨 강병인, 2009

 

〈미생〉, tvN 드라마, 글씨 강병인, 2014

 

 

그리고 소비자가 가장 먼저 만나는 건 제품의 이름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사람으로 치면 얼굴이다. 우리가 매일 아침 얼굴을 다듬듯이 제품의 이름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로고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나의 제품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정성을 들이고 시간과 자금을 투자하는 지 살펴보면 브랜드 로고도 답은 나온 거 아닌가. 가장 ‘멋’ 있어야 하고 잘 만들어야 한다.  ‘멋지다’ 할 때 ‘멋’은 ‘멋글씨’의 출발이기도 하다. 전 홍익대 안상수 교수는 ‘디자인’을 ‘멋짓’이라고 했다.

 

전통 서예와 차별성을 담보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캘리그라피(Calligraphy)는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면 서예이고, 순 우리말로는 ‘멋글씨’이다. 멋글씨, 캘리그라피는 멋만 부리는 글씨가 아니라 전통 서예를 바탕으로 글이 가진 뜻과 소리 등을 적극적으로 글씨에 담아내는 것을 말한다. 모든 미술이 요구하는 조형성은 기본이다. 여기서 하나는 순수 서예, 또 하나는 디자인 서예(영어로는 캘리그라피)로 발전하였다.

 

디자인 서예는 다시 강조하지만 그 쓰임에 따라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글씨여야 하고, 소비자와 다정다감한 소통으로 신뢰를 쌓고 인지도를 끌어올려 제 2의 마케터 역할까지 해야 하는 것이 디자인 글씨라고 여기고 있다.

 

한글에 담긴 가치는 무엇인가.


한글의 가치는 정말 많지만 두세 가지 정도만 말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쉽게 만들었으니 편하게 쓰라’는 애민정신이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 양반들은 한자를 쓰고 읽으며 자신들의 생각을 전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문자가 그들에겐 일종의 계급이었던 거다. 세종은 문자를 모르는 일반백성들, 평민들을 삶을 딱하게 여기고 그들이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문자, 한글을 만들었다. 당시는 소위 군주국가였고, 지배계급 이데올로기가 확실한 사회였다. 그런데 세종은 피지배계급을 위해 문자를 만들었으니, 애민사상, 즉 얼마나 백성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한글은 매우 민주적인 문자요, 평등의 문자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첫 번째 큰 가치가 담겨있다.

 

세종실록 〈훈민정음 어제서문〉. 최초의 한글꼴이다. 1443

 

 

두 번째는 자연의 변화, 인간의 삶을 문자에 담았다는 점이다. 한글은 동양의 천인지와 같은 보편적인 사상을 문자의 핵심체계 시스템으로 끌고 왔다. 이를테면 소리를 하늘과 땅, 사람으로 나누고 합하는 원리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밝혀 놓았다.


凡字必合而成音. 범자필합이성음
初中終三聲 合而成字. 초중종삼성 합이성자

 

한글이 여타 문자와는 다른 문자로 평가받고 있는 것도, 소리를 하늘과 땅, 사람으로 나누고 합하는 이치 그리고 자음을 만드는 발성기관의 상형화 뿐만 아니라, 모음이 뚜렷한 형태를 가지면서 낮과 밤이 바뀌고 봄여름가을겨울이 돌고 돌듯이 순환의 원리(주역에서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한다)로 소리를 적게 했다는 사실에 있다. 가령 ‘한헌혼훈흔힌 ㅏ ㅓ ㅗ ㅜ ㅡ ㅣ’ 이렇게 모음이 순환하면서 소리를 적는 이치이다.

 

순환의 원리로 소리를 적는 원리, 강병인

 

 

순환의 원리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하면 바로 이런 거다. ‘봄’이라는 글자를 보면 종성 ‘ㅁ’은 땅이고, 초성 ‘ㅂ’은 하늘이고, 모음 ‘ㅗ’는 가지의 역할이다. ㅁ 봄이 되면 싹이 나 ㅗ 가지가 되고 ㅂ 꽃이 핀다. 이때 피어난 꽃잎은 여름 되면 더욱 무성해지고, 가을되면 땅으로 떨어지고, 떨어진 잎들은 겨울 동안 영양분을 만들다 봄이 되면 다시 피어나게 한다. 초성이 종성이 되고. 종성이 초성이 되는 순환의 원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강병인의 봄〉, 화선지에 먹, 16.5×30cm, 강병인, 2007

 


자연의 이치를 끌고 왔지만 매우 과학적이라 말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원리이고, 이렇게 자연의 이치를 문자 운용의 법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쉽다는 것이 다른 문자와는 다른 한글만의 독창성이다. 얼마나 쉽게 만들었으면 정인지 서문에는 이런 말이 나와 있다. ‘똑똑한 이는 하루 만에 깨우치고 좀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고 써 놓았다. 이 얼마나 큰 자부심인지. 

 

또한 한글은 세계 문자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문자 사용설명서까지 만들어 놓았다.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한글 꼴이 처음 완성된 것은 1443년이다. 간단하게 예의를 들어 보인다는 예의본에서 모음과 자음의 꼴을 보여주고 설명까지 달아 놓았다. 이후 3년 동안 백성들에게 새로운 문자를 만들게 된 동기와 목적 그리고 세세한 문자의 원리를 밝혀놓은 해례본을 1446년에 만들어 배포했다.

 

한글의 디자인적 요소는 무엇인가.


먼저 한글은 뛰어난 디자인 결과물이다. ‘훈민정음 서문’을 디자인적으로 풀이해보면 ‘어마어마한 디자인 교과서, 디자인 바이블’임을 알 수 있다.

 

아시다시피 훈민정음 서문의 시작은 ‘우리말이 중국말과 다름에도 한자를 쓰고 있어서 소통에 문제가 많다’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새로운 ‘문자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그 다음 누굴(Target) 위해서 만들 것인가를 말한다. ‘일반백성들은 문자를 몰라 제 뜻을 전하고 싶어도 전할 수 없다. 그래서 새로운 문자를 만들겠다’ 한다. 그리고 ‘어떻게 만들것인가’도 이야기한다. 그래서 ‘28자를 만듦에 있어서 쉽게 만들었으니 편하게 써라’ 이렇게 나온다. 그런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말하는 디자인 과정과 같은 거다. 이러한 새로운 디자인의 목적과 목표, 그 결과가 훈민정음 서문에 명확하게 나와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해례본 용자례. 한자를 지우고 한글만 남겼다.

 

 

여기서 훈민정음 서문에 들어있는 핵심 단어(Keyword)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말이 중국말과 다르다異는 자각에서 출발하여 문자를 모르는 일반백성一般百姓을 위해 지극한 사랑憫으로, 매우 쉽易게 배울 수 있는 새로운 문자新制를 만드니 바로 한글이다. 이 한글을 나날이 편便하게 사용하여 서로 뜻情이 통通하게 하겠다. 

 

*** 다를 이異, 가엾게 생각할 민憫, 쉬울 이易, 새로울 신新, 지을 제制, 편할 편便, 뜻 정情, 통할 통通

 

〈세종어제훈민정음〉, 화선지에 먹, 138×69cm, 강병인, 2018

 

 

이와 더불어 세종대왕은 새로운 문자를 가르칠 한글 사용설명서를 만들어 배포했다.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앞서 1443년 만든 어제 서문과 함께 최초의 한글 꼴과 그 문자를 만들게 된 간단한 예를 들어 보인 예의본과 더불어 제자해 그리고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 합자해, 용례예, 마지막으로 정인지 서문으로 구성된 사용설명서는 오늘날 어떤 디자인이 끝나면 만드는 매뉴얼북과 다름없다. 해례본은 인문서이자 자연과 인간의 삶을 궤뚫어 이치를 규명하고 그것을 문자의 운용원리로 끌어온 과정들을 설명하고 있다. 한글 디자이너 한재준 서울여대 교수는 훈민정음 해례본 자체가 정말이지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라 말하고 있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할 새로운 디자인 결과물 한글을 통해 모든 백성의 풍요로운 삶을 실현하려는 세종대왕의 꿈, 디자인 정신이 훈민정음 서문과 훈민정음 해례본에 오롯이 녹아들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서문을 외우기만 하고 해례본은 공부하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된다. 조금만 자세 살펴보면 정말 서문 자체가 디자인의 ABC를 다 말해 주고 있으며, 해례본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디자인에 대해 알고 싶으면 훈민정음 서문을 제대로 읽고 해례본까지 깊이 읽어라. 굳이 멀리 이국에서 찾지 말고 말이다.” 

 

또 하나는 ‘think different’를 예로 들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말은 스티브 잡스가 애플을 만들면서 썼던 슬로건임을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런데 600년 전 세종대왕도 ‘우리말이 중국말과 다른(다를 이異)데, 왜 한자를 쓰고 있느냐는 질문’, 즉 ‘다른 생각’으로 위대한 한글을 만들었다. 정말이지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으로 훈민정음 한글을 만들었다. ‘다른 생각’은 그 어떤 디자인 요소보다 우선하지 않을까.

 

Think Different

 

 

한글은 최소 형태소가 네모, 세모, 동그라미이다. 모든 미술에서 요구하는 기초 도형을 갖추고 있으며, 그 출발은 하늘은 ㅇ,  땅은 ㅡ,  사람은 ㅣ에서 기본 획을 가져 왔다. 완성된 글자의 첫 모습은 문자의 원형(응용까지 보여줄 이유는 없다, 응용은 후대의 몫이니까)으로써 무게중심이 가운데 있는 네모난 형태다. 그래서 가로쓰기, 세로쓰기에도 적합한 문자다. 물론 디지털 시대에도 굉장히 유리한 문자다. 그리고 응용 또한 쉬운 것도 사실이다. 디자인은 기능과 조형미라고 하지 않나. 한글의 첫 모습은 그것을 모두 갖추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있는 ‘정인지 서문’에 ‘스물 여덟자를 가지고도 전환이 무궁하다’라고 써 놓았다. 원형은 함부로 바꿀 수 없지만, 활자나 서예, 회화 등 후대가 마음껏, 마음대로 응용해 쓰라는 것일 거다. 

 

한글의 예술성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면?


직설적으로 말하면 한글을 단순히 소리 문자로만 가두어서는 안 된다.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삶, 소리가 그대로 녹아들어 있는 문자이기에 태생적으로 한글은 예술성을 확보하고 있다. 

 

한글이 기록으로서 문자, 소리문자를 넘어서는 예술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바로 ‘소리를 하늘과 땅, 사람으로 나누고 합하라’는 것이다. 


ㅂ  첫소리     하늘
ㅗ  중간소리  사람
ㅁ  끝소리     땅

 

ㅂ ㅗ ㅁ  풀어쓰기  음소  아직 글자가 되지 못하고 소리도 나지 않는다
봄          모아쓰기 음절  모아쓰면 비로소 봄~하고 소리도 나고 글자도 된다

 

나누면 음소문자가 되고 합하면 음절문자가 된다. 이 음절 문자의 자질은 하나의 대상을 1:1로 대응한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꽃, 똥, 칼, 콩, 닭, 뿔’ 자를 예로 들 수 있다. 뒤에서 언급하는 순환의 원리와 함께 소리문자 뿐만 아니라 표의문자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한글은 또 모음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형태도 뚜렷하다. 그리고 자음과 모음의 경계가 분명하고 안과 밖이라는 공간개념이 들어있다. 다시 말하면 하늘과 땅의 사이가 있고, 그 사이에 또 사람이 있다. 그 관계가 보이면서 공간도 들여다보이는 거다. 여타 문자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체계이다. 한글의 예술적 가치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 초성, 중성, 종성, 하늘과 땅과 사람을 나누고 합하는 것, 여기서 한글의 이미지성, 입체성, 공간성이 생기기 때문에 디자인적인 차이, 특징이 살아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서예로 넘어오면 예술성을 드러내는 아주 중요한 지점이 된다.

 

〈한글 모음을 보다, 우물쭈물〉, 강병인, 2021

 

 

글씨를 쓰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바로 나누고 합하는 한글 제자의 으뜸 규칙이다. 어떤 글씨를 쓸 때 먼저 해체가 필요하다. 나누지 않고 그냥 뭉쳐서 써버리면 초성, 중성, 종성, 즉 하늘과 땅, 사람 간의 사이나 공간개념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걸 해체해보면 하늘과 땅, 사람 사이에 관계가 생기고, 그 사이에 의미를 심을 수 있다. ‘타이포그라피’라는 용어는 ‘공간을 부리는 기술’이라고도 한다. 초성과 중성, 종성을 최대한 멀리 떨어지게 놓고 다시 각각의 사이를 조금씩 좁혀보면 가독성이 살아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글쓰기의 바탕, 강병인

 

 

해체하면 비로소 하늘과 땅, 사람이라는 문자의 체계가 드러나고 한글 창제의 정신이 보이게 된다. 해체하고 모으는 과정에서 획들의 두께나 크기 변화, 글자의 배치 등을 통해 한글의 멋도 다르게 나타난다. 앞서 언급했지만, 한글의 이미지성, 입체성, 예술성은 하늘과 땅, 사람이라는 체계, 즉 시스템에 있고, 그것을 해체하고 모아쓰는 과정에서 그 예술성은 더 극대화될 수 있다.

 

한글 입체성, 정병규

 

 

또, 순환의 원리를 말할 수 있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한글은 천인지를 바탕, 문자의 체계로 삼고 음양오행의 원리로 모음과 자음을 만들었다. 문자의 운용규칙 또한 다르지 않다. 음(달)과 양(해), 즉 낮과 밤은 계속 돌고 돈다. 모음 ㅓ ㅗ ㅏ ㅜ ㅡ ㅣ는 모두 순환하고 있다. 중성 모음의 운용원리는 여기서 시작된다. 자음은 아시다시피 발성기관의 상형화이다. 아설순치후, 오행으로는 목화토금수가 작용하고 있다. ㄱ은 오행으로는 나무이고 어금닛소리이며, ㄱ의 모양은 소리가 날 때 혀의 옆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그래서 한글은 소리와 글자가 다르지 않다. 바로 이기불이理旣不二론이다. 세계 언어학자들이 한글을 우수하게 보는 지점이다. 


그런데, 자음 역시 단순히 발성기관의 상형화만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끌고 왔다고 밝히고 있다. ㄱ ㅋ ㄲ은 소리의 세기에 따라 가획의 원리로 만들었지만 제자해에서 다시 자연의 변화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봄에 나온 나무 ㄱ은 무르고, ㅋ은 여름이 되어 무성한 것이고, ㄲ은 가을이 되어 나무가 딱딱하게 늙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ㄱ木之成質 목지성질 

ㅋ木之盛長 목지성장
ㄲ木之老壯 목지로장

 

ㄱ은 나무의 성질이요,
ㅋ은 나무의 성장(무성함) 이요,
ㄲ은 나무의 노장(늙어서 굳건함)인 까닭이다.

 

출처_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통사, 방종현 저, 이상규 주해

 

이렇게 자음은 소리의 시각화에 집중했다면 모음은 자연의 변화를 끌고 와 운용규칙으로 삼았다. 바로 순환의 원리이다. 나는 정말 이 지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글이 소리 문자를 넘어 뜻문자가 성립되는 중요한 원리이다. 서예나 멋글씨 등 글씨로 표현되는 한글 예술의 출발이기도 하다.

 

‘헌 혼 한 훈’ ‘슬슬 실실’ ‘엉엉 앙앙’ ‘옹옹 웅웅’ ‘응응 잉잉’ 

 

ㅓ가 ㅗ가 되고, ㅏ는 ㅜ가 되며, ㅜ는 다시 ㅓ가 되는 순환의 원리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쉽게 적을 수 있게 하였다. ㅓ와 ㅜ는 탁한 소리로 음성모음이고, ㅗ와 ㅏ는 밝은 소리로 양성모음이다. 모두 낮과 밤, 봄여름가을겨울이 돌고 도는 순환의 원리를 끌어 왔다. 주역에서 말하는 원형이정이다. 

 

故貞而復元고정이복원,冬而復春동이복춘.

 

어디 그뿐인가. ㅓ는 들어오는 기운, ㅗ는 솟아나는 기운, ㅏ는 뻗어 나가는 기운, ㅜ는 내려가는 기운이며, ㅡ, ㅣ는 멈추고 서는 기운을 드러낸다. 세상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엄마, 어머니는 ㅓ로 시작하고 돋다, 솟다 등은 ㅗ로 시작하며, 날다, 가다 등은 ㅏ로 시작 하며, 춥다, 굽다 등은 ㅜ로 시작한다. 

 

그것을 글씨로 드러내면 들어오고 올라가고 뻗어나가고 내려가는 기운과 소리를 보이게 하고 들리게 할 수 있다. 

 

한글의 모든 것이 자연인 거다. 세계 언어학자들은 한글의 가장 우수한 핵심 원리는 발성기관의 상형화라고 알고 있지만, 순환의 원리 역시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한글 제자 원리가 어쩌면 한글 예술의 원천이자 나의 글씨의 출발이기도 하다.

 

음양오행에 따른 순환원리, 강병인, 2021

 

 

글씨를 쓰실 때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시나.


‘솟다’를 예로 들어 보겠다. ‘솟다’라는 말은 뭔가 기운이 솟아나서 간다는 뜻이다. 뻗어 나가는 기운이 보인다. 나는 붓으로 이런 느낌을 보여준다. 원래 하늘 · 의 길이 변화를 통해 ‘ㅏ’의 가로획이 선으로 바뀌는 거다. 이 길이의 변화만으로 시간도 볼 수 있게 된다. 소리의 길이 마저도 보이는 거다. 들어오는 것, 내려오는 것, 올라가는 것, 뻗어 나가는 것, ‘얼쑤 좋~다’와 같은 소리꾼의 소리 마저도. 내 작업에서도 순환의 원리가 적용된다.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이게도 하고, 보이지 않는 뜻도 보이게 한다. 그런 걸 통해 한글의 예술적 가치를 찾고 있다고 봐주면 좋겠다.

 

모음의 길이 변화와 순환, 강병인

 


그렇다고 나의 모든 작업이 한글 제자원리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댥’이라는 글씨는 날개를 힘차게 펴고 있는 장닭의 형태에 주목하고 있다. 춤은 덩실덩실 춤추는 사람의 모양새를 가져 왔다. 자연과 인간의 생장수장과 희로애락 등 자연의 이치를 끊임없이 살피는 것에서 큰 영감을 받는다. 그동안 글이 가진 뜻과 소리, 형상의 시각화로 한글 꼴의 다양성에 대한 실험과 예술적 가치를 찾고 알려 왔다.

 

〈얼쑤좋다〉, 화선지에 먹, 60×34cm, 강병인, 2020

 

 

한글의 재해석, 현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


디자인도, 서예도, 미술도 모두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 중요하지 않나 싶다. 한글 역시 바탕, 제자원리는 누가 감히 쉽게 바꿀 수 없다. 한글의 재해석에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무한한 상상력을 허락해야 한다는 거다. 왜 질문하면 안되나. 한글은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거다. 어떤 이야기든, 어떤 질문이든 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고 혁신을 이루고 나갈 수 있지 않나. 그런 점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허락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멋글씨(서예의 순우리말, 영어로는 캘리그라피)도 전통 서예의 현대적인 재해석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에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디자인과 한글 예술을 넘어 한글 입력 방식 등 기술적인 문제는 그 분야를 잘 모르기 때문에 조심스럽지만, 현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가령 한글 완성자 11,172자를 각각 컴퓨터에 저장된 상태에서 그것을 한자한자 끄집어 내어 쓰는 것 보다는 천지인 입력방식으로 한다면 더 효율적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현재 초성 자음 19개, 중성 모음 21개, 종성 자음 28개 정도면 된다는 사실이다. 맨 처음의 ‘28자를 가지고도 전환이 무궁하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以二十八字而轉換無窮이이십팔자이전환무궁,簡而要간이요,精而通정이통.  


*** 한글 완성자 계산 방식=초성19˟중성21˟종성28=11,172자

 

외국에서도 전시가 개최됐다. 현지 반응은 어땠나.


주스페인한국문화원 초대로 지난해 9월부터 올 1월까지 전시를 했다. 그때 한국어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매우 높고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걸 알았다. 재작년엔 모스크바 주러시아한국문화원에서도 전시를 했는데, 거기도 굉장히 많은 러시아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이분들이 한국어를 배우면서 한글을 배울 땐 일반적인 쓰기만 배우는데, 글씨를 통해 한글을 예술적으로 표현한다고 하니 관심이 무척 높아진 거다. 개막식 때 200여 명이 줄을 서서 전시장에 입장했다. 당연히 교포분들인 줄 알았는데 모두 스페인 현지 분들이었다. 이유가 뭔가 살펴 보았다. 한국어를 배우면서 한글을 쓰다 보니 한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단순한 쓰기를 넘어 한글을 예술로 표현한다는 것에 관심이 폭발적으로 높아진 거다.

 

 

 

주스페인한국문화원 전시 

 

 

그때 한글의 예술적 가치와 또 다른 의미를 먼 이국에서 찾을 수 있어서 뿌듯했었다. 앞으로 더더욱 누가 어떻게 한글의 예술성을 찾고 알리느냐에 따라 K팝과 같은 그런 한류열풍을 일으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물론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이 활자든, 한글 디자인이든, 한글 서예든, 손 글씨이든 많은 연구와 실험이 필요하다. 다양성이라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 같이 고민해야 한다. 준비한 자만이 성공의 열차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이 달리 생긴 것이 아니듯이.

 

브랜드를 키우는 <글씨의 힘>은 어떤 책인가.


1998년부터 2021년 정도까지 진행했던 디자인 글씨 작업을 정리해서 낸 책이다. 브랜드 로고에 사용된 나의 디자인 서예를 모았다. 대표적인 작품들에 대해서는 의뢰를 받은 시점부터 글씨가 나오기까지 여러 가지 생각들과 아이디어를 전개하는 과정과 그것을 글씨로 옮기는 과정, 표현전략, 글씨의 방향성, 컨셉을 잡는 일련의 과정들을 글로 썼다, 광고주, 클라이언트와의 소통, 디자이너와의 소통, 결과물, 효과, 소비자의 반응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글로 다 쓸 수 없는 글씨들은 분야별로 분류하여 게재하였다.

 

 

<글씨의 힘> 표지 이미지

 

 

이번에 신간 <강병인의 글씨묶음집>을 새롭게 출간하시는데. 


<글씨의 힘>이 디자인 서예를 정리한 것이라면, 이번 책은 순수 서예를 정리한 거다. 93년경부터 쓴 글씨가 수록된다. 당시 한글도 우리가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글꼴이 다양할 수 있다는 것, 또 우리 말과 그 안에 든 소리, 뜻을 글씨로 담아냄에 따라 한글의 조형성과 예술적 가치를 찾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작업을 해왔었다. 그러한 작업의 종합적 정리라 말할 수 있겠다.

 

기본적으로 우리말과 뜻, 소리를 글씨에 담아내는 것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의 목표였다면 거기 하나 더 붙여서 한글의 제자원리를 글씨에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참 많이 해왔다. 고민하다 보니 뜻도 뜻이지만 어떤 기운마저도 표현할 수 있더라. 그런 생각들을 집약해서 작품을 해왔는데 그것들을 정리했다. 

 

다음 작업을 위한 정리이기도 하다. 이제까지 20년을 넘게 앞서 말한 방식대로 해왔다면 앞으론 좀 달라야 한다. 처음부터 다른 글씨가 아니면 안된다고 했지만, 생각이나 형식도  달라져야 한다는 절박함 그리고 새로운 생각과 다른 글씨를 쓰려면 그동안 해왔던 생각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어서 작품집을 만들었다. 

 

1993 그리고 2022년 까지 고민해온 결과를 총집약했다고 보면 좋겠다. 작품도 엄선해 고른 것이라 나름 의미가 크다. 새로운 실험도 많이 담겨있다. 한글 서예나 한글 멋글씨 하는 분들에게 좋은 자료, 길잡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강병인의 글씨 묶음집> 표지 이미지

 

 

 

<강병인의 글씨 묶음집> 내지 이미지

 


멋글씨, 캘리그라피 작업을 하는 분들 후배들에게 한 말씀해주신다면. 


용어를 잘 사용하면 좋겠다. 영어로 썼을 때 ‘캘리그라피Calii+graphy’라 정확히 표현해야 한다. ‘캘리Calli’, ‘칼리’는 그냥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럼 아무런 행위가 없다. ‘서예’도 ‘서’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서예Caliigraphy’라고 해야 한 분야가 되는 거다. 

 

캘리그라피에 대한 오해가 참 많은데. 결코 멋만부리는 글씨가 아니다. 반드시 서예를 바탕으로 해야 하고, 모든 미술의 바탕이 되는 조형성도 너무나 중요하다. 전통 서예를 바탕으로 글이 가진 뜻을 보다 적극적으로,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게 가장 중요하다. 전통의 답습이 아니라 더 좋은 글씨를 위해서, 창신을 위해서 전통 서예를 강조하는 것이니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글씨, 서예는 기록이라는 수단으로써 글쓰기였지만 오래전부터 예술적 가치로 승화가 됐다. 그 지점은 사실 도구에 있었다. 서예는 동물의 털로 만든 붓이라는 도구를 사용한다. 일반 필기도구는 잡는 법을 가르치지 않지만, 서예는 붓을 잡는 법부터 중요하게 가르친다. 그다음에 필법, 서법을 배우게 되는 데, 이때 동물의 털이 가진 탄력을 이용한 쓰기는 기록의 수단을 넘어 예술적 가치를 탄탄하게 확보해 준다. 붓의 필압, 필속, 농담, 장단 등 필의와 필세를 통해 삼라만상과 희로애락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서예이다. 그것은 천년이 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좋은 글씨가 뭐냐’고 묻는다면 ‘좋은 획’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단 좋은 획을 만들어야 좋은 글씨가 된다. 예술은 희로애락, 자연과 인간의 내면, 자연의 순환과 모든 변화들을 끌고 들어오는 것이지 않나. 서예를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붓이라는 도구는 배우기는 어려워도 잘 배워두면 그런 희로애락을 극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용에 편리한 도구는 표현의 한계가 금세 드러난다.

 

그리고 법고창신을 말할 수 있겠다. 결국엔 응용인거다. 단박에 좋은 글씨를 잠깐 보여줄 순 있는데 오래 갈 순 없다. 그러려면 기초 공부를 튼튼히 해야 한다. 서예가 반드시 기초가 돼야 한다. 적어도 3, 4년 정도는 말이다.


장자는 ‘깎고 쪼고 하다가 결국 소박함으로 돌아 간다’고 했다.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고도 한다. ‘깎고 쪼기’ 안에는 서예의 본질인 ‘붓과 글자를 잘 다루는 기예와 임서, 지식의 습득, 그리고 부단한 창작’에 있다. 이 네 가지 과정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좋은 글씨를 쓰고 서예가가 되려면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임을 받아들이면 좋겠다. 물론 즐기지 않고서는 무엇을 이룰 수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즐기는 단계에 들어서려면 장자가 말한 ‘깎고 쪼고’가 필요하다.

 

이렇게 서예라는 건 끊임없이 자기를 수고로움으로 내몬다. 먹을 갈아야 하고 최적의 농도를 찾아야 한다. 종이도 알아야 한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더 어려운 건 붓을 아는 일이다. 그 뒤엔 용필법을 알아야 한다. 좋은 글씨를 따라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용필법을 모르면 그냥 흉내 내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추사 선생은 붓을 다루는 기예가 갖춰졌더라도 만권의 책을 팔뚝 밑에 묻어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끊임없이 공부하라는 주문이기도 한 거다. 이 모두는 글씨로 업을 삼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 두려워해야 하고 새겨야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모든 미술의 근간인 조형성에 대한 공부와 고민도 아울러 요구된다. 휘갈겨 쓰거나 그야말로 멋만 부리는 글씨로는 멀리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글씨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딱 하나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만의 해석이 있어야 한다.‘꽃’이라는 글자는 하나의 꼴이지만 글씨를 쓰는 시점이나 감정, 해석을 달리하면 글씨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자기만의 해석이 있고서야 비로소 자기 글씨가 나오는 거다. 이치가 그러하니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사실 훈민정음 이야기, 한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선배님들의 연구 덕분이다. 훈민정음 연구에 헌신하신 방종현 선생, 강신항 선생, 이상규 선생, 김슬옹 선생 등 훈민정음 연구자 그리고 정병규 선생, 안상수 선생, 한재준 선생 등 한글 디자이너분들의 한글 연구 결과물 때문이다. 


자연은 내게 늘 큰 스승이었고, 모자람, 콤플렉스도 나의 스승이었다. 못난 글씨를 살려준 디자이너분들도 나에게는 스승이었다. 재주가 부족하니 글씨에 정직하고 오직 ‘정성’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새겼다. 그럼에도 교만을 부리는 일도 있었음도 잘 알고 있다. 지금 여기까지 온 것에, 모든 것에 감사함이다.

 

인터뷰어_ 정석원 편집주간(jsw@jungle.co.kr)
에디터_ 최유진 편집장(yjchoi@jungle.co.kr)
사진제공_ 강병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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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진 에디터
감성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디자인, 마음을 움직이는 포근한 디자인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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