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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展
미술

문의요망

마감

2009-09-16 ~ 2009-09-29




허진展 / HURJIN / 許塡 / painting

2009_0916 ▶ 2009_0929



허진_유목동물+인간2009-12_한지에 수묵채색_145.5×112_200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71109a | 허진 회화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9_0916_수요일_06:00pm

갤러리 스페이스 이노 개관기념 기획 초대전





스페이스 이노_SPACE INNO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 인덕빌딩 2층
Tel. +82.2.730.6763






유목 동물과 인간의 꿈, 그리고 색다른 경험1. 동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 한국 미술계에 서양의 모더니즘 미술이 들어오면서 서양적인 미학과 예술은 많은 미술인들의 창작에 영향을 주었다. 자신의 내면이나 우리의 감성과 문화적 특징 혹은 사회적 환경 등을 들어다보는 것보다는 서양미술의 방향이나 기법 혹은 외적인 모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 미술 양식을 따라가는 경향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독창적인 작품보다는 자신도 모르게 시류에 영합하는 작품들을 창작하게 되었다. 어쨌든 우리 미술은 대체적으로 1960년대 이후 다양한 변화를 맛보게 되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대학원을 졸업한 후부터 근 이십여 년 동안 유행이나 시류에 휩쓸림이 없이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과 어법으로 꾸준히 창작에 몰두하고 있는 허진의 작품세계는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 허진의 작품은 여느 작가들의 그것과는 달리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허진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시대가 지닌 문화적 충격이나 사회적 병리현상, 철학적 관점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나온 아픔까지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 이는 그만큼 허진의 작품세계가 단순히 감각적ㆍ기법적인 면만을 담고 있는 게 아니라 동시대 작가로서의 사명감과 시대정신, 자연 및 익명의 인간과 사물로부터 추출되는 꿈 등의 오묘한 예술성과 작가 정신까지도 깊숙하게 담고 있음을 의미한다.




허진_유목동물+인간2009-13_한지에 수묵채색_122×162_2009



허진_유목동물+인간2009-14_한지에 수묵채색_122×162_2009



허진_유목동물+인간2009-23_한지에 수묵채색_122×162_2009


2. 해체보다는 다양한 용량의 폭발

● 허진이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자신만의 표현과 이야기는 그의 작품을 이해하려는 이들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기에 허진의 그림에는 고대의 예술 정신과 전통적인 숨결뿐만 아니라 서양의 해체주의적 관점과 노마니즘적 시각, 후기모더니즘적인 사고 등 여러 시각과 관점과 방향이 존재한다. 그 때문인지 그의 그림에 대한 이론가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미술평론가 김복영은 허진의 예술을 ‘문자 그대로의 해체주의적 방식’이라고 표현했으며, 이종숭은 ‘인간과 역사의 운동을 화면의 표층으로 떼어내서 해체하는 것’으로 이해했고, 미술사가 심상용은 ‘현실의 해체적 재구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재현에 더 가깝다’는 조금 다른 관점을 드러냈으며, 서정걸은 허진의 그림에 ‘환경 문제가 중요한 주제로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이처럼 허진의 그림은 다양한 이야기꺼리와 소재 및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미지는 고대의 예술가들이 추구했던 것처럼 사실주의의 한 정점을 지탱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디오니스적인 사유가 저변에 흐르기도 하고, 고대를 사랑했던 프로이트처럼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무의식과 본능적인 향수, 심층심리 등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희망사항도 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의 향수가 물질문명의 산물과 더불어 융화되는 모습으로 드러나는가 하면, 예술과 사회가 교류되는 장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또한 고대에 관심이 많았던 아서 단토가 희망하는 것처럼 이론적인 것에 바탕을 둔 해석학적인 성향도 드러난다. 이것이 아마도 허진 예술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 이처럼 다양한 의미와 이미지를 담고 있는 허진의 그림은 그만큼 많은 용량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물과 익명의 인간이 뒤섞이는가 하면, 수묵의 텁텁함이 듬성듬성 던져진 채색과 조화를 이루어 강렬하게 드러나기도 하고, 전통적인 수묵 산수화의 느낌을 전제로 자신만의 시각으로 변형된 독특한 허진의 산수가 그려지기도 한다. 그러기에 다양한 제재와 이야기꺼리를 거침없이 펼쳐 보이는 그의 그림은 현실의 단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대 같은 것이자 상징적인 것이라고도 하겠다. 정처를 알 수 없는 무대 위의 공연을 보는 듯한 그의 그림은 익명의 인간과 동물 그리고 산수라는, 어찌 보면 지극히 고전적인 주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도 흥미롭다. 고발자로서의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 하면서도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리만큼 순수한 형태감과 자율성마저 지녔으므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게 그의 그림의 매력인 것이다. 요소마다 스며있는 촉촉한 색감은 우리의 오감을 자극시킬 만큼 예민하며, 다양한 모습의 익명의 인간들과 동물들의 표정 및 특징을 잘 포착한 형태는 예술철학적인 측면을 논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아름다움과 순수성을 담고 있다.




허진_유목동물+인간2009-24_한지에 수묵채색_122×162_2009



허진_유목동물+인간-문명2009-10_한지에 수묵채색_162×122_2009


3. 방황으로부터의 출구

● 그래서인지 허진의 그림들은 무상한 듯 멋대로 가는 것 같으면서도 자유로움과 생명력 그리고 진지함 등을 지니고 있다. 이 생명력은 곧 예술성을 지닌 순수라 하겠는데, 이 시대에도 마르지 않는 자연의 원천을 휴머니즘적이면서도 현대적으로 자연스럽게 표출해낸 것이라 하겠다. 그 때문인지 허진의 그림은 단순하지가 않다. 평면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마치 입체 작품과 같은 기분을 주기도 한다. 방대한 초원을 연상시키는 화면 안에서 사람과 동물들이 한데 뒤섞이는가 하면, 먹과 색이 자유분방하게 뒤섞여 하나가 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형식적인 측면을 떠나 강렬한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마치 과거가 있기에 오늘이 존재함을 말해주는 것처럼, 고대를 새로운 출발점으로 한 유목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동물이라는 매개체 사이에서 드러나는 연관성을 바탕으로 현대의 불확실성과 불합리함을 고발하려는 속내까지 드러낸다. 요제프 올부리히는 예술 작품을 ‘예술 애호가에게 조용하고 우아한 피신 장소를 제공해 주는 신전을 세우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허진의 예술 작품은 단지 우아한 피신 장소만이 아닌, 다양한 원천들의 조합 속에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일종의 생명성을 환원시키는 것과도 같은 메시지와 힘을 지닌 것이기도 하다.




허진_유목동물+인간-문명2009-28_한지에 수묵채색_112×145.5_2009


방황하는 듯이 걷거나 뛰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간들과 엉켜있는 낙타, 산양, 코뿔소 등의 모습은 자연과 인간이 서로 합일되고 보편적인 이념이 성취되는 세계라기보다는, 자연과 인간, 생의 시작과 종말의 무대가 원초적인 공간 속에서 자유분방하게 새로운 프레임을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방황하는 익명의 사람과 동물들이 하나의 공간 속에서 중복되고 잘려 나가기도 하는 것이다. 평면 작업이지만, 마치 삼차원의 공간 속에서 서로 얽히고설킨 것처럼 무질서하면서도 숨을 쉬는 것 같고 삼차원의 공간이 일차원으로 환원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마치 기계가 조립되고 분해되듯,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허진의 손 안에서 새로이 조합되기도 하고 뜯어지기도 하며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는 인간과 동물 그리고 삶의 역사적 카오스가 역류를 한다. 그는 이 카오스 속에서 드러나는 예술에서의 유토피아를 인간과 자연의 틀에서 볼 수 있는 허상에서 찾지 않고, 인간과 자연 및 현대와 과거가 뭉뚱그려져서 현실과 괴리가 있을 것만 같은 또 다른 공간에서 찾는다. 이 공간적 실체는 몽상가의 유토피아일 수도 있고,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미지와 꿈의 허상일 수도 있다. 블랙홀 같은 이 실체는 허진이 집요하게 평면 속에서 여러 대상을 대입시켜 가며 성취해온 익명의 인간과 유목, 현대 산수도 시리즈 등이다. 이처럼 다양한 시리즈는 그가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생명과 자연을 바탕으로 한 휴머니즘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 허진의 근작인 「유목동물+인간」 시리즈는 그의 독특한 예술가적 기질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그림의 제목은 그다지 흥미를 못 느끼는 문외한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즐거운 스토리를 연상시킨다. 그림을 바라보면 강렬한 색을 바탕으로 한 동물들과 시커먼 인간들의 모습이다. 더구나 등장하는 대상들은 위치와 방향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좌우 구분 없이 황당하게 전개되는 형국들이다. 또한 관람자들은 익명의 인간들이나 무미건조한 느낌의 인간의 모습과 꽃 그리고 뒤죽박죽이 된 다양한 동물의 모습 등에서 야릇함과 궁금증을 갖게 된다. ‘왜 작가는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하는 궁금증과 함께 정확하게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벽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기에서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는 미적인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예측하지 못 했던 것과 상상력으로 인한 강력하면서도 모호한 그 무엇, 다시 말해 위대한 것, 뜨거운 것, 강력한 것, 정상적으로 생각해 낼 수 없는 어떤 폭발력 등을 맛볼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칸트가 이야기하는 숭고와 같은 색다른 경험인 것이다. 이처럼 허진의 그림은 잡을 수 없이 끝없는 신비로움을 우리의 현실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적 친밀감과 교묘하게 결합시킨 것이다. 또한 새벽닭의 울음처럼 맑고 투명하다. 허진은 우리의 정서를 지녔으면서도, 독창적인 그림을 집요하게 추구하며 외길을 걷고 있는 외로운 예술가가 아닌가 싶다. 인간의 삶을 누구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휴머니즘 예술가인 허진의 앞으로의 여정이 궁금해진다. ■ 장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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