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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뉴스

상계동 한복판에서 ‘문화’를 외치다

2011-08-05


도시가 있었고, 거리도 있었고, 그 속에는 당연히 문화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새삼스레 ‘문화의 거리’라는 말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처럼 느껴진다. 노원구 상계동에 위치한 노원 문화의 거리는 2008년, 조선시대의 파발마길 1.8km를 2년간에 걸쳐 조성한 거리를 말한다. 하루 유동인구가 50만 명에 달하는 상계역을 중심으로 조성된 ‘지금의 상계동’은 ‘그때의 상계동’과는 전혀 다른 풍광을 자아낸다. 집단의 기억 위에 잘 반죽된 콘크리트를 메우고, 전혀 다른 공간으로 우리 기억 속에서 굳어가고 있는 상계동. 노원 문화의 거리가 조성 된지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그 거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글 | 설고운 d-페다고지 기획 & 리포터
에디터 | 최동은(dechoi@jungle.co.kr)


서울의 꼭대기 상계동


서울 동북부 변두리에 자리한 상계동은 1970년대 서울의 무허가 판자촌, 일명 달동네였다. 이곳은 서울 달동네 중에서도 극빈한 축에 속했으며, 1965~68년에 철거민 정착지로 마을이 조성된 이후 주민의 60%이상이 단순노동이나 영세 상업으로 생계를 유지해왔다. 신문에 실린 기사내용은 당시의 상계동 살이를 사실적으로 전달한다.


고 씨네 집은 2000년에 도입된 우리나라 최저주거기준(1인당 최저주거면적 12㎡(3.6평))으로 비교해볼 때 6명이 1인 최저주거 면적에서 다 같이 지낸 것과 같다. 다닥다닥 서로의 머리를 맞대고 있는 지붕들 아래로, 꺾어지고 둘러진 골목길과 그 속에서 서로가 부대끼며 살아갔을 그들의 모습은 지금도 TV연속극에 등장하곤 한다. 물론 연속극에서 그 일상의 불편함을 전달하는 것에는 언제나 실패하지만.

상계동은 교통지옥이라는 또 다른 별칭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의 상황은 신문에 여러 차례 기사화 될 만큼 심각했다. 주민들은 출근시간에 버스를 타기 위해 장사진을 이뤘고, 시내에서 보기 드물게 버스의 구간운행과 합승택시가 인기를 끌었다. 상계동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버스노선은 모두 3개뿐이었기 때문에 버스는 물론 택시까지 승차전쟁을 불렀고 ‘따불!’을 외쳐도 지각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10여 년간 계속된 상계동의 출근길 진풍경은 지하철이라는 도심교통의 해결사로 인해 급속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상계동은 어두운 지하 동굴을 거침없이 내달리는 지하철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변해갔다. 지하철 4호선이 1985년 4월 20일 상계-삼선교(지금의 한성대입구역) 구간을 개통한 이후, 뒤이어 10월 18일 사당까지 완전 개통되었던 것이다.


영화 <상계동 올림픽> : 도시미화의 불편한 진실


상계동이 지하철로 인해 베드타운(Bed Town)으로 변모하자 부동산 시장은 어김없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1985년부터 상계동 판자촌은 상계 주공아파트의 공사가 진행됨과 동시에 철거되기 시작하였고 상계동 주민들의 삶도 철거되어야 했다. 그들은 2년 동안 이주 대책마련을 요구하며 철거를 거부했지만 협상은 결렬되었고, 결국 도봉구청은 철거반원들을 동원하여 포클레인 4대와 쇠망치로 강제철거를 시작하였다. 2년이 넘는 긴 항의는 단 40분 만에 끝나고 뿌연 먼지로 내려앉았다.

주민들은 상계동을 떠나 명동성당으로, 부천시 고강동으로 옮겨 다니며 암담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철거민들은 가건물조차 짓지 못했다. 고강동을 지나는 경인고속도로가 88올림픽의 성화 봉송로이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가건물을 허용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압력이 극할수록 그에 대응하는 방법도 극한 것일까? 철거민들은 결국 땅 밑으로 토굴을 파서 지냈다.

이 당시 그들의 생활은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상계동 올림픽(1988년 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88서울올림픽은 외국 손님들에게 가난한 서울의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국가적 목표를 위해 그들의 남루한 실생활을 땅 밑으로 감추었다. 국가발전이라는 추상적이고 거대한 슬로건 아래 구체적이고 소중한 일상이 깨어져 나간 것이다. 국가를 위해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국가 정책. 누구에게나 호소력 있는 듯하다. 하지만 희생당하는 그 누군가는 언제나 자본주의 경쟁에서 패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경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진실로 그들의 게으름과 무능력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이러한 상황은 단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닌 자본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드러나는 고전적인 현상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8베이징 올림픽의 모습은 우리네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치안을 이유로 노숙인과 판자촌 주민들을 강제 추방한 그들의 도시미화는 88서울올림픽이 그대로 재연되는 듯 보인다. 상계동 판자촌이 아파트라는 새로운 둥지를 맞이하였듯, 베이징의 판자촌은 전 세계인의 즐거움을 위한 올림픽 주경기장인 ‘냐오차오(새둥지)’를 맞이하였다.


상계동 문화의 거리: 조형적으로 바라보기


문화의 거리 입구에 들어서자 마치 그리스 건축을 연상케 하는 아치형의 ‘파발마 개선문’이 거리 입구에 서있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다는 이 상징물은 폭 10.45m, 높이 6.4m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그 특유의 거친 질감과 물성으로 아스팔트 위에 무겁게 내려앉은 듯 보였다. 기둥을 따라 시선을 위로 향하자 르네상스 시대의 돔 장식이 눈에 띈다. ‘문화의 거리’라는 양각의 사인보드는 풀칠하여 붙인 것 같고, 금속의 번쩍이는 표면은 돌과 함께 어우러지지 못하는 듯하다. 중세의 연금술사들이 현자의 돌(비금속을 금으로 만들 수 있게 하는 물질)을 얻기 위해 부단한 노력과 실험을 했다면, 파발마 개선문은 마치 더욱 값싸게 보이게 하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아, 무엇을 근거로 이런 물질성을 택했나 하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어쨌거나 형상이나 물성에서 ‘그럴 듯한 진짜’로 보이고자 하는 노력이 공공장소에서 노골적으로 보이는 것은 조금 당혹스럽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라는 이름을 가진 황동조형물이 지는 노을빛에 반사되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이 조형물은 몇 개의 단을 가진 원형으로 구성되어있고, 중앙의 저글링 하는 남자를 중심으로 피에로와 비보이, 그리고 작은 코끼리가 배치되어 있어 마치 서커스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천막 안에서 벌이던 판타지의 세계가 우리의 일상공간인 거리로 나와 서커스의 한 장면을 조형물로 재현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서양적 맥락을 가진 서커스를 재현해 보이는 이 조형물은 거리 위에 스며들어오지 못하고 급속히 수입된 느낌을 준다.


노원 문화의 거리에는 똑같은 생김새의 가로등이 일정 간격으로 세워져 있다. 아래에서부터 2/3정도까지는 돌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로는 황동으로 만들어진 듯한 붉은 철제가 돌을 받침대 삼아 그 위로 이어져 있었다. 돌의 중간쯤에 새겨진 ‘人山人海’라는 글을 보니 많은 사람들이 문화의 거리로 모여 사람으로 산과 바다를 이루기를 기대하는 듯 했다.

기둥 끝 양 옆으로는 아르누보 풍 특유의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장식되어 있고, 양 끝은 청사초롱 모양의 등이 나란히 매달려 있었다. 아르누보라는 서양의 100년 전 형태의 참조대상과 청사초롱이라는 화석화되어 버린 한국의 전통적 조형은 결국 이 거리를 조형적으로 충돌하게 만든다. 19세기, 생활공간 전체를 뒤덮어 ‘실내의 눈부신 환상’을 보여주고자 했던 아르누보양식이 21세기 한국으로 건너와 실외까지 뒤덮고 ‘실외의 불편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푸른 구름무늬 비단과 붉은 천의 상징적 원형성을 지닌 청사초롱은 19C 유토피아 건축의 필수 재료였던 유리와 철재로 이루어져 이질적인 간극을 극복하지 못하고 더 멀리 솟아오른 것처럼 보인다. 가로등의 재질과 형태 그리고 문양이 만들어낸 설명할 길 없는 독특한 미감(美感)이 문화의 거리 한 가운데를 줄줄이 이어가고 있었다. 조형적으로 살펴본 문화의 거리는 익숙하게 마주하던 일상의 거리가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은 거리이기 때문에 길들여져야 할 공간이었다. 푸코가 근대 공간에서 권력 관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였다면, 이제는 식민을 거친 나라, 포스트 시대의 문화 공간에서 조형의 관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사유 방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새로운 직업군의 탄생: 열린 공간의 대중적 체험
감각적 체험을 강조하는 마케팅의 등장은 대중공간을 급속도로 퍼져나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공간은 이제 여가를 소비하는 공간으로 등장하면서 ‘제3의 공간(the Third Place)’ 이라는 개념을 등장하게 만들었다. 노원 문화의 거리는 제3의 공간으로서 판매와 구매라는 본래의 상행위와 상관없이 소비자에게 정서적 충만함을 안겨준다. 제3의 공간들은 사람을 끌어들이고, 돌아다니게 유혹하고, 전체를 망라하는 생각을 불어넣어 주고, 호기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한 호기심은 이 거리에 활력의 입김을 불어넣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되었다.

거리 한 편에서 온몸을 하얀 석고로 덧바르고 조각처럼 아무런 미동도 없는 스태추 마임(statue mime)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스태추 마임은 배우가 특수 분장을 하고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관객이 다가오면 갑자기 움직여 관객을 놀라게 하고 웃게 만드는 공연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공연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응시하고, 만져보기도 하면서 즐기고 있었다. 연기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본다. 그는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온통 하얗게 분장한 그의 모습에서 다른 색깔은 오직 그의 검은 눈동자뿐이었다.


서로가 단지 스쳐지나가는 익명의 거리에서 그들의 공연은 판을 벌이고 광장을 탄생하게 한다. 광장은 ‘자기를 넘어서 그리고 주어진 현실을 벗어나 어떤 커다란 것에 온전히 자기를 몰입시키고자 하는 초월 의지, 비 일상으로의 탈출, 그 판타지 안에서 일상을 다시 바라보는 기쁨’을 느끼게 한다.

공연을 보고 웃는 거리의 우리들. 잠깐의 사건, 의미 없는 색다름으로 우리의 일상을 채워야 할 만큼 혹시 나의 것, 나의 생활에서 나오는 진정한 유희가 비어있는 것은 아닐까. 일상적인 시간의 틈새를 견디지 못하는 현대 도시인들에게 거리의 이벤트는 시각적 즐거움을 통해 여가를 유익하게 보내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적 시간을 호사롭게 보낼 수 있는 거리의 레퍼토리에 몰입하게 된다.


좀 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캐리커처(caricature)를 하고 있는 작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마임공연을 하는 연기자들과는 다르게 돈을 받고 그려주는 일종의 상업적 형태를 띠고 있었다. 비록 천막하나 없는 길 위에 조그만 이젤 두 개와 작은 테이블 하나가 전부였지만 작가들은 구경나온 엄마들과 소소한 이야기도 나누고 웃으며 그 길 위를 작은 아틀리에로 만들고 있었다. 귀스타브 쿠르베가 그린 <화가의 아틀리에(the painter's studio, 1855)> 가 거리 버전으로 재현된 듯 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그녀는 나에게 명함을 건네기 전 내 얼굴을 한번 쓱 훑더니 이내 명함 왼쪽에 무언가 그려 넣기 시작했다. 내 얼굴은 숲의 요정처럼 생긴 초록색 생물의 얼굴에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명함에 인쇄된 그녀의 이름 옆에 내 이름을 나란히 써주었다. 그녀가 내게 기울여준 관심으로 그것은 단순한 명함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듯 소중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작가로서의 면모와 함께 프리랜서로서의 비즈니스적인 고민이 많았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산업의 최전선에 상계동 판자촌 사람들이 있었다면, 2011년 현재 문화의 최전선에는 혹시 거리의 공연자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상계동 주민들이 산업시대 최전선에서 그들의 삶을 위해 투쟁을 했던 것처럼 문화의 거리 공연자들은 문화의 말단에서 삶과 생존을 위한 고민을 하고 보람을 찾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거리의 공연자들은 산업에서 문화로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장르가 바뀐 후기 산업 사회에서 상계동 주민들의 후예로 기록될 것이다.

이러한 공연 예술가들의 활동은 영속적인 작품으로 객관화되지 않는다. 또한 이들의 활동은 타인의 현존을 필요로 하는 활동이며, 청중이 현존할 때에만 생겨나는 활동이다. 빠올로 비르노는 이러한 공연 예술가들의 활동을 ‘탁월한 기예’라 설명한다. 비르노는 이 탁월한 기예가 문화산업의 탄생과 함께 대중적 노동이 되며, 문화산업 영역 내부에서 활동하면서 산업의 ‘윤활유이며 순수한 바셀린’이 된다고 표현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노동은 편안한 느낌, 행복, 만족, 흥분, 열정이 그 생산물이며 심지어는 결속감이나 귀속감도 포함되기 때문에 비물질 노동 즉, 정동적 노동이라 할 수 있다. 정동적 노동이 생산하는 것은 사회적 네트워크들, 공동체의 형태들, 삶능력(biopower)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삶의 형식이 창조되어 진다.

이렇게 볼 때 거리에서 만난 공연 예술가들은 탈산업사회의 이윤창출의 원천 즉, 확실한 창조적 계급이었다. 그들은 ‘탁월한 기예’를 거리 위에서 실현하면서 거리를 활발한 문화의 장으로 만드는 거리의 핵이며, 문화적 자본으로 그리고 창조적 자본으로서 문화전파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생산해 내는 창조물은 대중적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거리에 대한 특별한 기억까지도 선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소박한 공연에 잠시 머무르게 되고, 머무름을 제공한 공연자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받음으로써 서로가 위로라는 달램의 감정으로 맞닿아 있었다. 이것이 바로 삶 능력이며 삶의 형식이 창조되는 지점이 아닐까?


문화의 거리를 되돌아 나오며
노원 문화의 거리에서 조형물과 함께 그곳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마주했다. 노원 문화의 거리는 대중을 위한 문화체험의 장으로써 활용되고, 거리의 예술가들은 그 거리를 새롭게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독일의 사회학자 짐멜은 대도시의 삶이 만들어낸 정신적 태도를 둔감함과 속내 감추기라고 설명했지만, 이 거리 위에서 공허한 감정의 둔감함은 민감함으로, 속내 감추기는 드러내기로 소통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대도시의 삶의 일상성은 어떤 식으로든지 소통에서 비롯되는 듯 했다.

이쯤에서 노원 문화의 거리에서 아쉬운 점을 몇 가지 짚어보아야겠다. 우선 첫 번째로, 벌어지는 이벤트들이 다문화적이기는 하지만 그 소재가 한정적이며, 매주 거의 똑같은 이벤트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노원이라는 문화적 차별성 없이 다른 지역의 거리와 비슷한 모습이다. 이는 ‘도시 건설자들이 사람들이 교감하고, 어울리고, 교류할 수 있는 조건들을 창조하는 소프트웨어에 대한 관심보다는 도시의 하드웨어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찰스 랜드리의 말을 그대로 드러낸다.

두 번째, 이벤트를 통해 문화를 대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거리는 본래 그 지역 사람들의 문화가 반영된 공간이다. 하지만 노원 문화의 거리는 ‘거리’라는 본연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이 공간을 특별한 명칭으로 대상화하여 문화적인 공간이 아닌 물리적 공간으로 만든다. 그래서 노원 문화의 거리는 지역 주민의 일상적인 공간이 아닌 매주 토요일에만 열리는 이벤트의 공간으로 조성되고 있다.

노원 문화의 거리에는 이전의 상계동에 대한 기억은 없다. 1970년대의 상계동은 그 얼룩조차 없어지고, 문화의 거리라는 팻말로 대치된 것이다. 개인을 넘어 40대 이상 서울 시민의 집단의 기억 속에 있는 달동네 상계동은 이제 문화의 거리라는 인위적 공간으로 당분간 그 이름을 떠 올리게 할 것이다. 어떤 장소이든 그 안에는 나이테와 같이 빙-돌아 나오는 이야기가 둘러져 있다. 두 개의 이야기가 너무도 선명한 상계동. 우리는 과연 이 거리의 파사주에서 어떤 기억을 만들게 될까? 언젠가 이어지지 못한 상계동의 역사와 기억들이 잊고 싶은 이야기가 아닌 희망으로 문화의 거리의 이야기와 어울려 빙 돌아 나오길 바란다면 너무 큰 기대일까? 하지만 어떤 아쉬움이 있다 해도 노원 문화의 거리는 결국 주민들의 일상을 가꾸는 행동과 그들의 삶을 위한, 삶에 의한 소통으로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참고문헌
카시와기 히로시, 20세기의 디자인, 서울하우스, 2009
크리스티안 미쿤다, 제3의 공간, 미래의 창, 2008
김찬호, 문화의 발견, 문학과 지성사, 2008
빠올로 비르노, 다중, 갈무리, 2004
질 들뢰즈·안또니오 네그리 외, 비물질노동과 다중, 갈무리, 2005
찰스 랜드리, 크리에이티브 시티 메이킹, 역사넷,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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